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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는 별난 아들이었다 (창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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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정부기관과 몇몇 사회단체에서 효자효부상을 시상했습니다. 늘 이와 관련된 기사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작년에는 70세 할머니가 102세 시어머니를 깍듯하게 받들어 모신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만 시어머니를 생각할 줄 아는 별난 며느리였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부부가 너무 가난하여 고깃국 한 번 못 끓여들이다가 어느 날 고깃국을 끓여서 어머니가 너무나 맛 있게 드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인즉 그 국에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넣은 것이 아니라 지렁이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어떠한 상이든 그 상을 받으려면 특출한 면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수상자는 별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효행의 본이 되는 사람을 골라서 대상을 수여하려고 할 때 후보로 거론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이삭, 유다, 요셉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뛰어난 효심을 나타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어디까지나 성경의 기록 범위 안에서 가리려고 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외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단연 이삭의 효행이 돋보입니다. 그는 별난 아들이었습니다.

 어버이주일이 되면 설교에 단골로 언급되는 구절이 에베소서 6장 1-3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건이 오늘 읽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보여주었던 태도에서 우리는 진정한 순종이 무엇인지, 진정한 효도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삭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모리아 산으로 함께 가자고 했을 때 이삭의 마음 한 구석에는 주저함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휴일이나 주말만 되면 경치 좋은 곳을 찾아서 놀러가거나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지만 옛날에는 요즘처럼 여행이 낭만적이고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적이 드물다 보니 곳곳에 무법지대가 많았고 들짐승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삭막한 콘크리트 바닥과 회색 담으로 특징지워지는 도시 환경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굳이 여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주저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에 따르려는 아버지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알고 그는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이삭이 원한 것은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함께 동행하며 늙으신 아버지의 신변을 보살펴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효도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효도는 부모의 신변을 보살펴 드리며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LG백화점이 최근 20-40대 고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어버이날 선물로 무엇을 준비하고자 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들은 현금을 가장 많이 꼽았고(21%), 이어 감사의 편지(16.6%), 건강식품(1

4.9%), 보약(10.5%), 의류(

7.9%) 등의 순으로 택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부모에게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즘 김 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문제로 전국이 시끄럽습니다. 비리에 대한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의 입지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김 대통령이 현철씨를 둘러싼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두어 차례 외국으로 나가 있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철씨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의 불순종이 부모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가 된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왕에게 하는 말이 이 세상의 부모 대부분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부모에게 선물을 드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평소에 순종함으로써 부모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모리아산은 아브라함 가족이 거주하던 브엘세바에서 동북쪽으로 7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당시에는 거기까지 3일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여행길에 이삭 외에 두 명의 종(사환)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은 6일간의 식량과 번제에 쓸 장작과 장막 등 기타 물품들을 가지고 가야 했고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했으므로 힘깨나 쓰는 건장한 청년들이었을 것입니다.

 3일째 되는 날에 모리아산이 아브라함 일행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두 종에게 머무르도록 지시하고 이삭에게 번제용 장작을 짊어지라고 시켰습니다. 지금까지는 나귀에게 실렸든지 종이 짊어졌든지 하여 이삭은 힘들이지 않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아들더러 짊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산 위까지는 아직도 한참 가야 하고 갈수록 경사가 져서 힘이 더 드는데도 말입니다. 보통 아들 같으면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이 있는데도 왜 힘든 일을 나에게 시켜요” 하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게 불평하며 말대꾸 하지 않고 아버지의 지시에 묵묵히 따랐습니다. 그는 이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자 했던 정말 별난 아들이었습니다.

 부모가 시키는 일이 귀찮거나 힘든다는 이유로 말대꾸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은 자식의 할 도리가 아닙니다.

 둘째, 이삭은 부당한 처사였지만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본문을 해석하는 데 가장 걸림이 되는 것이 5절에 언급되어 있는 “아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본문에서의 이삭의 행동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 그의 나이를 유추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22장의 앞과 뒤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21장은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 집을 나가 장성하여 아내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오늘날보다 훨씬 많았고, 이삭과 에서는 40세에 결혼했으며 야곱은 70세가 넘어서 결혼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이 결혼했을 때 그의 나이는 빨라야 30세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이스마엘과 열세 살 차이나므로 그때 이삭의 나이는 20세 정도되었을 것입니다.

 23장에는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이삭의 나이는 37세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이삭의 나이 20세와 37세 사이 어느 시점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유추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단서가 우리말 성경에서 “아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나알”입니다. 이것은 갈대상자에 놓여졌던 아기 모세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고(출2:6),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용사(a young man mighty of valour)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대상12:28). 같은 구절에서 “사환”으로 번역된 단어도 같은 단어입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 종(사환)들은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번제 장작을 지울 정도로 이삭이 건장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본문의 이삭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산으로 올라가면서 아버지가 번제를 드리려고 올라가는데 횃불과 장작은 준비해 가면서도 제일 중요한 번제할 양은 준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여서 질문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절)

아브라함은 짤막하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은 단을 쌓았고 번제용 장작을 그 위에 벌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결박하려고 했습니다. 비로소 이삭은 아버지가 무엇을 의도하시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는 장작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홀가분한 몸이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늙은 아버지를 충분히 밀칠 수 있었고 반항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싫어요” 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별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성경은 자녀 된 자들에게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주실 때 자식의 순종을 받을 수 있는 부모의 자격을 제시하시지 않았습니다. 자식에게 잘 해주는 부모로 자격을 제한시키시지 않았습니다. 믿는 부모에게만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합니다. 자식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합니다. 자식에게 폐만 끼치는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부모도 몰라본다는 말을 들을 때면 무척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보다 더 강력하게 부모를 귀하게 여기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과연 어디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이삭은 그 일 후에도 아버지에게 계속 순종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을 가로막은 여호와의 사자 음성을 들었음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개인에게 하신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은 당사자말고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몇 군데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사울에게 들렸던 주님의 음성도 그와 같이 동행하던 사람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행22:9)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행9:8)

이삭은 단지 아버지의 태도 변화로 죽음 직전에 구출되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후로도 이 사건은 그의 머리에서 쉽게 잊혀질 수 없었고 아버지가 자기에게 행한 일이 악몽처럼 떠오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난 날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간직하며 평생을 부모에게 한을 품고 반항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많은 구타를 당했거나 식구를 내버리고 가출한 어머니 때문에 고통을 당했거나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서 결코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모리아산의 사건은 아버지에 대한 이삭의 태도를 180도 바꾸어 놓기에 족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그 후에도 계속 아버지를 공경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신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종을 통하여 택한 여인을 맞이한 것으로 입증됩니다(24:66,67). 그가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신뢰하며 공경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말 별난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약삭 빠른 자녀들이 하는 행동을 배우지 말아야 합니다. 이삭처럼 별나게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에게 주신 약속이 에베소서 6장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이 약속이 이삭에게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십시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26:12-14)

이삭은 18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35:28,29). 그는 충분히 장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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