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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니느웨로 가는 길 (욘 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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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8세기경 북쪽 이스라엘 나라의 선지자로서 유대 모든 선지자중 가장 먼저 된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들렸습니다. [너는 니느웨로 가 서 회개운동을 일으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명령을 거역하였 다가 크나큰 어려움을 당한 후 다시 발길을 돌려 니느웨로 가서 큰 구원의 빛을 비추이게 하였던 사실이 요나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책 속에 흐르고 있는 내용의 요약은 하나님의 선교 의지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과 요나, 그리고 니느웨성 세 가지 관점에 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니느웨로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 명령의 길입니다. 온 갖 죄악의 가득찬 도시, 니느웨의 가장 무서운 두가지 죄를 지적할 수 있습 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포악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나 또는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다 우상인 것입니다. 니느웨성 안에 우 상숭배가 가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불순종이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포악의 죄가 니느웨성에 가득하였습니다. 전 쟁 포로들은 잡아다가 혹독하게 다루었고,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습니 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람 대우하지 않는 것, 이것는 큰 죄악입니다.

 이같은 인간의 자만과 불신앙 그리고 인권유린의 포악과 만행이 하나님의 진노에 이른 이 도시를 향하여 하나님은 [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오 늘 우리를 향하여 오늘의 니니웨로 즉, [이 죄악된 세상으로 가서 회개운동 을 일으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니느웨로 가는 길은 불순종의 방해가 있는 어려운 길입니다. 불순 종은 하나님의 뜻과 맞서는 행위였습니다.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간 요나의 행동은 불순종이었습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하나님의 선교 의지에 반항하고 있는 심적 태도와 그 행동인 것입니 다. 하나님의 마음은 한 생명이라도 더 많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원 하십니다. 심지어는 니느웨성까지도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요나는 몰라주었다는 사실이 크게 지적되어야 할 요소인 것 입니다.

 인간 중심의 비판과 비난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길이 니느웨의 길목입니 다. 우리들의 심령이 불순종으로 막히는 니느웨의 길이 되면 안됩니다.

 셋째로, 니느웨로 가는 길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로 가게된 사건에는 먼저 그의 변화가 선행되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도중 에 파도가 일고 선체가 파선될 때 생과 사의 기로에 서게 될 때에 요나는 자기 자신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니느웨성이 구원받은 과정은 먼저 요나 의 변화가 일어난 후에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가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의 길이 하나님의 구원의 기롤 트이게 하였 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오늘의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 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신 이 말 씀은 오늘의 니느웨로 가라, 그리고 변화 시켜라,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먼 저 변화되라]고 하나님은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니느웨로 가는 길]. 이 길 위에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이 풍랑을 잠재우려면

성경 본문:욘 1:1-15

바다는 늘 잔잔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원을 알 수 없는 풍랑이 끊임없이 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바다에, 그 바다를 떠가는 항해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바다엔 가끔씩 예측할 수 없는, 재앙과 같은 심한 놀이 일어난 다는 것이빈다. 항해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생의 기반을 뿌리채 뽑 아 흔들어 버리는 위기를 조성하는 그런 재앙의 놀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이 시대가 이런 위기국면에 처해 있다고 한탄해 하고 있 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모습을 이미 연출해 내었던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요나서 1장의 장면입니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욘 1:4) 그래서 배안에 타고 있던 모든 이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게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바다의 뛰 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욘 1:15)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풍랑이 잔잔케 된 사건의 비밀을 통해 오늘 이 시대의 문제 의 성경적 해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배안에 있던 사람 들은 갖은 방법들을 동원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기울이였습 니다.

 1. 그들은 각각 자기의 신을 불러냈습니다 (욘 1:5).

 神 이란 '예배의 대상자' 를 가리킵니다. 사공들이 격랑이 휘몰아치는 바 다를 항해하면서 안전을 호소했던 숭배의 대상자들을 가리킵니다. '예배'란 '가치 있는 것을 섬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보다 힘이 세고, 능력있 는 것들입니다.그런데 이 신들의 특징은 인간 자신들이 만들어낸 자기 암시 의 수단들이었습니다. 인간 자신이 능력있는 것이라 믿었을 뿐이지, 바다나 태양등 그 어떤 숭배의 대상도 인간 구원의 능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큰 바위가 동구밖 팽나무 한그루가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인간 문제 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 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존파 사건이 터지자, 각종 신 문과 방송에서는 앞을 다투어 소위 전문가들을 내세워 이런 저런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회학자가 등장하고, 심리학자가 등 장하고 인간 심리 기재에 대해 설파하고 경찰청 사람이 나오고 흥분한 군중 이 사람이 나오고 흥분한 군중이 나오고 책임 있는 정치가나 행정관이 나와 서 이 문제를 영원히 척결하겠다고 선언해대지만 그런다고 이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불행한 사건이 다시 발생 할거라고 감히 예언() 해 대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들은 물건을 바다에 집어 던졌습니다.

 한번만 살려주시면 이 재물을 당신께 다 드리겠습니다. 애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효험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임시방편적 땜질이 한두번 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사건이 터지면 적당히 돈으로 해결해 버리려 는 인간 심리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 니다.

 사건이 터지면 일시적인 관심을 반짝 기울이는 미봉책은 안된다는 것입니 다. 이것은 깊은 인간의 죄성 그 본질에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돈으로도 힘으로도 안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3. 그들은 마지막으로 요나를 바다에 내 던졌습니다(욘 1:15).

 그러자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쳤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것이 빈다. 문제는 배 먀 밑바닥에 있던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요나로 상징되느 니 문제의 근원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인간의 깊은 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피하여 살려고 하는 죄된 인간의 속성입바니다.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결코 풍랑 이 잔잔해 질 수가 없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욘 1:3).

그렇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것입니다 (시 121편). 인 생 문제의 열쇠가 바로 그 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요나의 문제느 니 인간 차별에 있었습니다. '지존파' 아이들의 증오의 화신이 된 이유를 들면서 그중 하나로 인간 차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믿는 자였지만 사람을 차별하는 일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였던 것입니다 (욘 4:1).

 우리 한국 사회의 비극은 바로 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집어 던 져야 합니다. 이 사건의 본질적인 해결은 바로 '믿는 일에는 열심이나 더불 어 사는 일에는 소극적인 크리스챤'의 진정한 회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 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주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 1:12)." 아멘.

 내 탓이요 성경 본문:욘 1:1-17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제 친구 한분은 저에게 우리나라에 오니까 웬 현 수막과 구호들이 그렇게 많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과연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현수막이 없는데가 없고 또 구호들이 너무 많아 눈이 아플 정 도였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선진 외국에 비하여 아직도 우리는 구호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생활에 정착되지 못하여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밖 에 없겠습니다. 우리 생활속에 좋은 뜻이 정착되고 잘 실천된다면 구호나 현 수막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금년 일년간 표어를 가지고 지내왔습니다. 또 큰 거리나 작은 골목에 헤아릴 수 없는 구호들이 너무 많 습니다. 그 중에는 비방이나 비난성 구호들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호를 하나 택하여 보라고 한다면 천주교회에서 채택한 '내 탓이요'라는 구호를 택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것마저도 최근 자동차에 스티카로 붙이고 다니는 것을 오히려 비난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 는 피차 '내 탓이요'라고 하는 자성과 자책의 구호는 많을수록 좋겠다고 생 각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다 내 탓입니다. 우리는 지금 1990년을 마 지막으로 보내는 시간의 종점에 이르렀습니다. 돌이켜 한 해를 생각해 보면 모든 문제들은 내 마음, 내 생각, 내 양심의 문제들이지 타인이나 주변 환경 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 보면 요나는 선지자이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 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도망한 일은 없 었습니까 책임을 회피하고 사명을 저버리고 명령을 거역하며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았나요 우리가 사는동안 자기의 사명을 망각 하는 일처럼 큰 과오는 없는 것입니다. 요나는 지금 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로 내려갔다 '(욘 1:3). 니느웨로 가야할 요나가 정반대 방향인 다시 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과 그 뜻을 거역하는 길에 순탄함이 있을 수 없습 니다. 요나는 요행이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으나 그 배는 곧 태풍을 만나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하셨다'고 성서 는 말씀합니다. 사공은 두려워 하였고 사람들은 각각 자기 신들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모두 바다에 던지고 배 안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배를 타고가는 이 공동운명체가 뜻하지 아니한 폭풍으 로 인하여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누구 탓이었을까 요 자연적인 현상으로 바다에 이는 풍랑을 누구의 탓이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연의 재난일 뿐이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셨다' 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요나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연의 재난도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재난을 그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바람과 바다도 손으로 다스리시 는 그 하나님은 대풍도 바다위에 내리십니다. 그래서 인생을 교육하시고 훈 계하시며 깨닫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연의 재난에 대해서도 결국 내 탓이라고 깨닫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금년 한 해도 수없이 일어난 끔찍한 재난, 홍수와 가뭄, 무서운 화재, 사고와 질병, 공해와 오염으로 인한 자연과 생태계의 이변등 그런 일들을 우리는 누 구 탓이라고 해야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각자의 '내 탓'입니다. 그것 모두 가 내 탓이라고 말하고 깨닫는 자들이 되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사실 이 배가 파선하게 된 원인이야 말로 바로 요나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배 밑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욘 1:5). 그는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 직전에 있는 것조차 모르고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내 탓인 줄 모르면 그런 것 입니다. 이 때에 선장은 요나를 보고 '자는 자여 어쩜이뇨 일어나 네 하나님 께 구하라'(욘 1:6)고 책망하여 그를 일깨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잠 자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요 우리는 깨어 일어나 그것이 내 탓인 줄 알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 주기를 탄식하면서 기다 린다고 했습니다. 자연과 재난은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책임이 다 사람에게 있습니다. 요나가 타고 간 배가 대풍을 만나 깨어지게 된 것은 자 연적인 것이 아니라 요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회개하여야 합 니다. 그것은 바로 내 탓입니다. 그런데 내 탓으로 오는 피해는 바다와 배에 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위험하게 만듭니 다. 그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하나의 잘못으로 다른 사람 이 해를 당하며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한 단체와 한 나라가 수난을 당한 다는 일,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일 내 자 녀나 내 가족이나 내 이웃이 잘못되고 있다면 그것이 누구의 탓입니까 깊 이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내 탓입니다. 내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모세는 반역과 불신앙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하나님 이것이 내 탓입니까, 제가 이 많은 사람을 다 낳았단 말입니 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또 그렇 게 말하면 안되는 것은, 그는 그 민족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란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자인 것 같이 한 다'(히 13:17)고 했습니다. 그것이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비록 개인적으로 는 자기에게 아무런 흠이 없다고 해도 남의 죄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남을 위해 가슴을 치며 자신이 회개하는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 도들은 모두 세상의 지도자요 선생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어두움속 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산위에 세운 성과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역할을 못하면 맛잃은 소금이 되어 사 람들이 짖밟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알게 뭐냐' '나하고 무슨 관계냐' 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쳔의 양심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나와 관계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내 탓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 다. 양심적인 성도라면 결국은 '다 내 탓이로구나' 하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 다.

우리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공연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도 겸손히 나 자신을 살펴보면 그것도 내 탓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했는데 '저들이 몰라서 그 렇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몰랐다는게 바로 '내 탓'입니다. 세상이 모두 남의 탓으로 돌려 원망하고 시비하고 싸우고 다투는 때, '그것은 제 탓 입니다' 선뜻 이렇게 나와 자기 책임을 통감하며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 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은 어두움의 불빛을 본 것과 같을 것입니다. '내 탓입 니다' 하는 것은 밝은 빛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해결하는 첩경입니다. 얼 음같이 찬 것을 녹이는 힘이 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각자가 모두 내 탓임을 고백한다면 공권력이나 전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서운 사회악도 봄눈 녹듯 다 녹아 버릴 것입니다.

여기 요나가 타고가던 배에서는 도대체 이러한 재앙이 누구때문에 임했 는지 알아보자 제비를 뽑았더니 그것이 바로 요나였습니다. 요나는 깜짝 놀 랐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전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었습니다. 선원 들은 요나를 심문했습니다. 도대체 너의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 느나라 사람이냐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 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라고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 을 피한 것을 그들에게 고하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 을 바로 믿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믿는 자인데 바로 믿지 못한 것, 그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그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죄요, 그것이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고 정직히 시인했습니 다. 그러니까 '요나의 탓'입니다. 그 때에 이 말을 들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두려워 했습니다. '무리가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 였느냐' 라고 하였다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합니까 성직자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합니까 성도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합니까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느냐 그것은 우리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세계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였다면, 차라리 교회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성직자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성도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좋았을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 게 행하였느냐' 이것은 선지자인 요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들은 꾸중이었습니다. 그런 책망을 선지자 요나가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찌 내 탓이라고 아니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개인적 으로는 훌륭하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사셨다고 하더라도 연대감 속에 얽힌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짊어진 그 책임을 모면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내 탓'이라고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과 고난을 바로 내 탓이라고 인식하고 회개하며 더욱 옳바르고 진실하고자 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 다고 믿습니다.

이제 이들이 타고 가는 배가 왜 파선의 위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도는 더욱 거세어지고 배는 곧 파선하게 되었는데 어 떻게 하면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선원들은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잠잠하겠느냐'(욘 1:11)라고 물었습니다. 여러 분! '내 탓이요'라고 말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탓인줄 알았다면 내가 책임을 지는데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빈말이요 구호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책임을 통감한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 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욘 1:12).

 라고 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달게 받겠다는 의연한 마음으로 결단했습니 다. 요나는 신앙양심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내 탓인 것을 심각하게 깨닫고 결심했습니다. 성서는,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 1:16).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제거되니 문제는 쉽게 풀렸습니다. 그 크 고 무서운 바다가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이 즉시 고요하고 잔잔해 졌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우리 자신이 당 하는 심적 고통이나 감정적인 갈등,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민들 그것이야 말로 누구의 탓입니까 그것은 자기 탓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자연 그대로입니다. 자연은 선도 악도 아닌 것입니다. 자연이 나를 나쁘게 하거나 좋게 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보는 시각과, 내 의식과, 내 생 각에 달린 것입니다. 자연이 언제 우리에게 뭐라고 하였습니까 모두 나 때 문에 그것이 좋은 때도 나쁜 때도 있게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회는 냉정합니다. 그리고 좋 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인간사회는 언제나 인간사회 그대로 입니다.

타인은 언제나 타인입니다. 그 사람은 항상 그 사람이지요. 그런데 나 자신 이 그것을 나 혼자 좋아도하고 미워도하고 칭찬도하고 욕설도 퍼붓고 희망 을 갖기도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남은 가만히 있는데 나 혼자 좋았다 싫었 다 속에서 요동하고 들끓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바로 내 탓입니다.

1990년이 지나고 해가 바뀝니다. 그러나 '해아래 새 것이 없나니 라고 한 바와같이 새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1991년도 똑같은 시간의 반복이 있 을 것입니다. 자연과 만물은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는 눈, 생 각하는 방법, 맞이하는 자세, 기대감과 믿음, 즉 내 자신의 결단에 의하여 좋 은 해도 되고 그렇지 못한 해도 될 것입니다. 결국 나한테 달린 문제입니다.

내 마음, 내 결심, 내 각오, 내 목표, 내 길 결국 나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우리가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났다면, 혹은 좌초했다면, 또는 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 원인을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의 탓인지 생각해 봅시다. 요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 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 ' 폭풍을 만난 것도 바로 내 탓이 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자세, 반성과 회개와 결단이 있을 때 구원의 길은 열 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변에서만 원인을 찾으려 하지말고 각자가 한 일에 서, 자기도 의식 못한 무의식적 동기 속에서, 그 깊은 밑바닥 저변에서 문제 를 찾는다면 이 세상은 곧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 면 세상은 혼미와 분열과 파괴와 겉잡을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치닫고 말 것 입니다.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안다 ' 이렇게 그 원 인을 분명히 알고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그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에 손길이 같이 하십니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3일을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책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도 구원을 받았습니 다. 배도 건지고 사람들도 살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 간 요나도 살았습니 다. 살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드 디어 니느웨성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제 아무리 반항하고 거역하고 도망한다고 해도 저들이 어디를 갑니까

우리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 늘에 올라 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 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로다(시 139:7-10)

라고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 님을 피하려고해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책임을 모 면해 보려고 해도 안될 것입니다. 혹시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전하 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힘, 무슨 세력이든 간에 결국 좌절 당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모든 뜻은 다 그 뜻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 는 길은 하나님께 돌아오며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의 목전에 서 숨쉬고 움직이고 일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열심으로 이루워 나아가 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탓'이라고 자기의 책임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내 탓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결단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 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새해에도 이러한 진실한 삶과 겸손한 결단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나의 하나님

성경 본문:욘 1:14-17

요나서는 선지자 요나의 일대기를 서술한 역사적인 책입니다. 요나서는 저 체 4장으로 되어 있으며, 1장은 하나님의 복음전파에 대한 명령과 인간 요 나의 불순종에 대해서,2장은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회개와 기도에 대해서, 3장은 복음전파와 니느웨 백성들에 대한 구원의 사역에 대해서, 4장은 하 나님의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강조하고잇는것을 보게 됩닐.이러한 요나서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두가지 중요한 교훈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사역데 대한 말씀입니다.

이 주권이라는 것은 주권자의 절대적인 의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을 말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고자 불순종의 길을 가 는 요나에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불순종의 요나를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니느웨로 보내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니느웨의 더운 날 씨 상황에서 고생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해 주셨으며, 벌레 를 준비하셨다가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함으로써 주권적인 사역의 면모가 자연계에도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스웨덴에는 밀레스 조각공원이 있습니다. 밀레스는 로뎅에게 영향을 받은 조각가로서 그의 작품 중에 "하나님의 손"이라는 위대한 대표작이 있습니다 높은 탑위에 큰 손이 조각되어 있고 그 손위에 사람 하나가 웃으면서 움직 이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이는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요나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 케 하려 하심이었더라"고 했습니다.4장 10,11절데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 가 아끼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주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명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요나서 4장 6절의 말씀은 요나 개인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요나서 4장10절,11절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민족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을 작정하셨다가도 심판을 유보하시면서까지 자기의 백성을 택하여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 님의 주권과 사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요나서 전체의 핵심사상은 세가 지입니다.

 1. 달아날 수는 있어도 숨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1장 3절에 보면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요나가 다시스로 달아나려고 욥바로 내려 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 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라고 합니다. 2 장 3절에서도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나 이다"라고 합니다. 다시스를 향하여 달아나는 요나에게 그 발걸음을 돌이키 게 하기 위하여 풍랑을 보내는 것을 보게됩니다.

 성경은 이 풍랑을 '재앙'이라고 합니다.니느웨 지방은 세계 제1의 큰 도시 로써 앗수르 나라의 수도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하나님 말슴을 들을 때에 전혀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의 원수국가였기 때문입니다.인간적 으로 생각하면 타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도피의 길로 들어섰던 것입니 다. 성경은 이러한 요나의 생활의 모습을 '불신앙의 행동'이라고 말하빈다.

요나는 선지자로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명의 길을 등 지고 지금 도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의 자리에서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환경도 좋고 돈도 있으면, 믿으면서 고달프게 살 필요가 있는가라고 해서 신앙의 자리에서 달 아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앙인이 세상을 향하여 달아날 때에 는 생활에 세가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내리막길에 도달하게됩니다.

1장 3절에 보면 "욥바로 내려갔더니"라고 합니다. 오늘 신앙의 자리에서 세상을 향하여 도망치듯 사는 사람들, 세상에 빠져사는 사람들은 그 신앙과 생활과 은혜와 사랑, 모든 것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전부 빼앗겼듯이 오늘도 마귀에게 신앙과 열심을 빼앗기고, 이단에게 내 믿음을 빼앗겨서 잘못된 교리와 잘못 된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세상을 향한 마음 때문입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딤나로 내려가서 이방여인과 관계를 맺었습바니다. 소래 골짜기로 내려가서 들릴라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나중에는 두눈을 뽑히우고 연맷돌에 묶여서 그것을 돌리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흉년을 만났을 때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내려가는 생활,신앙이 타락하는 생활은 불행과 고통과 슬픔과 비애와 탄식 이 따릅니다. 여러분, 믿음이 내려가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두번째는 잠자는 생활이 따라옵니다.

1장 5절에 보면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 라"고 했습니다. 다시스로 향하여 도망을 치던 요나에게 찾아온 것은 안일 주의의 잠이 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5절에 보면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합니다.

 요즈음 교인들은 편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르리 "육체의 연 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연습보다는 신령한 경건 생활, 기도와 말씀의 생활을 열심히 하면 마귀가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영적으로 피곤합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지금 다시스로 도망치는 요나에게 찾아온 것은 영적인 피곤입니다. 2장 7절에 보면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19장에도 보면 엘리야는 이세벧 의 군사에게 쫓기어 광야로 나가서 피곤에 쓰러졌습니다.

 심신이 피곤하고 고달픈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주님과 거리가 떨어 져 있기 때문입니다.주님과 밀접한 사람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독수리의 날개침과 같이 위로 향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언제나 힘차게 전진하는 것입 니다. 그러나 주님 곁을 떠나 세상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은 심신이 피 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도망칠 수는 있어도, 달아날 수는 있어도, 숨을 수는 없다는 원리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불신앙을 깨뜨리기 위하여 큰 풍랑을 주셨습니다. 오늘도 세상으로 나가서 죄악의 잠을 자는 사람들에 게 하나님은 질병의 풍랑, 실패의 풍랑,불행의 풍랑을 보내어 깨우십니다.

사람들은 그때 다시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달아날 수는 있어도 숨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2. 추락자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욥바에서 배 밑층으로, 배 밑층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불고기 뱃속 으로 내려 갔습니다. 내려가는 생활은 추락하는 생활을 합니다. 오늘도 신 자들 중에는 믿음이 떨어져 완전히 밑바닥까지 추락한 사람이 있습니다. 경 제문제, 건강문제, 행복문제든지 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면 하나님을 바 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만 바라볼때 생활에 변화가 생기기 됩니다.

 첫째는, 지난날의 잘못을 하나님께 회개하게 됩니다. 1장 10절에 보면 "자 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라고 말합니다. 12 절에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 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요나 가 말합니다.회개가 무엇입니까 나 때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 생활에 변화가 옵니다. 사업도 안되고 일이 자꾸 꼬이고 밑 바닥에 처해서 의지할 데가 없을 때 기도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잘되면 기 도를 열심히 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소마가을 두고,하나님을 붙잡으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게 됩니다.

 토마스 아캠퍼스는 '겸손과 용기의 덕이 없이는 아무도 기도할 수가 없 다'라고 했습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지면 겸손해집니다. 하나니을 바라보면 용기가 생깁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하게 됩니다.

 셋째는, 감사생활이 나오게 됩니다.

2장 1절에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9 절에 보면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감사를 드리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 각해보십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데 무 슨 감사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감 사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순종하게 됩니다.

3장 3절에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고 했습니다. 다시스로 도망하던 요나가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된것입니다.

여러분, 절박한 환경에 떨어져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추락해도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손을 뻗치사 추락한 사람을 들어 일으켜 온전케 하시고, 제 위치에 세워 주실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십니다.

 3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고 말합니 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다 잊어버리고 첫번째 기회와 말씀을 잃어버렸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난날 우리에게 물질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 고, 행복도 주셔서 주님의 뜻대로 봉사하며 살라고 기회를 주었지만, 그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악용하여, 완전히 좌절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역시 제2의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그 첫번째 좋은 기회 를 자기만을 위하여 재산을 악용하다가 첫번째 기회를 다 상실해버렸습니 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셔서 행복한 길을 걷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실수할 수는 있으나 실패하지는 않습니다.

실패치 않도록 하나님껨서 제2의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과거에 타락했어도 제2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축복을 하나님께 받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 세가지 핵심사상을 배웠습니다.

첫째, 달아날 수는 있어도 숨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추락한 사람은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셋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제2의 기회를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절망을 극복하라

성경 본문:욘 2:1-10

희망은 인간을 소생시키고 깊은 주름을 펴게 하지만 절망은 산사람도 죽음 으로 재촉하게 만듭니다. 본문에는 절망적인 환경을 멋지게 극복하는 극적 인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쓰시려 했으나 요나는 쓰임 받기를 원치않아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도망(1:3)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 낯을 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나 이 스라엘 땅만 떠나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교회문을 나서고 성도와의 모임이 끝나면 하나님은 낯을 피할 수 있 다고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 끝에도 계시고 바다끝에도 계시고 음부에도 계십니 다. (시139:8-9)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안도했지만 큰 풍랑을 만 났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곁길로 가는걸 바라보고만 계실 분이 아닙 니다. 결국에는 요나가 배에서 바다에 던져졌고 파도는 잔잔해졌으나 요나 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희망을 찾아 볼래 야 찾을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이 스올(지옥)이라고 표 현했습니다. (2:2) 인간이 왜 절망적인 상황을 맞습니까.그 이유는 인간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보다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헤쳐나갈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원자탄을 발명한 아인쉬타인도 그 지식으로 죽음의 절망 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케네디의 권력도, 양귀비의 미모도, 맥아더의 용맹 도 , 역도산의 완력도 이 절망만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극한 상황의 절망을 극복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안되었기에 절망을 이길 힘을 찾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절망의 관계

하나님께 절망적인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절망은 인간이 쓸 수 있는 단어일뿐 하나님과 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큰일인데도 어른에게는 아무일이 아 니듯이 우리에게는 태산같은 문제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아무거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다는 것은 생사가 달려있는 큰 일입니 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요나로 하여금 불순 종을 깨닫게 하는 기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나쁜일도 좋게 만드 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께 절망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세도 동족을 위 해 사람을 죽인자였고, 다윗은 남의 아내를 성범죄했고, 노아도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자식들에게 봉변을 당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고,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데려다가 보배처럼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폐품을 잘 활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 도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 시며 지혜가 있으시니 아주 보배처럼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훌륭한 목수가 좋지 않은 목재를 가지고도 멋진 가구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 다. 하나님 앞에서는 구제불능의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낙심하지도 절 망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배처럼 쓰십니 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들을 택하여 있는 자를 폐하신다(고전 1:27-29)고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 의 절망은 자신의 연약함에 낙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지 않은데 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망적인 환경은 없습니다.

요나는 태풍을 만나 집이 물에 잠겼다거나 바람에 쓰러졌다거나,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다거나, 병이 났다거나 그런 정도가 아니라 물고기 뱃속에 갇혀 사방이 온통 캄캄하여 죽음만 기다리는 환경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하 나님께서는 물고기를 잠수함으로 사용하셔서 요나가 일하기에 가장 편리한 위치의 바닷가에다 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구 원받았습니다. 인간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가능이요 인간의 무지가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닫게 합니다.

 절망을 통한 교훈 하나님은 두번째로 요나를 찾아오셨습니다. (3:1) 그러니까 첫번째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재확인 시키셨습니 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때 어디론가 도망가면 엄마는 어디고 따라가 서 잡아오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어디로 가던지 따라오셔서 간섭하십니 다. 그리고 사명을 반드시 이루고 마십니다. 실수했어도 깨닫게 하시고 위 로와 용기를 주시며 반드시 일을 이루고 마십니다. 그러므로 일찍 순종하여 쓰임 받길 바랍니다.

 절망을 극복한 자세 기도-여호와를 불러 아뢰었고, 부르짖었습니다.(2) 기도했다는 의미로 기도는 구조 요청입니다. 삼풍백화점 사고시에도 철근 더미에 묻힌 사람이 구조요청의 신호를 부내고 밖에서 받은 사람은 살아나 놀 수 있었듯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할 수 있으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 다. 기도는 신자의 특권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응답하겠고 (렘33:3) 구하라 주실 것이요 (마7:7)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 리라(시50:10)고 했습니다. 기도하라 하셨으니 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 다. 어린이도 환자도, 일하는 사람도, 노인도, 어느 계층 누구도 할 수 있 습니다. 만약에 돈이나 지식이나 권세, 명예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면 돈 없는 자,배우지 못한 자,권세가 없는자 보통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며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로 응답받고 해결받도록 하신 것 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요 특권입니다. 기도하면 풀리고 열리고 해결되 는데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감사-요나는 뒤늦게 나마 하나님이 살게 해주셔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깨닫고 믿음으로 감사했습니다. 지옥과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향한 믿음의 표현이요 확신입니다. 그 감사를 하 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서원-요나가 서원을 한 것은 적극적인 믿음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제까 지는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자기의 유 익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반드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적극적이고 분명한 약속입니다.

 결론

인간에게서의 절망은 실패자로 만들거나 무력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 요 극복을 위해 있는 것이요 그것을 통하여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했 던 것을 깨닫게 하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는 원래 사명대로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온 성 사람들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해 냈습니 다. 작은 요나를 크게 쓰신 하나님은 작은 여러 분을 크게 쓰시고 보배롭게 쓰실 것입니다. 능력자이시고 지혜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붙잡혀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인물로 쓰임받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

성경 본문:욘 2:1-10

요나는 주전 790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대로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활동상황은 요나서 이외에는 별로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요나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지마는 다른 민족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본 서의 특징입니다.

어느날 요나는 그당시 최대 강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 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곳으로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길이 멀기 대문입니다.

육로로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둘째 감정문제입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가였습니다.

셋째, 선민사상과 우월감 때문입니다.

요나를 포함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네만을 선택했다고 믿었습 니다. 그런에 앗수르 서울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요나의 신앙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 곳으로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원인이 요나 에게 있음을 발견한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던졌으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본서의 줄거리입니다.

 1.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유를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1:3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 여"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요나의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그 발상과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요나의 신관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139편에 나타난 시인 다윗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 며"라고 했고,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가서 거할찌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피하면 피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사람의 낯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이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1:4을 보면 "여호와께서 태풍을 바다위에 내리셨다"고 했고 1:17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라고 했 습니다.

왜 하나님이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던져 삼키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요나가 가는 길과 하려는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선지자로 부르신 이유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 다.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기피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기피자의 불안한 삶과 사명자의 떳떳한 삶을 비교해 볼 필요 가 있습니다.

요나의 기피행각은 그 목적지로 정했던 다시스에 가기도 전에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사히고 요구하시는 일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본 사건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 물고기 뱃속을 [스올]이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음부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음명령을 거역한 사람이 들어갈 곳은 스올이라는 것입 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을 [스올]로 표현한 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음부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은 스올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부의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 앗수르의 국법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배 를 탄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정법을 어기고 도피한 것도 아니었습니 다. 그러한 그가 스올의 고통 속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뭣니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라는 것이었 습니다.

요나는 그 명령을 거역한 것이빈다.요나로서는 그 명령을 거역할 만한 충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나라,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며 침략하려는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했던 요나는 스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요나서 2장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2. 요나의 기도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 고 했습니다.

기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지만 신령한 눈을 들어 성 전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사람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딸만 넷을 낳은 어떤 사람이 42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 귀한 아들이 라며 아들을 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날마다 귀인이 바라보는 재미로 산다 면 즐거워했습니다. 그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귀인이가 잘못한 일이 있어야 야단을 쳤습니다. 그날 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이런 저 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귀인이한테 물었습니다. "얘 구인이라 넌 엄마가 좋 으니 아빠가 더 좋으니"라고. 귀인이 대답은 당당하고 또렷했습니다. "난 엄마가 더 좋아. 아빤 싫어 보기도 싫단 말이야. 난 아빠하고 안 놀거야"낮 에 야단 맞은 후유증이 남은 셈입니다.

 그러나 귀인이 아빠가 그 순간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야단한번 맞 고 싫어졌다는 그 감정표현을 긍정적으로 보면 진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러나 자식만을 바라보는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를 가장 놀라게 했던 슬픈 사건은 유산 때문에 부모를 살해 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부모가 그 아들을 낳아서 키우는 동안 기대와 꿈의 컸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명한 교수나 의사 아니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나갈 한약사가 되어 준느 것이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휘두른 흉기에 부모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축제에 참석한 대학생이 마음이 허전해 어느 집에 들어가 이유가 없이 흉기를 휘두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파생성, 고질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수입 오렌지족들은 한달에 600만원에서 800만원을 용돈으로 쓴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중병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나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 시대와 병든 역사와 정치와 살마 들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2)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6절 끝을 보면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에서 건지셨다"고 했고, 7절을 보면 "내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해결의 방법을 올바로 찾았습니다. 내 영혼이 피곤할 때 내 생명을 구덩에서 건져 내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피곤할 때, 고통스러울 때, 괴롭고 답답할 때 무엇을, 누구를 생 각하십니까 파도가 철석거리는 동해안의 백사장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안개꽃 펼쳐진 들녘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를 도와 주리라고 기대하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십니까

요나의 고백은 다릅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그 이유를 9절 끝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 나이다"라는 요나의 고백인 것입니다.

친구란 가장 필요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며, 그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 고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친구들은 내가 꼭 필요할 때 내곁에 있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부부도, 자식도 타인인 셈입니다. 어린 자식과 아내를 남겨둔채 어느 날 남편 혼자 훌쩍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런가하면 자식이 노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노라"고, "나 의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고.

이 고백은 오늘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인생 삶이 피곤할 때 주님을 생각한다","나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 이 고백이 곧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서의 결론은 요나가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나의 오침을 듣고 니느웨에 살고 있던 왕과 대신들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옷을 찢고 무릎쓰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최근 잇달아 터지는 대형 사건들과 패륜을 지켜 보면서 니느웨의 회 갱누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6월 12일은 요나운동과 그리고 니느웨 운동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예수가 진실로 그 역사 속에 들어가고 가정 속에 들어가고 부모 속에 자식 속에 들어가면 패륜이나 죄악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교회 마당을 가득 매운체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 을 볼 때면 행복하고 가슴이 벅찹니다.

예수를 전합시다.

예수를 말합시다.

예수를 이야기 합시다.

병든 역사,무너진 도덕, 망가진 정신이 다시 살려면 예수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전도 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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