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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의한 청지기 (눅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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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누가복음 14장과 15장의 흐름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부르시며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14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까지에는 우리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음도 보았다.

소금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을 경우엔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도, 우리가 그 부르심의 종착역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하차한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으로인해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복된 사건만이 아니다.

잘못하면 본전도 못건지는 어리석음일 수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14장은 우리더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전에 먼저 앉아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그 어떤 비용이 들고 그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감수하고 따라가겠다는 각오가 선 사람들만 하나님을 믿는 일에 나서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만들어내는 작품이 아니었으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값 없는 선물이었다. 우리의 상태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씻으시며 당신의 품안에 맞아들이심. 이것이 한 사람의 죄인이 의인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죄인이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이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자기 죄 때문에 고통하는 사람이며, 자기 속에 죄를 두고는 하나님 앞에 그 어떤 충성도 그 어떤 열심도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의인 아흔아홉에서 이탈된 잃어버린 영혼이며, 주인의 손에 찾아지는 은전 한닢이다. 집을 나간 탕자 역시 아버지 앞에 열심으로 충성해서 아버지께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나눠받아 먼 나라로 도망갔으며, 거기서 그 모든 재산을 흥청망청 써버린 것밖에 아무것도 없다. 그 이후에는 주린 배를 채우려고 날품을 팔다못해 아버지 집에 종으로 돌아온 것. 이것이 그의 이력의 전부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만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의인 아흔 아홉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한다.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믿는 길에 나선 사람들에게 의인 아흔 아홉의 길과 죄인 하나의 길을 보여주며,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도록 한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지만 신앙 생활은 누가복음 15장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정작 이제부터이다. 이제까지의 과정에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참여한 것이 별로 없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것이라든지, 의인 아흔 아홉의 집단에 끼어 있지 못하고 유리방황했다든지 하는 것도 우리가 한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부르심의 주체, 의롭다 하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몫이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의 영역에서 자기 노력을 쏟아붓는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자청하고, 불철주야 충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무엇인지 알고나면 대부분은 두 손 들고 마는데, 그 이유는 정작 자신이 노력하고 열심이어야 할 부분은 이제부터라는 점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이런 사람들은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의 영역에서 너무 기진한 나머지 정작 자기 힘을 쏟아부어야 되는 영화롭게 하심의 단계에서는 그 길의 까마득함에 정신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누가복음 16장은, 15장에서 의롭다 하심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사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다. 즉 돌아온 탕자가 그 이후에 살아갈 삶의 모습이란 말이다. 그래서 16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15장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세리와 죄인, 두 부류를 대상으로 전개된 비유였지만(눅15:1), 16장은 이제 제자들에게 이르시는 비유이다. 물론 그들 곁에서 바리새인들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15장에서 예수의 언행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이라 예수의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을 삼고자 들었을 리는 없다. 어느 곳이든 꼬투리만 잡으면 험담을 늘어놓기 위한 들음이요 나아가 예수를 자기네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전략전술로서의들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역시 바리새인들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관심은 오직 당신의 제자 곧 15장의 비유에 등장하는 잃어버려진 존재들이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다시 찾아진 존재들에게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누가복음 16장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누가복음 16장은 예수의 비유 두 개와, 그 사이에 첫번째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의 반응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누가복음 16장을 여는 예수의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로 일컬어지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엿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말씀에 대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예수는 전광석화와 같은 몇마디 말씀을 덧붙이신 다음, 너무나 유명한 비유 부자와 나사로를 들려주시고 16장의 문을 닫는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살아있다는 말은 서로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요, 그러므로 앞뒤의 두 비유는 서로 동일한 흐름 가운데서 이해되어질 어떤 메시지라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서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15장의 세 비유가 모두 잃어버려진 어떤 대상을, 주인이 찾는다는 의미에서 서로 동일했던 것처럼 16장의 두 비유도 그렇다. 하지만 15장의 세 비유 역시 그 조명의 각도가 서로 조금씩 달랐던 것처럼 16장의 두 비유도 총론적인 의미는 같지만 각론에서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우선 두 비유에 주인공격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서로 비슷하다는 점이다. 첫번째 비유의 청지기는 비록 그가 주인의 소유를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꼬리표가 붙긴 했지만, 주인이 그의 청지기 사무를 완전히 회수하기 이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부자였으며, 두번째 비유에서는 나무랄 여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 부자가 등장한다. 또한 첫번째 비유에서도 이 부자에게 은혜를 입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두번째 비유에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는(다시말하면 어찌됐든 부자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나사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시간이 지난 다음 부자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점이 서로 동일하다. 그러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앞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을 들었으나, 뒤에 나오는 부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냉대를 받는다는 점이다. 즉 둘 다 불의한 청지기(이 점은 뒤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라는 면에서는 동일했으나, 전자는 성공한 청지기요 후자는 실패한 청지기라는 점이 서로 다르다. 여기에 누가복음 16장의 어려움이 있다. 인간세상의 일반적인 윤리 도덕으로 보면 전자는 책망 받더라도 후자는 별로 나무랄 일이 없어보이는데 예수의 비유는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다.

그러면 예수는 어찌하여 이처럼 얼토당토 않아 보이는 말씀으로 그 제자들을 당황하게 만드시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 두 비유를 통하여 우리 신앙 생활의 핵심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입은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만 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이보다 더 아름답고 이보다 더 반짝이는 비유를 만날 수 없음도 알게 된다. 그만큼 이 비유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사람들이 가진 상식의 허를 찌르는 통쾌함이 있다. 그래서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윤리 도덕적인 기독교인들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가는 사건임에 틀림없으며, 학자들 역시 이 부분을 난제로 취급하여, 주인은 그를 칭찬했지만 그 주인이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느니, 그렇다고 우리들이 불의한 청지기처럼 살 수는 없다느니, 갖은 말들로 얼버무리려 하지만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어쩔 것인가. 선입관을 버리고 말씀 안으로 들어가자.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우선 청지기라는 말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자. 이 말의 헬라어 원어는 오이코노모스(oijkonovmo인데, 이 말은 집이라는 뜻의 오이코스(oijko와 법이라는 뜻의 노모스(novmo에서 유래하여, 가정의 관리자(즉 집사), 또는 감독, 이 방면으로 능력이 있는 고용인, 함축적으로는 국고 대리인(庫지기), 시종, 총독, 청지기 등의 의미이다(제임스 스트롱의 신약 헬라어 사전). 즉 주인의 뜻을 받들어 그 뜻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청지기인 셈이다. 그러므로 청지기 사무를 잘하고 못하고는 오직 그가 주인의 뜻을 제대로 집행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인이 그에게 맡긴 것이 재물이건 권세이건 무엇이건 간에 청지기로서의 삶을 잘 산다는 것은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맡은 바를 주인의 뜻에 맞도록 제대로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청지기로 있는 사람이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였고 그의 주인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챘다. 우리가 주인이라고 하더라도 청지기를 해고시킬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청지기를 해고시킬 것이냐 아니면 다시한번 기회를 줄 것이냐에 있지 않다. 문제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에 있다. 청지기가 어떻게 한 것이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것인가. 예를 들어보자. 어떤 회사의 사장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사 둘을 불러다가 각각 이백만원의 돈을 봉투에 담아 나누어 주면서 우리 회사에 아주 중요한 바이어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과 함께 그날 저녁 접대할 바이어를 각각 일러주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바이어를 상대로 이십만원 어치만 대접하고 백팔십만원은 자기 통장에 저축했으며, 또 한 사람은 이백만원 모두 바이어를 대접하는 데 써버렸다.

그러면 이 경우 누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였는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은 청지기가 그것으로 술을 마셨느냐 아니면 골프를 쳤느냐에 있지 않다. 주인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청지기의 행동이 주인의 돈으로 골프나 치고 술이나 마시는 한심한 짓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주인의 뜻인 경우 그행동은 전혀 허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의 뜻을 집행하는 것이며, 따라서 제대로 된 청지기이다. 그러나 반대로 회사 돈으로 술이나 마시고 골프나 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장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양심상 그럴 수 없노라고 자기 주머니 속에 그냥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물론 주인이 계산서를 제출하라면 돈을 반납할 것이다),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일 수 있지만, 그러나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청지기로서의 자세는 아니다. 이런 저축이야말로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전형이다.

그러므로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느냐 아니면 제대로 집행했느냐 하는 것은 애시당초 주인이 그에게 소유를 맡기신 뜻이 어디 있느냐에 있다. 사람들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가장 당혹해 하는 점은 그 주인이 어찌하여 주인에게 빚진 자의 빚을 제 맘대로 탕감해 준 청지기를 칭찬했느냐 하는 것인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주인에게밀 백석 빚진 사람을 불러 팔십으로 고쳐주는 것이야말로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것이며, 나아가 주인의 뜻에 반하는 행동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비밀이 있다. 만에 하나 주인이 당신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라고 청지기에게 그의 소유를 맡긴 것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라고 준 주인의 소유를 자기 창고 속에 움켜 두고만 있으면 이것이야말로 주인의 소유를 썩히는 것이며 낭비하는 것이며 허비하는 것 아니겠는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다는 말이 지니는 이런 의미를 마음에 지니고 그 다음 본문을 보도록 하자.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주인으로서는 청지기를 불러 해고 계획을 통보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청지기가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든지 아니면 다시 주인의 뜻을 가르친 다음 한번 더 기회를 주든지 하는 것은 모두다 주인의 재량이다. 사실 청지기라는 것은 일을 제대로 못해도 주인이 생각하는 어떤 때까지 그 일을 맡겨둘 수도 있는 것이고, 일을잘해도 때가 되면 더 큰 일을 맡기기 위하여 교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가 이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청지기라는 직책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 준다. 불의한 재물을 맡아 그 주인의 뜻대로 집행하는 것도 청지기 사무의 일종이지만, 참된 것을 맡아 그 주인의 뜻대로 집행하는 것도 청지기 사무의 일종인데, 즉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불의한 재물에조차 충성할 수 없을진대, 어떻게 참된 것이 우리에게 맡겨지겠느냐는 경계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참된 것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청지기들이 그 다음에 주인으로부터 맡아서 관리할 어떤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인이 청지기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 것은 청지기로서의 삶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주인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이 모든 소유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자신은 주인의 소유를 위임받아 주인의 뜻에 맞도록 그것을 집행할 뿐이라는 인식이 투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청지기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되겠지만, 그러지 아니하고 주인의 소유를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인양 주인의 뜻은 아랑곳 않고 제 맘대로 처분하는 청지기라면 제대로 된 청지기라 할 수 없다.

우리 인생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재물이 되었건 권세가 되었건 아니면 지혜나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우리가 날 때부터 가지고 온 우리의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주어진 것이며 맡겨진 것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우리가 원튼 원치 않튼 때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갈 것들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잠시 머무르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맡았건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따라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들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게 집행했느냐에 그 성공여부가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하고, 우리가 하던 일은 다른 사람(그가 비록 우리 아들이라고 하더라도)이 맡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동안 청지기로서 살아온 삶의 여하에 따라 또 다른 것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맡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주인이 그보다 더 나은 자리로 그를 옮겨줄 리는 만무다. 이제 더이상 청지기 사무를 맡을 수 없는 것이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소유를 허비한 것으로 점철된 인생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청지기 사무를 셈하라는 메시지를 받는다면 우리는 어떨 것인가. 아직도 인생이 창창한 사십대에 간암으로 육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는다면 우리는 어떨 것인가. 본문의 청지기는 지금 이런 시한부 생명의 선언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아무리 열심히 청지기 사무를 보고자 해도 할 수 없고, 그때 좀 잘할 걸 하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배운 도둑질이 청지기 사무보는 일인데 그걸 빼앗기니 이젠 무얼 할 것인가. 그동안 살면서 배우고 익힌 것이 증권 투자해서 돈 버는 기술이요 아니면 부동산 투기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기술이었는데, 이제 증권도 없고 부동산도 없는 세상으로 가면 난 어떻게 사나. 재물이라는 것은 육신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나 힘을 발휘하는 것이지 숨 넘어간 사람에겐 도대체 무슨 힘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청지기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훑어본 것이다. 주인이 자신의 직분을 뺏는 것으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의 인간인 것이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정말 그렇다. 땅을 파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며, 빌어먹는 일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렸다는 말씀을 볼 수 있는데, 이럴 수 있는 나사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빌어먹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며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기술이다.

청지기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직시한 것이다. 그동안은 주인이 자신에게 맡겨 주신 재물로 재미있게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이제 그만이라는 선언을 들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그 다음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육신적인 능력은 육신이 있을 때에나 힘을 발휘하는 것인데 그 육신이 사라진 마당에 그걸 그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천국이란 우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곳이 아니다. 서울대학교도 입학만 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듯이 천국도 그렇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소위 수학능력이 있어야 하고 천국에서는 그곳에서 살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수학능력은 없는 사람이 요사이 흔하디 흔한 부정입학으로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인가. 대학도 일정 수준의 학력을 전제하듯이 천국도 일정 수준의 능력을 전제한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불의의 재물을 맡기시는 것은 장차 참된 것을 맡기시고자 함이다. 불의의 재물조차 하나님 뜻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참된 것을 맡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세상은 불의의 재물이 발언하는 곳이고, 참된 것은 저 세상에서나 힘을 쓰는 것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이런 면에서 본문의 청지기는 이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이제 더이상 이 세상의 능력이 능력일 수 없는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사실 앞에 당황해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줄기 깨달음이 번개가 동에서 서로 번쩍임같이 그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무릇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구원 역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깨달음이 본문의 청지기처럼 절망의 절벽에 다다라서야 이루어지면 시간이 없어 급한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모든 게 자업자득인 것을. 늦었지만 그래도 가만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은 것. 그래도 아직은 나의 청지기 직분이 힘을 쓸 수 있는 시간 아닌가. 이 시간 동안 저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면, 그런 능력이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물론 그 친구에게 모든 것을 의탁할 수는 없을지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허비한 시간을 보충할 수야 있지 않겠는가. 당장 청지기 직분을 빼앗기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센데, 그때 저희가 나를 그냥 보고만 있기야 하겠는가.

그리고 이 청지기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부른 다음 우리의 생각으로는 전혀 얼토당토 않은 일을 벌인다. 즉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다. 지금 자신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일로 주인으로부터 소환당해 있는 판국인데, 설상가상으로 이젠 주인의 소유를아예 갖다 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지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주인이 청지기에게 그 소유를 맡기신 뜻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쉽게 이해될 부분은 아니고, 이 청지기도 그것이 주인의 뜻인 줄 알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겐 오십 말로 감해 주고, 밀 백 석 빚진 사람에겐 팔십 석으로 감해 주었다. 청지기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소유가 자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이 청지기는 이 시점에 와서야 비로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닌 주인의 것임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내 것이 아닌데 인심 쓰지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것 없이 빈손들고 와서 빈손들고 가는 것이 인생인 줄 알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일 뿐,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올 때는 빈손들고 왔더라도 갈 때는 바리바리 싸가지고 갈 것처럼 재물에 대한 미련이 많다. 그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나 본문의 청지기는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원래 자기 소유가 아닌 주인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는 재물임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이런 사람만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그 빚을 탕감해 줄 수 있으며, 또한 아직은 자기 권한 아래 있는 재물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사람만이, 그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의 탕감은 구제와는 다른 것이다. 구제는 남에게 자기 것을 베푸는 것이다. 빚을 탕감 받는 입장에서 보면야 값 없이 받는 은혜이지만, 그러나 청지기의 입장에서는 자기 것으로 베푸는 구제는 아니다. 자기 소유는, 비록 그것이 지금 자기 권한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구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물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에 내어 놓으면서도 이 청지기같은 칭찬을 듣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즉 그것을 구제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재물로는 구제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으로서 우리에겐 그 관리만 위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색낼 일 없다. 빚진 자가 고마와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이고, 청지기로서는 생색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인식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헌금이니 구제니 하는 말로 하나님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 일이다.

청지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헌금도 아니고 구제도 아니라 다만 그 재물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인식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그 재물을 맡기신 뜻은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맡기신 것이 아니고, 주인 곧 하나님께 빚진 자들의 빚을 감해 주라고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다는 말은 결국 그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인식 아래 자신이 그 재물에 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 재물은 하나님이 그에게 쓰라고 주신 것이다. 그것도 물론 혼자서 술 마시고 좋은 가구 사고 으리으리한 집 짓는 데 쓰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 집 문전에서, 자기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나사로같은 사람을 보거든 밥이라도 한 상 잘 차려주라고 맡기신 재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재물이 쓰라고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 통장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사람이다. 때가 되면 어차피 짊어지고 갈 수도 머리에 이고 갈 수도 없는 것인 줄 모르고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식이라는 인간들이 그 통장 서로 맡으려고 형제의 정도 저버리며 종국에는 서로의 가슴에 못질하는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본문의 청지기는 자기 곳간의 문을 열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것은 분명히 자신이 맡고 있는 재물이 축나는 일이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주인의 꾸지람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청지기는 이제 주인의 꾸지람 보다는 어떻게든 한사람이라도 자기 친구를 만들어 두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찰즈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우찌 영감이 자신의 죽음 이후를 보고 노랭이의 삶에서 베푸는 자의 삶으로 급변하는 것도 이런 경우라고 보면 된다. 재물이란 그가 쓴 만큼 주인에게 충성한 것이고, 가지고 가는 만큼 주인에 대한 불충이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주인에게 빚진 자란 누구를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 불의한 청지기는 어찌하여 하필이면 자신이 친구로 삼을 대상을 주인에게 빚진 자로 골랐는가. 주인에게 빚진 자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 주면 안되는가. 주인에게 빚진 자로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청지기 사무를 빼앗겼을 때, 과연 그들이 자기를 그들의 처소로 받아들일만한 여력이 있겠는가. 오히려 주인에게 빚질 정도는 아닌 사람들이라야 자신을 받아줄 집칸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 청지기는 이도저도 아닌 주인에게 빚진 자를 자기 친구로 삼고자 하는가. 이 주인에게 빚진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잘 거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위하여 열심히 수고한다. 본문에서 보는 청지기같은 사람은 자신의 청지기 사무를 한 대가로 봉급을 두둑이 받을 것이며, 그런 일거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이 있어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굶거나 얻어먹거나 할 것이다. 이 다음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일할 의욕과 일거리가 충분한 사람이라면, 그 문전에서 걸식으로 연명하는 나사로같은 사람은 일거리도 별로 없거니와 설혹 일거리가 있다고 해도 일할 의욕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런 일에 별로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모아봐야 어차피 자기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을 떠날 때면 모두 내놓고 가야 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허송할 세월이 어디 있겠는가. 즉 나사로같은 사람은 이 세상의 재물에 뜻이 없는 사람이다. 뜻이 없으니 길이 있을 리 없고, 길이 없으니 재물이 모일 리 없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는가. 얻어먹고 살거나 아니면 굶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주인에게 빚진 자이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도 육신에 있는 동안은 먹어야 사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먹는 것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것인가. 청지기처럼 주인에게 봉사했다든지 아니면 땅이라도 팠다든지 하는 삶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게 없다. 하지만 그들은 먹고 입고 산다. 그렇다면 그들의 먹거리 등은 누가 감당하는가. 이걸 감당하는 사람이 바로 주인으로부터 그 소유를 위탁받은 청지기이다. 마음씨 좋은 청지기라면 때로 거저 주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 이름을 장부책에 올려두는 것이다. 나사로 ─ 기름 백 말, 모년 모월 모일.

그렇다면 이런 인간은 이 세상에서 볼 때 백해무익한 인간이 아닌가. 그렇다.

나사로는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백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익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자기가 얻어먹고 있는 그 부자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처럼 그가 어느날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재물이 최고의 가치인 이 세상을벗어나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때, 그에게 친구가 되기 위하여 살아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일거리는 없어도, 저 세상에서의 일거리는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양식도 육신의 배를 채우는 양식이 아니라 영혼의 주림을 채우는 양식이며, 거처도 이곳 땅의 장막이 아니라 저 하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인 것이다. 이들이 주인에게 빚진 자가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육신으로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 영혼으로는 저 세상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찌든 눈으로 이런 사람을 보면 하등 볼품없는 인간일 뿐이요, 그저 이 세상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가로채는 기생충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그런 평가야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세상 사람의 이목을 두려워해서야 어떻게 얻어먹겠는가.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먹지 않는다고 단정할 사람이 있는가. 어쨌든 본문의 청지기는 자신이 친구로 삼을 대상을 이 주인에게 빚진 자로 결정했다. 이 세상을 빚진 자로 살지 않고서는 청지기가 그 사무를 그만둘 때 그를 영접할 집을 마련할 수 없음을 본 것이다. 그는 이들이 주인에게 빚을 진 것이 그들의 게으름 때문도 아니고 지나치게 소비를 많이 한 때문도 아니라, 다만 그들이 육신보다는 영혼에, 땅보다는 하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임을 본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2/2)이호식 번호 사용자ID 이름 시간 조회 줄수 1363 지금나는 김창호 1998-09-25 88 38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하는 것은 청지기의 바로 이러한 깨달음(지혜)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주인의 소유를 위탁받은 청지기라는 자각이 있었으며, 따라서 그 재물이 언제까지나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 세상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며, 나타난 세계가 사라지면 감추어진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이 허송한 세월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충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즉시 삶으로 옮겼다. 관념의 깨달음은 언제나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삶이 되는 깨달음만이 진정한 깨달음인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가진 청지기를 주인이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또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본문에 이르러 비로소 불의한(옳지 않은)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처음에 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고 하였으므로 이 점을 일러 불의한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고, 또 하나는 9절에 나오는 것처럼 이 청지기가 불의의 재물을 맡았다는 면에서 불의한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능성은 별개가 아니고 서로 유기적인 것이라고 봐야 한다.

불의의 재물이라는 말은 공직자가 기업으로부터 뇌물로 받은 재물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재물이라고 생긴 것은 모조리 그 속성이 불의라는 뜻인데, 그 이유는 이렇다.

의라는 말의 개념은 상대방과의 정상적인 관계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인간적인 의라고 하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구성원 상호간의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말이고, 따라서 어떤 기업가가 공직자에게 자기 사업을 잘 봐달라고 돈봉투를 건넸다면 그것은 불의한 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란 이런 인간적인 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그동안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말이고 따라서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반대로 우리가 불의하다든지 아니면 죄를 범했다든지 하는 말은 우리가 세상적인어떤 윤리나 도덕, 율법 등을 어겼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삶의 지향이 하나님 아닌 세상이라는 말이다.

즉 우리의 삶이 나타난 세상을 지향하는 동안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이 아니며, 이런 상태를 일러 불의라고 하는데(15장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아버지를 등지고 먼 나라로 도망가는 그 상태가 곧 불의다), 재물이라는 것은 나타난 세계를 지배하는 권세이기 때문에 그 속성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지배하려고, 나타난 세계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재물의 속성이기 때문에 은밀한(감추어진) 곳(마6:6)에 계시며 영으로(요4:24)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거꾸로 갈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런 상태를 일러 불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속여서 재물을 취했느냐 아니냐는 인간적인 의의 문제는 될지언정 성경적인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무리 정상적인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 세상의 권세인 물질인 이상 그것은 불의한 것이며, 이런 사람이 곧 불의한 청지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비록 그 소유권이 사탄에게 넘어간 것(눅4:6)이긴 하지만 이 세상의 천지와 만물은 엄연히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을 맡은 사람도 하나님의 청지기임에는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그 하나님의 소유를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인데(물론 그래봤자 이 세대의 아들이지만),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쓴다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공중 나는 새를 봐라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치고 정말 공중 나는 새와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재물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먹을 양식 외에도 재물을 잔뜩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집행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소유를 허비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가. 자기가 그 재물을 움켜쥐고 있으므로 해서 그 재물로 인해 배를 불릴 수 있는 수 많은 사람이 허기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 재물을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둔 것이 하나님의 소유를 허비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짐작할 것이다. 재물에 대한 청지기들의 독점만 없어도 세상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비근한 예로 대한민국 정부의 양특적자만 가지고도 전국의 결식 아동 점심은 물론이고 전국의 소년소녀 가장이나 고아원 등을 모두 감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양특적자의 주범이 그 양곡의 저장과 관리 비용이라니 참으로 요절복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어찌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행위가 아닐소냐. 재물은 이처럼 그 자신의 속성이 하나님의 삶과는 반대 방향인 불의로서, 그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들이 제아무리 성실하게 관리한다고 하더라도 허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얘기한 재물과 허비의 유기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청지기가 주인의 뜻에 얼마만큼 접근했느냐는 둘째 문제이고 불의한 청지기로서 인생의 문제를 이만큼이나마 볼 수 있었다는 건 칭찬하기에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가 불의했다는 점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재물을 맡아 관리하면서 불의하지 않았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것이다. 떡을 만지는데 어찌 떡고물이 묻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인생을 책망하는 것은 떡고물을 많이 남겨먹었다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남의 것이 될 떡고물에 한눈 파느라고 진정한 자신의 것을 놓쳐버렸다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의 불의는 당신의 칭찬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지 못한다. 문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의하면서도 인간적인 기준에서는 괜찮은 편이라고 자위하고 앉아 있는 인간들이다. 이 점을 분명히 보지 아니하면 자신도 여전히 율법을 어기면서 다른 사람이 율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불상사가 빚어진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들의 율법적인 의나 불의가 아니다.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한 그는 자신이 아직도 율법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줄 알면 된다.

인생은 율법의 세계만이 아니고 나타난 세계만이 아니란 사실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면 본문의 청지기처럼 더이상 나타난 세계나 이 세상의 재물에 연연하지 않으며 집착하지도 않는다.

여기까지가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그것도 제자들에게. 하지만 본문의 불의한 청지기를 제자와 바로 대입하기에는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터인데도 바리새인이 아닌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의도는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본문의 비유는 바리새인에게도 적절하지 않을 것같은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내놓고 이 세상 재물을 탐하지는 않으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예수를 따라나선 그의 제자들임에랴. 그렇다면 이런 비유는 이 세상의 쾌락에 안주하며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부류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아직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는 세상적인 인간들에게나 어울릴 것같은 말씀을, 누가복음 14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미와, 15장의 의롭다 하심의 과정을 통과한 제자들에게 하시는 의도는 무엇인가. 이 불의한 청지기와 예수의 제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8절의 후반부는 이 비유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예수의 주석과 같은 말씀이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결코 이 세대의 아들들일수 없고(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고 이 세대가 아니다), 빛의 아들들이어야 하는데 문제는 이 세대의 아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데 있다. 말을 뒤집으면 빛의 아들들이, 비록 그 때가 이 세대의 아들들의 시대이긴 하지만, 이 세대의 아들들보다도 더 어리석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즉 이 세대의 아들(불의한 청지기)조차도 나타난 세계와 감추어진 세계에 대한 저렇듯 반짝이는 깨달음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깨달음을 관념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즉각적인 삶으로 옮기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당신의 제자라는 사람들 머리 속에는 여전히 나타난 세계의 가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주인에게 빚진 자로 살아야 할 제자들이 불의한 청지기가 맡아서 누리는 재물에도 마음이 가 있는 모습에 대한 경계와 책망이 본문이다.

종교인들, 특히 예수의 제자연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의 재물같은 것은 초월한 지 오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 재물을 소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지 절대 다른 뜻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 생활의 문제는 재물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그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의 절차적인 정당성 즉 율법적인 윤리도덕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의 문제의식은 재물 그 자체에 있지 그 재물을 정당한 방법으로 취했느냐 부정한 방법으로 취했느냐, 아니면 비록 개같이 벌었더라도 정승같이 쓰고 있느냐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근간은 재물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것을 모으고 쓰는 데 있어서의 율법적인 의로움으로 형성되어 있으니, 본문처럼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예수의 비유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앙 생활의 과정은 율법적인 의를 청산하는 것이 먼저요, 나타난 세계의 육신적인 생활을 벗어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성경은 흔히 하나님을 일컬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묘사하는데, 이삭의 하나님이 상징하는 바가 율법적인 의와 상관없는 약속과 은혜의 하나님이라면, 야곱의 하나님은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버린 에서에 대한경계로, 나타난 세계의 육신적인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신자들 개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역사이기도 하고 신앙의 성숙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찌어찌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이삭의 단계에서는 이스마엘로 넘어가고 말았다. 즉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르짖으면서도 삶으로는 여전히 자기 육신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겠다고, 안식일을 지키며, 십일조를 드리며, 구제를 베풀며, 충성과 봉사같은 일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가 누가복음 15장을 통하여 살펴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같은 신앙이다.

그러나 이삭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자녀라고 하더라도(이 경우가 빛의 아들들이다), 이미 모태에서 에서와 야곱 두 씨로 갈라지는 것이다. 물론 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생의 삶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다. 그는 비록 야곱보다 훨씬 더 많은 세상의 복을 누렸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누가복음 16장에서 그의 제자들(빛의 자녀)에게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은,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버리고, 나타난 세상에 집착하여 스러져간 에서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당부인 셈이다. 즉 사라져가는 가치에 미련을 두지 말고 영원한 가치로 눈을 돌리라는 당부란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하여 얼마나 분명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 지난번 대선에서 낙방한 정주영씨의 지혜를 보라. 얼마나 확실하게 사라져가는 가치(국민당)를 버리는가. 그리고 얼마나 잽싸게 새로운 가치(새 정권)로 접근하는가. 예수의 제자들이 이 세대의 아들들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이런 지혜이다. 아니라고 생각하는가치에는 추호의 미련도 두지 않는 것. 버려야 하는 대상에는 피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느냐는 지적에도 그저 눈만 끔벅이고 앉아 있는 것.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무리 우리의 죄를 사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삶이 우리를 얼마든지 사망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누가복음 16장이며 바울 사도의 지적으로는 로마서 8장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13 발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경우가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하나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라고 부르는 대상이 다름아닌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며,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육신에 있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육신에게 질 수가 있으며, 육신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내용은 이것만 가지고도 많은 말을 해야 할 터이나 여기서는 결론만 얘기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즉 더이상 육신에 있지 아니한다는 말이 지니는 육신의 의미와 나중에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산다는 말이 지니는 육신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이다. 전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육신으로 얻지 않았다고 할 때의 육신 개념이며, 따라서 이 경우의 육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상반되는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생각을 의미하며, 이스마엘이라는 인물은 바로 사라와 아브라함의 이런 육신적인 생각이 빚어내는 작품이다. 그러나 후자의 육신은 에서가 한 그릇 식물로 그 배를 불린 바로 그 몸을 의미한다. 이래서 로마서 8장의 흐름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소망인 몸의 구속을 향하여 흐르는 것이다. 의의 문제는 로마서 8장 10절의 얘기처럼 영의 구속일 뿐이다. 물론 영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사람)은 몸의 구속으로 나아갈 수 없지만, 영의 구속 그 자체가 우리 몸의 구속까지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고난이 과연 무엇인가. 이게 바로 누가복음 16장의 나사로같은 고난이며 이 세상을 주인에게 빚진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난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가 생각하는 고난은 이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기 위한 고난이며, 나아가 세상의 불의를 질타하다 얻는 고난이다. 더구나 이런 삶을 일러 성화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을 옛 죄로부터 깨끗이 씻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으로,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구덩이에 눕는 것이며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더이상 의로워지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고백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피조물 앞에 열리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며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느냐고 단언한 바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가는 길이 예수의 제자의 길이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이, 보이고 나타난 세계,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서야 어떻게 예수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예수의 길을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를 단호히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 식구가 원수며, 그래서 예수의 떡을 먹는 자가 예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 대통령에 출마한 사람을 잘 골라서 정치 자금을 갖다 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말인가. 그러면 이 다음에 그가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 구경이라도 시켜준다는 말인가. 불의한 청지기의 예에서도 그가 자신이 맡은 재물로 주인에게 빚진 자를 도와준 것같이 우리도 천국에 갈만한 사람 하나 잘 도와주기만 하면 그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임금의 자리를 둘째 동생인 세종에게 빼앗기고 일생 전국을 돌며 풍류로 세월을 보낸 양녕대군에게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했더란다.

대군은 아무 걱정이 없으시겠소이다. 살아 생전의 금상도 동생분(세종)이시고 또 이승을 하직하면 그곳의 실권을 쥐고 있는 부처님이 또 동생분(효령대군)이시니 과연 무슨 걱정이 있으시겠소이까 과연 그럴까. 효령대군이 스님이 되었다고 그의 형을 구원할 수 있겠으며, 또한 충녕대군이 임금이 되었다고 그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까. 이처럼 형과 동생의 관계도 서로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을진대, 하물며 불의의 재물 몇푼 베풀었다고 그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과연 돈으로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가당키나 한 발상인가. 그렇다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에게 있어 친구의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3-15) 그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대상이 곧 친구이며, 친구라면 서로 상대의 뜻을 어기지 않으며, 나아가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다. 때가 되자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이제 서로 더이상 종이 아니며 더이상 주가 아니라 오직 친구의 관계라는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을 그들에게 모두 일러주었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런 관계가 친구의 관계이다. 예수와 제자는 언제까지나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다. 때가 되면 서로 친구가 되어야만 정상적인 삶을 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주의 종들이 너무 양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백만 명의 주의 종보다는 한 명의 친구가 필요한 세상이다. 물론 오늘의 기독교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한 오해가 자리잡고 있는데, 어찌됐든 주의 종들만 있고 주의 친구가 없는 현실을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은 바울 사도일 것이다.

하여튼 서로가 친구로서 서로를 아는 일이 불의의 재물로 빚이나 좀 덜어주었다고 가능한 일이겠는가. 참다운 친구 관계는 동고동락의 삶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수가 제자들을 향하여 이제 더이상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고 하겠다는 시점은 당신의 십자가를 바로 코 앞에 두고 있을 때이다. 그동안 예수와 제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시간을 보내었던가. 예수의 말씀대로 아버지께 들은 지혜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던 세월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무리 가르쳐 놓아도 금세 딴 동네 가서 놀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예수는 얼마나 가슴 아팠으며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그러나 이제 예수는 마지막 그의 죽음으로 당신의 가르침의 막을 내리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떠나고 나면 알 것이다. 자기들이 얼마나 이 세상의 욕심에 눈이 멀었었나를. 이 세상의 욕심이란 것이 무엇이던가. 그게 바로 불의의 재물 아니던가. 제자들은 예수 곁에서 삼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지만 자기들이 그동안 추구했던 것은 예수가 아닌 불의의 재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의 뜻을 알 수 있었겠는가. 아는 것이 있다면 그저 불의의 재물이 지니는 뜻, 곧 재물이 지니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이 세상의 권세, 그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의 뜻이 좀 다른 시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처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돈 몇푼에 매수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돈 한푼 들이지 않더라도 친구가 될 수 있는데, 문제는 내가 그와 더불어 삶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다시 오더라도 먹고 살기 바쁘고 가족과 단란한 여가를 즐기기 바빠서 예수와 친구가 될 여유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불의의 재물로(ekj tou' mamwna' th'ajdikia.

이 말은 불의의 재물을 싸다가 예수에게 갖다 바치라는 얘기가 아니다. 영원한 처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불의의 재물로 무엇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오히려 우리의 삶이 불의의 재물로부터(ekj tou' mamwna' th'ajdikia 빠져나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의 시간을 불의의 재물을 모으고 축적하는 일로부터, 영원한 처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위한 삶으로 옮기라는 말이다. 어느날 예수를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구제하라는 얘기가 아니며 하나님께 헌금하라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 세상의 소유에 매인 삶으로부터 떠나라는 말이며, 그걸 떠난 다음에 영생의 길을 같이 갈 친구가 되자는 말이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의 행동은 무엇이었던가.

근심하며 돌아갔다. 어떻게 모든 소유를 버린단 말인가. 그러나 불의의 재물로부터(ekj tou' mamwna' th'ajdikia 벗어나는 삶이 없이는 영원한 처소는 없다. 우리의 마음이 재물에서 벗어나면 재물 역시 우리를 벗어난다. 이래서 친구를 사귀다보면 불의의 재물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주인의 소유를 주인의 뜻대로 집행하는 것이다. 재물은 우리가 아니어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절대 우리에게 연연하여 우리의 사랑을 구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재물을 벗어나지(ekj) 못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영원한 처소를 가진 사람과 친구가 되면 그의 처소는 더이상 친구의 처소만이 아니며 이젠 자기와 함께 쓰는 처소가 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처소 문제를 언급하면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처소를 함께 쓰는 사람이 되어야만 예수의 친구인 것이다.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0절에서 13절에 이르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두 주인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이다. 이제 그것들을 보기 쉽게 하나의 표로만들어 보자.

 하나님의 나라에서 바라볼 때 재물이라는 주인의 속성은 지극히 작은 것이며, 불의한 것이며, 남의 것이다. 나타난 세계는 감추어진 세계로 말미암은 것인데 나타난 세계는 항상 감추어진 세계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작은 것이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와의 정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들기 위해서는 물질계가 아니어야 하는데 재물은 육신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의한 것이며, 그리고 재물이란 것은 필경 우리가 지고 가지도 이고 가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남의 것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재물을 쓰는 사람들은 이것이 영원히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고 우리 뒤에도 오고오는 세대가 함께 쓸 남의 것이라는 생각이 투철해야 한다. 재물이 이처럼 영원히 남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훼손에 대한 생각도 남다를 수밖에 없고, 뒤에 오는 사람을 생각해서 자기가 썼던 자리를 한번쯤 되돌아보고 깨끗이 청소할 줄도 안다.

그러나 그것보다 좋은 것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인생은 자연을 잠시 전세내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주인에게 세금 한푼 내지 않고 말이다.

그러면 또다른 주인인 하나님의 속성은 어떤 것인가. 나타난 세계와는 비할 바 없이 무궁무진한 세계라는 점에서 큰 것이며, 보이는 이 세계는 때에 따라 변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사라지지만(이런 면에서 불의라는 말도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언제나 변함 없는,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은 세계라는 면에서 항상 참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안에 하나님만 사셔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요17:21-23)는 면에서 하나님은 영원한 우리의 것인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재물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에게 필적할 만한 어떤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예수가 비록 두 주인이라는 말씀을 하긴 했지만, 이 말은 재물을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으로 보기 때문은 아니다. 재물 그 자체는 절대로 하나님께 저항하지 않는다. 나타난 세계는 감추어진 세계의 원리로 운행될 뿐,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며 독자적으로 주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는 왜 재물이라는 존재를 마치 독립된 주체인 양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재물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재물에게 권세를 부여함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재물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지 않는다. 경영학에서도 단기 최적(短期 最適)은 장기 최적(長期 最適)을 거스르는 경우가 많듯이, 나타난 세계에 집착하는 눈으로는 감추어진 세계를 준비할 수 없다. 만일 노아가 당장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인간이었다면 어떻게 방주를 지을 수 있었겠으며, 어떻게 그로 인해 생명의 씨를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다는 말의 의미만 살펴보고 이 글을 맺기로 하자. 본문 11절은 우리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 참된 것이 맡겨진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것인가. 장사할 때 저울 추를 속이지 않으며, 공직자로서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인가.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 왔다면 이제 그런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 말씀을 여는 열쇠는 충성한다는 단어가 쥐고 있다.

율법적인 사람은 아무리 은혜의 말씀을 읽어도 그것을 율법으로 바꾸어 내는 기막힌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 이 충성한다는 말을 번역한 사람 역시 율법적인 시각을 탈피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눈이 율법의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은 이런 번역을 만나면 그 원어를 모르더라도 대번에 그런 것은 예수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예수가 어떻게 지금 이 시점의 제자를 앞에 놓고 충성을 운운한단 말인가. 그 제자들의 주소가 어딘데 그들에게 충성하라고 했으랴. 그리고 그것이 정말 충성이라면 도대체 그 충성의 대상이 불의한 재물일 수 있는가. 하다못해 불의한 재물로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말이라면 몰라도. 그래서 시중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강해서는이 부분을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쪽으로 얘기를 전개하고 있다. 즉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이다. 정말 요절복통할 일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본문의 충성되다는 말의 원어는 신실하다는 뜻의 피스토스(pistov이다.

물론 충성된 사람은 이미 신실한 사람이겠지만 그러나 충성과 신실은 엄연히 그 개념이 다른 단어이다. 서로 바꿔 쓸 수 없는 단어란 말이다. 충성이라는 말에는 자기보다 더 높은 대상을 향한 받들어 모심의 의미가 강한 반면 신실이라는 단어는 자기 외부의 대상을 銖반응이라기 보다는 자기 내부의 삶을 일컫기 때문이다. 즉 신실이란 그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혹은 그 대상이 없더라도, 한 사람이 하나의 기준에 의하여 항구여일하게 유지하는 그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상태를 일러 신실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불의한 재물에 대하여 신실한 것인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 재물의 속성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남의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실한 자의 삶이겠는가. 이건 내가 얘기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남의 것은 남에게 돌리는 것. 즉 남의 것에는 눈독들이지 않는 것이 곧 신실한 사람의 자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남의 것을 자기 통장에 쌓아두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그 남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남의 것이 내 집에 들어와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도둑이 따로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지 않은 것이 그들의 창고에 쌓여 있다면 그는 그것들을 그만큼 도적질한 것이고, 그만남의 소유에 대하여 신실치 못한 삶을 산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돌아갈 참된 것마저 맡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불의하기도 하고 지극히 작기도 한 재물에 대해서도 신실치 못한 사람들에게 어찌 참되고 큰 것을 맡기겠는가. 남의 것도 자기 것처럼 움켜쥐고 놓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자기 생명을, 친구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 놓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의한 재물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욕심이 없는 분이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지극히 작기도 하고,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되지도 않는 그런 재물에 매달리지 말고, 진정한 우리의 것,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참된 것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 길이 예수의 제자의 길이다. 예수의 제자는 나타난 세계를 살아갈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앞에 모여있던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나타난 세계의 메시야로서 예수를 환호하고 있었으니 어찌 예수의 가슴이 아프지 않았으랴.

예수의 말씀은 이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것이 아닐진저. 어디로 눈을 돌리는가. 왜 불의한 재물에 매달려 참된 것을 놓치는가. 그처럼 근시안인가. 어찌 단 몇십년에 붙잡혀 영원히 사는 삶을 버리려 하는가. 세상의 기업가들에게 배우라. 그들이 단기적인 승부에 집착하는지 아니면 긴 안목으로 사업을 하는지. 과연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지 않는가. 비록 그것이 그들의 세대에 있어서이긴 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빛의 아들이라면 신앙이라는 것을 영원의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원에 비추어 과연 재물이라는 것이 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나타난 세계를 벗어나라. 그리하면 감추어진 세계가 열릴 것인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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