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선한 사마리아인 (눅 10:25-37)

첨부 1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사람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고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그 율법사의 두 손목에 차고 다니는 작은 성구 말씀 상자속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율법사는 다시 질문하기를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가 참 이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인생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 마당에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참이웃은 누구인가(눅10:29)
유대인들은 유난히 선택받은 자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민족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 대한 시각이 남달리 경시하는 풍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길가에서 산기가 있어 격통(격통)으로 신음하면서 도움을 청해 온다고 하더라도 개 같은 이방인 하나가 더 태어나는 것을 돕는 일이 그들의 신앙에 위배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부정한 물건을 바라보듯 빠른 걸음으로 피하고 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웃은 유대인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이 누구냐 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비유라기 보다 실제로 있었던 한 사건을 교훈으로 삼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여리고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이며, 사해에서 가까운 여리고는 해면보다 400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30Km거리에 낙차가 1,100미터가 됩니다. 마치 채석장같이 암석뿐인 광야에 터널처럼 좁게 나 있는 꾸불꾸불하며 급경사를 이룬 이 길에는 낮에도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서 여행하는 자들에게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오아시스가 있어 각종 과일과 농산물이 풍요롭고 요단강 동편에서는 팔레스타인으로 통하는 군사 경계의 중요한 관문이어서 이 길은 강도길로 악명 높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에서 한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죽도록 두들겨 맞아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 쓰러져 있었습니다.
잠시후, 이 길을 혼자서 지나가던 한 제사장이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리고 나서는 신음 소리를 뒤로하고 총총 걸음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또 잠시후, 한 레위인이 이 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반송장 같은 동포를 그대로 둔 채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개 취급받는 사마리아 장사꾼이 이 길을 지나 가다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냥 지나쳐 가지 않았습니다. 나귀에서 내려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씻고 응급처치를 한 뒤 나귀에 태워 하룻길을 걸어서 도착한 여리고 주막에 도착하여 여관 주인에게 치료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돈이 더들면 나중에 갚겠노라 하면서 돈을 주며 돌아 올 때까지 돌보아 주기를 부탁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평범한 장사군으로서 그 여관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 듯 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신용할 수 있는 사이 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갚겠다고 하여도 의심없이 믿어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보통 시장의 장사치입니다. 종교적 실천 의식이나, 윤리나 인도주의 같은 의무 의식에서 도운 것이 아닙니다. 민족 감정을 초월해서 사회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외치는 의식이 뚜렷한 바탕에서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한 인간의 자연스런 인정에서 였던 것 같습니다. 도움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적선한다는 타산도 없습니다. 손과 발과 몸으로 도왔습니다. 자기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고, 자기 약과 자기 나귀를 써서 한 불행한 이웃의 몸의 고통과 생명의 고통을 도왔습니다. 남의 고통에 동참해 주는 자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일을 선전할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그에게는 길에서 일어난 사소한 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너무도 인정이 메마르고 살벌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숙연한 교훈입니다.
기독교는 전도와 설교를 해야 되는 필요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종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하면 말 잘하고 말 많이 하는 사람들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어딘지 까다롭게 비판하고 성난 사자들처럼 무섭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기독교의 독점물인 양 말하나, 6.25 전쟁 고아들 수십만 명 가운데 미국 사람들이 양자 양녀 삼아 키우는 예는 있어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키우고 있는 수는 거의 없습니다. 참된 자비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은 '누가 이웃입니까' 라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비를 베푼 자 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고 하셨습니다.
말로 사랑을 외치고 구별된 자로서 자부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땅히 강도 만난 동포를 도와줄 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하여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갈6:9-10)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일에는 앞장서서 솔선하다가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선행은 하기를 꺼려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외식하는 자들이 오늘날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입니다.(마6:2) 하나님 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의식하는 자들이 현대판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은밀한 선행을 기뻐하십니다. (마6:4)에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2.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눅10:31)
주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강도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인간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도적질하고 강탈해 가는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온갖 마귀의 마음을 심어 놓고 사람들에게서 평강과 축복과 사랑을 빼앗아 가고 불안과 반목과 싸움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현상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원인자인 사단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엡6:12)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과 악한 영들과의 싸움"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기고 죽도록 두들겨 맞아 거반 빈사 상태에 빠져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죽어 버릴수 밖에 없는 사람은 누구 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단으로 부터 하나님께로 받은 온갖 좋은 생명과 축복들을 송두리채 빼앗기고 저주와 죽음으로 신음하고 있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3.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눅10:34-35)1)불쌍히 여기는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3)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일신상의 편의와 득실을 계산하는 이기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금 당장 도움을 주어야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 입니다. 바로 이같은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기본적인 마음가짐 이기도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야기 속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개취급하는 사마리아인에게 이 아름다운 참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라니칼 하게도 자신들이야말로 짐승같은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인간중 에서도 인간으로 자부하는 바로 그 유대 선민중에서도 선민인 그들에게는 개보다 못한 비인간적인 비열함과 매정함이 흘러 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2)상처를 치료해 주는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4)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의 신음하는 인생들의 상처를 찾아내어 소독하며 치료해 주는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며, 고통과 아픔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일이라면 바쁘게 가던 길도 멈추고 도와 주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강도 만난 처치에 있었다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 새생명의 길을 지금 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제2의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웃과 사회는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3)돈까지 지불해 주는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5)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물질까지 아낌없이 기꺼이 베풀고 투자할 수 있는 자가 참 사마리아인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결론>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