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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거부 (삼상 1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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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한 죄와 하나님의 심판은 사무엘상 15장에 기록된 사건들을 수반합니다. 이 기사는 아말렉 사람들을 죽이라고 사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가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말로 끝납니다. 아말렉 사람들의 운명이 아무리 무시무시하다 하더라도 중심 무대요. 진짜 비극적인 인물은 사울입니다. 아말렉의 왕 아각이 사무엘에 의해 처형된 것처럼, 사울은 하나님께 처형되었습니다. 길보아 산에서 사울의 목숨에 휘장이 쳐질 때까지(31:4) 이 비극에는 많은 배우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사울은 ‘살아 있으되 죽은’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극의 핵심에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끝내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고든(R.P. Gordon)은 적절하게 설명합니다. “…13:7-15절에서 순종은 사울을 넘어지게 한 돌이었다. 여기에 그를 짓누르는 바위가 있다.”
사울과 아말렉 사람들(15:1-9)
이 내용은 사무엘이 아말렉과 싸워 그 민족을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사울에게 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 아말렉을 전멸시키라는 명령(15:1-3)
하나님의 명령은 노골적이었습니다. (삼상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진멸하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렘(herem)입니다. 이 단어는 ‘추방’이나 오직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합니다(예:렘27:28). 이 경우에 여호와는 심판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약속의 땅의 중심부에 정착하고 있는 가나안의 부족들을 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신20:16-18). 아말렉의 멸망은 그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이스라엘과 싸운 최초의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르비딤( 모세의 손이 들려지면 이스라엘이 승리하던 지역)에서의 전투를 마친 후에, 하나님은 “아말렉을 도말 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할”것이며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출17:8-16, 신25:17-19).
이것은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난해하게 여기는 구약의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민족을 전멸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은 매우 가혹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전멸 대상에 어린아이와 젖먹이까지 포함된 것은 너무 무차별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가축과 유적들까지 정죄 대상에 포함된 것은 전멸하라는 암울한 하나님의 뜻에 이상하게도 야만적인 기풍을 덧붙인 데서 비롯된 일인 같습니다. 우리는 폭력과 피 그리고 무엇보다도 싹쓸이하라는 명령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일 수 있는가 하는 의혹 때문에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참조, 요일4:16).
우리가 죽음과 심판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인간, 심지어 악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겔33:11).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이행되어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든 영원한 것이든 하나님의 사형 선고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나안 사람들과 아말렉 사람들에 대한 전멸 명령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민족들이 매우 악했기 때문에(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철천지원수였으며,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옛언약의 백성이 형성되는 데 최대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구 표면에서 그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전멸 명령을 이행하는 이스라엘의 성실성도 포함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수세기가 지나도록 그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으며, 마침내 그들이 쫓아내야 했던 민족들의 거짓 종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전멸 명령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전개되는 역사의 결정적인 시점에서 적의에 찬 악의 공모에 직면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영적, 유기적 완전성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방책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에서의 유일 무이한 계기였다고 해서 ‘성전(‘聖殿) 신학의 토대가 되거나 ’무신론자‘와 ’이교도들‘에 대한 전멸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그들은 이방인 소탕 작전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의 표면으로부터 영원히 악인들을 멸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이 멸망이란 죽음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육체적인 죽음이고 나중에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구원이 모든 시대, 모든 세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듯이, 죽음도 모든 시대, 모든 세대의 모든 민족에게 임합니다. 아말렉 사람들의 운명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악인의 운명의 예시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당하는 심판도 아말렉 사람들이 당하는 심판 못지 않게 가혹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모조리 죽게 될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다루신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은 죄라는 사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는 것은 공의롭다는 사실, 보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죄인인 나는 나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그런 정죄를 받아 마땅하며 내가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는 사실(애3:22)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말렉을 전멸하라는 명령은 모든 시대의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적용되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죽은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엄숙하게 언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수확을 쌓아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모든 세대는 들의 곡식과 같습니다. 거둬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썩어서 죽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 신지, 그리고 역사가 어디로 진행되고 있으며 구원하시려는 그의 목적이 얼마나 자비로운지를 우리가 이해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의 참된 본성의 배후에서 우리는 아말렉과 같은 부류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생을 얻기 위해 회개하고 믿음을 간직하라는 그의 욕구에 신속하게 응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한 갈릴리인 들이 다른 갈릴리인 들보다 더 많으나 죄를 범했는지 그리고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그들에게 한 대답은 간단하고도 엄숙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1-5).

2. 사울의 명령 이행(15:4-9)
사울은 군대(이 작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남자들)를 소집해서 가사 남쪽의 사막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말렉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습니다(15:4-5). 아말렉 사람들 사이에는 겐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겐족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다스리던 부족이었습니다(출3:

1. 18:1-12, 삿1:16). 그들은 늘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전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민10:29-31). 그들에게는 대학살을 피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15:6).
그 후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급습하여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그 백성과 열등한 가축만 죽였던 것입니다. 전멸 명령은 선별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아각’은 아말렉 족의 왕이었습니다. 아각이라는 말은 인명이 아니라 관직명일 것입니다(민24:7). 사울은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던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들 중 일부는 도망쳤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다시 출현하였다가 결국 히스기야 왕 시대에 일소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27:8, 30:1, 삼하8:12, 대상4:43).
사무엘과 사울의 불순종(15:1-2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그리고 이와 더불어 사울에 대한 짧은 글이 나옵니다. (삼상15: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의 행동에 대해 ‘후회한다’(히브리어 niham)고 말씀하신 성경의 수많은 예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후회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15:29, 말3:6, 약1:17). 그러나 변화 무쌍한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변화하는 우리 삶의 상황들에 영향을 미치는 식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명하시고 인간적인 동요를 통해서 자신의 주권적이고 불변적인 뜻을 수행하십니다.
사무엘은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였”으며 밤새도록 열심히 기도했습니다(15:11). 그 당시 그는 언젠가 사울이 끝장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울은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슬픈 처지 때문에 근심했습니다. 그는 사울을 용서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타락한 왕 때문에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의 기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1. 자기 기만(15:12-15)
다음날 사울을 만나러 간 사무엘은 왕이 바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갈멜”(갈멜산이 아니라 헤브론 근처의 마을)에 있었으며, 자신의 승리에 대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모세는 아말렉 사람들을 물리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제단을 세웠습니다(출17:15-16), 사울의 기념비는 그이 자기 과시 성향을 폭로합니다. 그 후에 그는 길갈로 내려갔습니다. 고든(R.P. Gordon)은 “그 곳은 그의 왕권 개시와 관련해서든(참조,11:14). 혹은 예언된 왕권 종결과 관련해서든, 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곳”이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의심하지 않는 왕과 만났으므로, 그곳에서 사울의 통치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온 것을 보고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15:13). 죄에 열중해 있는 사람은 뻔뻔스럽게 죄를 짓거나 악을 선으로 재 정의합니다. 악을 선으로 재 정의하는 것은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긍정적 이미지를 선호하고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기만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위가 장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장모에게 그대로 고하는 앵무새처럼, 사울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끌어온 짐승들을 그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15:14).
사울은 사무엘의 질문을 받고 미리 준비한 대로 가장 경건한 말로 설명했습니다. 이 일의 책임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군인들임을 넌지시 암시하면서 그는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하러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겼”다고 말했습니다(15:15). 어째든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의 죄를 경건을 구실로 은폐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쓸데없는 잡담이 ‘친교’로 둔갑하며 자녀에 대한 억압이 ‘성경적인 훈육’으로 재 정의됩니다. 교회의 일을 한답시고 직장을 소홀히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고 착각합니다. 경건을 가장한 자기 기만의 가능성에는 한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공공연히 악한 짓을 저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죄들은 대부분 선한 것으로 위장됩니다. 죄는 부자연스러운 정당화의 옷으로 치장되곤 합니다. 우리는 무죄하다는 주장으로 자기 기만의 요새를 방어하곤 합니다.

2. 자기 정당화(15:16-21)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에게 빛을 비춰 주지 않으셨습니다. 경건의 방어는 일소되었고, 불순종한 약탈에의 열망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삼상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이 비난을 받고서 사울은 계속 자기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군사들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15:20-21). 군사들, 특히 승리한 군사들은 통제가 잘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울이 그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의 항의에도 이 지를 시인하는 것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아각을 끌어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신실성을 입증해 주는 표시라도 되는 것처럼 진술합니다. 사울은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왕으로서 버림받았다는 말에 대한 사울의 반응(15:22-31)
사울이 끝까지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것을 보고서 사무엘은 그에게 심판을 고지했습니다. 충고하고 화해하고자 시도하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변명과 속임수의 때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1. 왕으로서 버림받은 사울(15:22-23)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내적인 순종 없는 외적인 형식은 하나님을 화나게 할뿐이라는 것입니다(시50:7-15, 51:10-19, 사1:11-17), 하나님은 겉치레와 허세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덧칠한 페인트는 금간 벽을 잠시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의 붕괴를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 하나님에 대해 저지른 죄입니다. 그이 반역은 “사술의 죄”와 같고 그의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들에게도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그는 우상들에게도 절했던 것 같습니다. 사울에게는 그의 뜻이 그의 우상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폐위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왕으로서의 사울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15:23) 비록 이 말 뒤에 그이 폐위가 따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선고는 최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묵인 하에서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왕이 백성이 뽑은 왕을 대신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2. 거짓 회개와 겉치레(15:24-31)
사울의 반응은 이기적임과 동시에 가련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회개’는 그의 죄보다 더 악했습니다. 하나님의 선고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는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부당하다고 여겼지만,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계속해서 죄를 군사들에게 돌리려고 하는 데에서도 입증됩니다. “내가 계속해서 죄를 군사들에게 돌리려고 하는 데에서도 입증됩니다. (삼상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이것은 모든 것, 특히 백성들 사이에서 자신의 명성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의 회개였습니다. 그의 회개가 거짓이라는 것은 사무엘에게 백성 앞에서 자기 체면을 세워 달라고 한 그의 요청(15:25)에서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사무엘이 이를 거부하고 떠나려 하자, “사울이 그의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졌습니다(15:26). 이것은 일어난 일을 예시해 주며 하나님의 심판이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엄숙하게 확증해 주었습니다.(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 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그래도 사울은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준엄하게 다시 언명된 후에도 사울은 사무엘에게 (삼상15: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 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여” 달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사무엘도 인간인지라(15:29) 마음을 바꾸고 사울을 따라가서 이스라엘 군사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15:31).
분기점
사무엘이 사울을 따라간 진짜 동기는 사울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그가 이 때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짐작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말렉 왕을 데려오라고 요구한 데서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사울이 행하지 않은 일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이 사악한 왕을 처형했습니다. 아각은 “사망의 괴로움”이 끝났다고 안심했지만, 사무엘은 그의 이러한 마음을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에는 칼로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사형은 응보의 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여자들은 무자케 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가 무자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선고에 담긴 민족적 보응으로부터 그의 어머니가 죽었으리라고 추론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사무엘은 칼을 들어 제단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아각을 쳤습니다. 이리하여 아말렉을 전멸하라는 명령은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각 다른 길을 갔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따르면, 사무엘은 다시는 사울을 “보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이 “사무엘 앞에 예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상 19:24절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본문을 융통성 있게 해석하여 “사무엘이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다.‘고 해석하면 해결됩니다. 본문 상의 문제들이 어떻게든지 간에,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무엘이 사울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악의 강을 건너갔습니다. 더 이상 경고도, 호소도, 간청도, 질책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진정한 영적 상태의 불기피한 결과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두려운 일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옳은 길처럼 보이나 그 끝은 사망인 경우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자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 악한 세상에 사는 악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아버지 하나님께 거부당하게 된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습니다(마23:37-38). 구세주와 구원받은 사람의 공통된 기쁨은 사람들이 주를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인들이 정죄 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겔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 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사울은 하나님 말씀의 레이저 광선에 자기의 마음과 양심을 내비치기를 싫어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연적인 모든 성향을 거역하고 자기에게 우리의 삶을 바치도록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실천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말씀을 가지고 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자기를 믿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이 말씀에서 참된 자유와 참된 행복을 찾게 됩니다.
(시139: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 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시139: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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