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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습 03:1-9, 눅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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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종교적인 문제에만 관심하였지 다른 문 제에는 관심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종교적인 문제란 인간의 내면적 문제, 영성적 문제, 또는 도덕적 문제를 의미하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민족이나 동포 따위에는 관심하지 않았고 만 인류를 위한 구세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인류를 관심하 고 구원하는 분이라고 말할 때에도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순수하 게 영적 구세주로만 여기는 경향은 아주 초기 기독교인들 간에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은 예수님을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은 추상적인 만인류가 아니라 구체적 인 유대 민족과 동족을 관심하셨고 또 그는 인간에 대하여도 인 간의 내면적, 영성적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았고 현실적인 문제에 도 관심하였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이 그의 동족인 유대민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역사적인, 성서 적인 증거의 한 예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렇게 한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 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 구나! 암닭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 는 응하지 않았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공동번역)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 왜 무슨 의미에서 등의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우선 예수님이 탄식하신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여러분들 이 성지순례라고 팔레스타인을 가 보면 유대나라는 오늘날 이스 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고 그 나라의 수도는 예루살렘 이 아니라 텔 아비브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예루살렘시 자체는 유대민족에게 보다도 아랍민족에게 더 중요하 게 관계가 있는 곳이 되어있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이란 곳은 더이상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 에는 그 옛날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은 허물어져 없어지고 그 터 위에 아랍인들의 성전, 마호며의 성전인 모스크가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상 예루살렘은 유대종교의 중심지요 성지였습니 다. 고대 유대민족과 유대나라와 유대종교를 대표하며 그 상징이 기도 했습니다. 유대민족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예루살렘하면 유 대민족을 연상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곳은 역사적으로 오랫동 안 유대 나라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민족의 지배세력이 자리잡고 살고 있으면서 민족 국가를 지배했습니다. 최고 입법기관과 사법기관을 겸한 산헤드 린이란 기관은 사실상 최고통치기구였는데 이것이 거기 있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라의 수도로 정치적 중심지로서 온갖 정치적 기관들, 관공서등 중요기관이 다 그곳에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권부의 심장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입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루살렘이 유대교의 종교적 성지 라는 사실입니다. 유대나라는 신정정치, 즉 신이 직접통치하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권력을 지배했고 그랬기 때문에 민족의 생활에서 종교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의 최고권위는 성전으로부터 나옵니 다.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기에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임은 물론입니다. 예루살렘은 민족 의 머리요 심장이며, 그들의 자랑이고 꽃이며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실제로 어떤 곳이었습니까 오 늘 구약성서 스바냐서의 본문은 고대 유대민족의 역사에서 예루 살렘의 실상이 무엇이었던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이 저주받을 도성아, 야훼께 반항이나 하는 더러운 도성아, 압제나 일삼는 도성아, 불러도 듣지 아니하고 징계를 해도 코웃 음만 치며 제 하느님 야훼를 멀리하고 의지하지도 않는 구나. 귀 하신 몸들은 성 안에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고 판사들은 벌판을 주름잡는 늑대처럼 뼈도 안 남기고 사람을 씹어 삼킨다. 예언자 들은 제 잘난멋에 사람들을 속이고 사제들은 성소를 더럽히며 법을 짓밟는다.(스바냐 3:1-4) 이 얼마나 신랄한 고발입니까 예언자가 묘사하는 예루살렘은 총체적인 부패와 타락의 도성, 죄악투성이의 도성, 그야말로 악 마의 도성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서 특히 민중에 대한 억압 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귀하신 몸들, 판사 들, 그리고 예언자들과 사제들이 민중억압자들임을 열거했습니 다. 귀하신 몸들이란 권력자들(정치인과 관리들)을 의미합니 다. 그러니까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통치자와 판사들,종교적 지 도자들인 예언자들과 사제들, 이들이 모두 통채로 부패하고 썩었 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것을 들어 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귀에 매우 익숙한 이야 기가 아닙니까 이러한 예루살렘의 죄악은 예수님이 오셔서 활동하셨던 시대 에도 여전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었습니 까 그가 보시기에는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살해하는 곳이었습 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고 예수님은 규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는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법이 지배하는 곳, 즉 선, 정의, 평등과 평화가 흘러나오는 발원지가 아니라 온갖 죄악이 흘러나오는 발 원지라고 보신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가 왜곡되고 온갖 불의와 부정이 가득찬 곳, 민중을 억압하는 온갖 악법과 악행이 비롯되 고 자행되는 곳, 그곳이 예루살렘이었다고 본 것입니다. 거룩하 여야 할 성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은 예수님에게 는 어떻게 보였습니까 도둑과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 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 난하셨습니다(누가 19:46). 성전이 강도와 도둑의 소굴이라니, 그 이상의 혹평이나 저주가 어디있겠습니까 이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 내 가 몇번이나 네 자녀들을 으려했던가!라고 한탄하신 것을 주목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이란 하필 그 도시나 거기 살고 있는 주민 만을 의미한다기 보다 유다민족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신 의미는 무엇입 니까 이 한탄은 유대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그의 심정과 그들에 대하여 품고계시던 진한 사랑의 발로라 할 수 있 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얼마나 농도깊게 사랑하셨는가는 그와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암탉과 병아리의 관계로 비유하고 암 탉이 그 병아리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그렇게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모으려 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한탄은 그가 유대민족의 현실과 운 명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무관심했다는 우리들의 추측을 근거없는 것으로 무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동족인 유대민족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한 단면을 보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두번째 윤봉견차 기록하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예루살렘의 불행을 예언하고 있는 이 말씀 에도 보면 첫번째 한탄에 못지 않게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애틋한 정이 절절히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만 큼 유대민족을 사랑했느냐 하면 앎탉이 그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그렇게 사랑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오 늘 읽은 공동번역에서는 그 날개 아래 모은다고 했으나 새 번 역에서는 날개 아래 품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말할 때 그가 기 동족인 유대민족을 앎탉이 그 새끼를 자신의 날개 아래, 그의 품 속에 품는 것 처럼 그렇게 사랑했다는 사실을 잊 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예루살렘은 어떻게 반 응했습니까 여기 보면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인들의 냉대와 배척, 그들의 완고함, 완 악함, 적대가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 치 어머니의 가슴을 밀치거나 젖꼭지를 깨물며 어머니에게 통증 을 일으키는 아기처럼 유대민족은 예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습니 다. 그의 구원의 날개 아래 들어가기를, 그의 평화의 품 속에 품 기기를 거부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통곡의 까닭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고 통곡하십니까 그들이 그 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큰 불행이 예루 살렘에 닥쳐오f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왜 불행이 예루살렘에 닥 쳐오게 되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유대교지도자들의 대답을 들어보는 것은 중요할 것 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말하고 있겠 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적어도 다음의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 오직 한가지 이유는 율법을 엄격히 문자적 으로 해석하는 데에만 사로잡혀있었을 뿐 평등을 실천하지 않았 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라바이 요하난(Johanan)의 말). 둘째로 사회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본 라바이도 있습니다.전 율f 훤 정의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하 느님은 십계명 직후에 정의에 관한 법규를 주셨다. 예루살렘사람 들은 그들이 정의를 무시하기 전에는 추방되지 않았었다.(라바 이 엘라자르(Elazar)의 말). 셋쩨 유대인들이 죄와 불의를 지적 하고 책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라바이 하니아(Hani a)의 말). 여기서 책망은 사회적 비평, 예언자들의 비평을 포함 합니다(참조:잠언 24:25, 9:8). 유대민족이 예수님의 사랑을 배 척했다는 말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 포하는 예수님을 배척한 것으로, 정의를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계 명을 거부하고 유대민족의 온갖 위선과 죄악을 규탄하신 것을 듣 고도 회개하고 고치기를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루f살렘 멸망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러 하느님으로부터 온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환영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또 그들은 메시야가 제 시한 구원받는 길, 평화의 길, 그것을 예수님이 설교하셨건만 그 들은 거기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설교하신 예수를 불신, 배척, 적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그들에 게 찾아온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돌로 쳐 죽인 것 처럼 마침내 메시야 예수도 거부하고 죄를 덮어씌워 살해하기 까지 할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에수님이 그렇게 애타게 사랑한 도성, 그 러나 그의 사랑을 배척하고 그를 적대하며 죽이려는 도성, 결과 적으로 하느님의 심판과 완전한 멸망을 자초하는 도성, 여기 에 수의 탄식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불행은 그 멸망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그 때로 부터 약 40년 후에 일어날 유 대-로마전쟁에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멸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아마도 이 역사적 사건을 미리 내다보시고 한 예언이라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하느님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된다는 비극적 운명을 예언하지만 그들은 이것도 듣지 않습니다. 너희 성전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이 죄악의 도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철회로 결과되고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랑하는 도성이 이렇게 불행을 자초 하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아픔을 경험하고 계신 것을 이 탄식에서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이 불행의 예언은 구약시대에 예언자 예레미아의 예언을 연상하게 하는 것 입니다. 하느님은 예레미아를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나의 백성을 버렸다. 내 것으로 삼았던 이 백성을 물리 쳤다. 내가 진정 귀여워하던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었 다.(예레 12:7); 이 궁궐을 내가 맹세코 돌무더기로 만들겠다...(예레 22:5).

오늘 예수님이 이 서울에 오신다면 그는 어떻게 보실까요 서 울의 종교, 서울의 정치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크게 불 행하게도 당시 주전 7세기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의 현실에 대한 예언자 스바냐의 규탄과 심판의 말이 하나도 에누리 없이 그대로 서울의 현실에 적용되는 말씀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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