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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소망 예수 (벧전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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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실에 대한 찬송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3절은 “찬송하리로다”로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노래인 것입니다.세상 노래들은 글자 그대로 유행하는 노래들입니다.그 때 유행이 지나면 그 노래는 시들해져 버리고 맙니다.그러나 찬송은 100년 전에 부르던 찬송을 지금 불러도 새롭고 은혜가 됩니다.그 이유는 찬송은 유행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찬송은 신령한 노래이며 구원의 찬송이기 때문에 40년,100년,1000년을 불러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세 가지 사실에 대하여 찬송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시는 사실을 찬송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산 소망으로 믿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소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첫째는 악한 소망입니다.악을 계획하고 그 악을 실천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악한 소망입니다.
둘째는 선한 소망입니다.본문은 그것을 산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소망이라는 단어의 어근은 바타흐(batach)라는 말입니다.“바타흐”라는 말의 뜻은 피난을 가기 위해 서둘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그 말이 상징적으로 변해 “확신한다,신뢰한다,안전하다”라는 뜻이 된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산 소망”이라고 한 것은 그 소망이 살아 있는 소망이며 생명이 있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에게 거는 기대나 신뢰나 희망도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39:7에서 시인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경건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인처럼 주님께 소망을 두고 세상을 살고 인생을 살아 나갑니다.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어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되었습니다.요즘말로 하면 사업에 성공하여 때돈을 번 것입니다.그는 큰 창고를 짓고 소출로 거둔 곡식을 저장하고 배를 두드리며 “내 영혼아 먹고 마시자”라면서 그 물질에 소망을 두고 기뻐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그러나 이 이야기는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업에 소망을 거는 사람은 그 사업이 몰락할 때 함께 몰락할 것입니다.우리는 그런 실례를 최근 모 선박 회사 회장의 투신 자살 사건을 통하여 볼 수 있었습니다.가진 소유에 소망을 거는 사람은 그 소유가 불타거나 없어지면 함께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권력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그 권력이 붕괴되면 함께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원한 소망이며 산 소망으로 믿고 주님께 산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무너지거나 흔들리거나 붕괴되는 일이 없이 자신을 지키며 믿음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철야 기도회 시간에 뇌성 마비로 전신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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