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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관점에서 본 달란트비유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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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생각할 점은 본문 ⑭절에 주어가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어떤 사람>이 주어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 주어는 꼭꼭 숨어 있습니다. 주어 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서술어를 찾아야 됩니다. 서술어는 <같으니> 입니다.

그러므로 주어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본문 ①절에 나와 있는 <그때에 천국 은> 하는 것이 주어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가 어떤 비유인지를 알 수 있습니 다. 본문은 종말에 관한 문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할까> 하는 것이 본문이 얘기하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20세기의 화란의 뛰어난 복음주의 신학자인 헤르만 리델보스는 이 비 유에 대해 말하기를 이 비유는 받은 은사를 잘 써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천국이 도래했을때 생의 결산을 요구 받을 것이라는 각성(覺醒)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 이제 본문을 따라 산책하면서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참의미 와 진리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⑮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면서 각각 맡겼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A. 첫번째로 그것은 <누구도 안 받은 사람은 없다> 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 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주인으로 부터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각각 받았습 니다. 안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받은 적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 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에게도 주인은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간혹 자기를 무능한 사람으로, 무익한 사람으로 평가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글도 모르는 무식한 할머니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는 너무도 기뻐서 수 많은 친구들을 예배당으로 전도했습니다. 교회의 목사님 이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글도 모르시는 분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분들을 전도하실 수 있었습니까> 할머니는 여러말씀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들은 내보다 더 무식함미데이!> 할머니 의 변(辯)은 당신께서 데리고 나온 분들은 당신보다 더 무식한 분들이라는 자 랑입니다. 망나니였던 술 주정꾼이 예수믿고 변화되어 수 많은 사람을 교회 로 이끌었습니다. 교회의 목사님이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기독교 진리를 설명하기 힘들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힘들어 전도라는 것은 무척 힘든 것인데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전도를 했습니까> 주정꾼 아저 씨가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제가 깨달은 복음을 잘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한테 가서 한마디 밖에 안합니다.> 목사님이 더욱 궁금해져서 물 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주정꾼 아저씨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야! 내봐라 !> 친구들한테 복잡하게 설명하긴 힘들고 자신의 변한 것을 보라고 한다는 말 입니다. 망나니요 술주정꾼이었던 자신의 변화를 보면 주님이 살아계심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천국에는 쓰레기통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쓸모가 있습니다. 각각 재능을 받았습니다.

 B. 두번째로 <누구도 받은 바를 적다고 할 수 없다> 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 습니다.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미니멈(최소 )이 한 달란트 입니다. 신약의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을 뜻합니다. 1 데나 리온은 일군의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돈 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 을 일으키실 때 제자들은 이 많은 무리들을 다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달란트란 6,000 데나리온이니 실로 엄청난 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더라도 3억원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습 니다. 한 달란트는 실로 엄청난 돈입니다. 누가 감히 적다고 얘기하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한 사람에게는 5백원을 한 사람에게는 2백원을 한 사람에게는 단돈 1백원을 주시면서 장사를 하라고 하셨다면 <주님! 장난치시 나이까> 할 사람들 많을 겝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 받은 것들은 그렇게 싸 구려가 아닙니다. 실로 엄청난 것을 각각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적다 3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감히 주님에게 나는 왜 이렇게 받은 게 하찮으냐고 따질 사람 누가 있습니까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교만한 사람도 문제이 지만 자기를 너무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도 주인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재능대로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길 때 재능대로 맡겼습니다. 재능대로라는 말 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맡겼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니 according to his ability(그의 능력에 따라)라고 적고 있 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누구도 공평하게 심판받는다>는 의미 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라는 의미입니다. 금번에 외 국어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단체로 자퇴서를 제출했습니다 . 내 자식은 똑똑하고 잘나서 우수한 학교에 다니는데 왜 내신을 절대평가 하 느냐는 것입니다. 상대평가를 해달라는 말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끼리만 모여 내신을 산출하니 상대적으로 일반학교나 농어촌학교의 학생들보다 불리 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가 남긴 결과의 양으로만 심판을 하신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불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많 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니 라> (눅12:48) 얼마를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능만큼 얼마나 노력 했느냐 충성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15억(5달 란트)을 남긴 자나 6억(2달란트)을 남긴 자나 주인의 칭찬이 똑 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의 재능대로 공평하게 맡기 셨습니다. 누구도 주인을 향해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뇌성마비 시 인인 한 자매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같게 하셨네>라고 노래했습니 다. 나는 아무리 해도 쟤만큼 할 수 없어 하고 미리 자포자기 하지 마십 시오. 여러분이 하는 작은 일이 주께는 더 소중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양으 로 평가하고 숫자로 평가하는 일은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

 주고

주고라는 말을 보아서 알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달란트는 원래 우리 것 이 아니고 누군가로 부터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주고>라는 뜻 은 소유권의 이전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맡김>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다시 오시기까지 잠시 주인의 것을 맡는 것입니다. ⑭절에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 으니>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원래 자기의 소유를 맡기셨습니다. 소 유권이 이전된 게 아닙니다. 아직도 명의는 주인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 이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의 모든 <소유>는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 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기의 <종>이라는 것도 <고용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노예>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소유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까지도 <내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합니다.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내 것인줄로 생각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합니다. 언제 한 번 주님께 묻고 행동한 적이 없 습니다. 내 삶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참지 못하고 쉽 게 화를 내어 버립니다. 화를 내는 건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봉사하고도 자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내가 행한 일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인의 모습이나 흔적이라고는 도 무지 찾아 보기가 힘이 듭니다. 내가 (주인은 보이지 않으니) 주인이라고 생 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주 인의 것을 맡은 종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신분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 <청지 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각각 재능대로 청지기의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주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의 삶을 삽니다. 모범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성경에 있습니다.

 <각각 은사(달란트,선물)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 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10-11 )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생명까지 주님의 것인줄을 깨달아 우리가 일생을 맘 가난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욕심이 우리를 얼마나 피곤하게 하고 죄짓게 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기도 광주군의 정부 쌀창고를 지키던 광주군청 양정계장 강모씨는 지난해 12월 18일날 쌀 2 40 포대를 빼내어 팔아먹은 것을 비롯하여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자그마 치 1300 여포대(싯가 1억여원)를 빼내어 시중에 팔아먹다가 덜미가 잡히어 구 속되었습니다. 국민의 것을 맡겨 놓았더니 자기 것인줄로 알고 맘대로 팔아먹 은 것입니다. 자기껀지 주인의 것인지를 모르는 종은 청지기가 아닙니다. <도 둑>입니다. 주인이 맡기신 <시간>역시 주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쾌락을 좇아 살고 자신의 안일을 위해 살며 주를 위해서는 시간에 인색한 사람들은 도둑 과 같습니다. 주인의 시간을 훔친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당신의 것을 우리에 게 주고(맡기고) 떠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인의 것임을 명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떠났더니

떠났다는 말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되돌아옴> 입니다. 떠난 주인은 반드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믿어지는 자는 정말 복이 있는 자입니 다. 그가 되돌아 온다는 것은 맡긴 것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 미합니다. 오! 이날이 반드시 우리에게도 옵니다. 그 주인의 심판대에서 웃 을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는 자입니다. 주인의 심판대에서 칭찬 받을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는 자입니다. 본문의 두 종은 주인이 다시 오실 날을 어쩌면 기 다리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맡겨진 일을 열심히 일하여 주인에게 자 랑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돌아봅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정말 기다려 지십니까 혹시 다시 오신다는 것조차 잊고 지내는 건 아니신지 요 교회사를 보면 시대가 악할수록 주님이 다시오신다는 사실이 기억되지 못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방종하여 자신의 배를 위하여 살았지요. 본문의 두 종 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왜 맡겼는지를 알았기에 즉시가서( 절) 장사를 하여 이(利)를 남겼고, 그 맡기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알았기에 남 긴 것을 헛되이 쓰지 않았고 모아 두었으며( 절) 주인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심판)을 알았기에 열심히 일했습니다.( 절) 그 결과 주인의 <되돌아옴>은 그들에게 무서운 것이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칭찬과 어 마어마한 복을 받게 됩니다. 주인은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그는 다섯 달란트( 15 억원)를 주고도 그것을 작은일( 절)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습 니다. 그리고 굉장한 부자였던 주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더욱더 많은 것으로 맡겨 주셨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 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절) 실로 이전의 영광은 우리가 최후에 누릴 이 영광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떠나셨고 반 드시 다시 돌아 오십니다. 그때 인류 모두(당신과 나) 에게 심판이 있을 것입 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 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16:27) 그때에 우리의 희비(喜悲)가 엇갈릴 것입 니다. 한 사람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한 사람의 눈에서는 슬픔의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본문의 악한 종은 이를 갈며 슬피 울었습니다.( 절) 여러분 은 어느 편에 설것입니까

왜 책망받았을까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왜 책망을 받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 역시 이러한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끄러운 모습을 경계(警戒)로 주의 심판 앞에 있는 우리의 삶을 각성(覺醒)하기 위한 것입니 다. 그가 책망받은 이유를 우리를 본문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밖에 없습니 다. 어떤 이는 <이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자기만 적게 줘서 화가 나서 일을 안했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만 그것은 본문이 얘기하는 바가 아닙니다.

본문은 그가 적게 받은 것에 대한 불만으로 일을 하지 않은 것이라는 어떤 근거도 제공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이유로 책망을 받았 을까요

본문  절- 절에 그와 주인과의 대화가 나와 있는데요  , 절은 그의 변명 이고  , 절은 주인의 책망에 관한 글입니다. 그의 변명이 무엇이든, 그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주인의 책망을 보면 우리는 그 종의 잘못을 알 수가 있습 니다.

 A.첫번째로 그의 잘못은 그가 게을렀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 종을 호칭하 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절)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게을렀 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뭐든 하면서 주인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가요톱 10>, <베스트 인기가요 50> 을 녹화할 시간은 있으면 서 예배가 길어지는 건 못참겠다는 것입니다. <비디오>도 빌려다 보고 일본만 화도 일주일에 몇권씩 독파하면서도 성경읽을 시간은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 는 것입니다. <경건서적>을 한 권씩 읽어오라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맘 잡고 다섯시간이면 읽을 책인데도 시간이 없어 못읽어 오겠다는 것입니다.

<노래방>, <락카페>에 갈 시간은 있어도 주께 찬양 드릴 시간은 없는 것입니 다. 저녁시간 텔레비젼 앞에 앉아서 이 채널 저 채널 돌리면서 시간을 허비하 면서도 우리의 가정에 <가정예배>가 끊긴 지는 또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러한 <게으름>은 도무지 주님 앞에서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악이라는 새로운 각성이 필요합니다. 주인의 시간을 자기 맘 대로 허비하면서도 주인을 위해서는 드릴 시간이 없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합니까 이 세대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일> (롬12:1 1) 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게으름으로 교회에 악을 끼치는 일을 합니다. 교회가 힘을 내어 무슨 일을 해보려고하면 꼭 그런 사람 이 훼방합니다.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 니라 망령된 폄론(貶論)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딤 전5:13) 금요 심야기도회에 평소에는 나오지도 않던 사람이 한 번 나오면 말 이 많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게으름은 인간 본성의 욕구이나 이것을 이기고 노래하는 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2:3) 주인의 칭찬이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B. 두번째로 그가 책망받은 이유는 주인의 일이려니 하고 생각을 한 것입니 다. 주인이 맡기신 일은 사실 원래 주인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먼 곳으로 떠나시면서 종들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인의 일을 종들을 통 해서 이루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악한 종은 주인의 일이 자기 같 이 미천한 <종>을 통하여 이루어 질지는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당신의 일 은 당신이 하겠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안해도 <교회일>, <주의 일> 은 굴러 간다는 것이지요. 정히 답답하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도 있는 데 나 같은 것이 무얼할까 하는 식입니다. 안수집사, 장로도 많은데 왜 내가 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절) 주인의 위대한 일이 자신이라는 연약한 도구를 써서 행해질 줄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지요. 그것이 그가 책망받은 이유입니다. 성령은 허공중에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주인의 위대한 일이 <한 연약한 인간의 순종> 이라는 작은 도구로 시작된다는 하늘나 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있는 자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순종과 열심을 통하 여 거두고 모으는 분이십니다.

 C. 세번째로 그가 책망받은 이유는 주인의 맡긴 이유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머지 인생의 목표가 <이利를 남겨야 하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볼 때 주인이 맡기신 이유가 <利를 남기는 것> 임을 잘 알 수 있습니 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이 칭찬 받았던 이유도 그가 남겼기 때문이며, 다 른 이유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절)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마찬가지 입니 다.( 절) 이로 볼 때 주인의 맡김의 이유는 <남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과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이 남길 수 있 었던 것은 그들이 주인이 그들에게 맡기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달란트를 줄 때 왜 주는 지를 얘기해 주 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다만 재능대로 그저 주 고 떠났습니다.(⑮절) 그런데도 칭찬 받은 두 종은 어찌된 일인지 바로가서 장사를 하여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 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 절) 둘 다 약속이나 한 듯이 똑 같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 절) 그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주인 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주인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생을 후회없이 그 일에(남기는 일) 바쳤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 인이 왜 달란트를 자기에게 맡겼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만약 그가 주인이 그에게 맡긴 이유가 이(利)를 남기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이자놀이 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본전과 그 이자를 받게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데도 그는 단지 주인이 주니까 받았지 왜 맡겼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 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주인 의 준엄한 심판은 그의 나머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몰라 인생을 망쳐 버린 한 죄인에게 떨어졌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슬픔은 주인을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주인을 바로 앎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진리 는 앎이 생명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지식知識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4:6) 예수님께서 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 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3) 우 리 인생의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면 <주를 아는 것> 입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성령이 스승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주인) 알게 하소서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찬송가 506 장)

주인을 몰랐던 악한 종은 자신의 의지를 따라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멋있게 살았지만 결국은 심판날에 책망받고 책망받을 뿐만아니라 바깥 어두운데로 내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인생 의 목표를 대학합격에 두는자, 인생의 목표를 성공에 두는자, 인생의 목표를 내집장만에 두는자 돈 버는데 두는자, 장사하는 데 두는자 이와 같을 것입니 다. 주 오시면 반드시 이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있 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날을 바라보는 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벧 이利를 남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여기까지 얘기하고 만다면 우리는 너무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좀 어려울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利를 남긴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살펴 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그래 우리가 利를 남기는 삶을 살자하고 은혜 받고 돌아간다면 무언가 중요한 것이 조금 빠 진 것입니다. 이를 남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이를 남기를 삶을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먼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비유는 서두에서 미리 말씀드렸듯이 종말에 관한 비유인데요, 종말에 이 악한 종이 구원을 얻 었을까요 못얻었을까요 여기  장에 나타난 세가지 비유의 상관관계를 봐서 는 그는 구원을 못얻은 듯 합니다.  장의 비유들은 영생에 들어갈자와 영벌 에 들어갈 자의 비유들입니다. 그것이 양과 염소, 슬기로운 다섯처녀 미련한 다섯처녀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달란트 비유도 이利를 남긴자 와 못남긴자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한 자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긴자로 대비되므로 영생에 들어갈 자와 영벌에 들어갈 자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 다. 자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구원을 못얻었습니까 본문에 의하면 이 利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利를 남기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위와 관련된 문제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다는 뜻일까요 의문은 더욱더 증폭되어 갑니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앞서 서 얘기한 모든 문제가 사실 많은 부분 의미가 퇴색되게 됩니다. 이 부분이 해결되야 흩어져 있던 구슬들이 한 줄에 꿰이듯 모든 부분들이 해석이 될 것 입니다. 그래서 <利를 남긴다는 것> 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굉장히 중 요한 일입니다. 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본문으로부터 입니다. 다행히도 본문에 는 이것과 관련하여 두가지의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A. 첫번째 힌트는 그것(利를 남기는 것)이 원래는 주인의 일이었다는 것입니 다. 자, 거기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 봅시다. 먼저 주인은 누구 일까요 주인 은 우리가 잘 아는 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병행되는 비유인 누가복음  장 의 <므나비유> 에서 주인은 왕위를 가지고 돌아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의 일, 즉 <예수의 일>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  절) 예수님의 <일> 이란 건 아버지의 <일> 과 관련이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결국 예수님의 일 이란 곧 아버지의 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아들을 보내어 계 속하셨고 아들은 주인이 되어 또 다시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결 국 <아버지의 일= 아들의 일= 우리에게 맡기신 일> 인 것입니다. 우리의 의문 은 한 가지 질문으로 모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일은 무엇인가요> 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일이 우리의 일입니다. 아버지의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성경의 핵심이자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모르고는 성경 이 도무지 풀리지 않습니다. 요컨데 아버지의 일이란 태초에 창조하셨던 <하 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택한 자의 영혼구원> 입니다. 인류의 역사란 아버지의 구속의 역사요, 당신의 나라회 복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아버지는 지금도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아버 지께서 쉬실 때도 있었나요 있었지요. 천지(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시고 그 분은 쉬셨습니다. 안식하셨지요. 그분이 지으신 당신의 나라는 하나님 보시기 에 심히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었고 그 모든 창조가 운데서 하나님은 왕으로 다스리시고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인간에게도 창조주 와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했으므로 이 땅위에서와 같은 결핍과 아픔, 죽음 같 은 것들이 없었습니다. 이 상태를 <샬롬> 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참평화이 지요. 이 곳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일하실 필요가 없었 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신 건 인간이 범죄한 이후입니다. 사탄의 조종으 로 죄가 들어오고 인간에게 사망이 도입되고 질병과 결핍속에서 신음하게 된 죄인들 사이에서 사탄이 왕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였던 곳에 사탄의 왕국이 건설된 것입니다. 안식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완전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인류의 죄를 속하 므로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하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것 이 아버지의 일입니다. 성경은 실로 그 구속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유도순 목 사님은 <구속사>를 못보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창조는 말씀으로 이루어졌지만 아버지의 이 일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방법으로 계획되고 진행되었습니 다. 이 일이 아버지의 일입니다. 이 일은 창조보다도 더 큰 일입니다. 예수는 이 일을 위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위에 오셨으며 십자 가의 죽음을 순종하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19:30 ) 가슴이 저미는 선언입니다. 무얼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예수는 아버지의 맡기신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아버지의 맡기신 일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일이 무엇인지 이利를 남긴 다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4:12)

B. 두번째 힌트는 그 일이 주인이 즐거워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즐 거워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면 이利를 남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겠 죠! 결론부터 얘기하면 주인이 즐거워하는 일 역시 아버지의 일과 같습니다.

즉 아버지의 나라가 회복되는 일이요,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되는 일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은 사람의 즐거움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헌금액수, 교회의 평수, 교인의 출석수에 관심을 가지나 주인은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의 영혼에 관심이 있으신거죠. 그래서 그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죄로 인 하여 사탄에게 잃어버렸던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찾는 데 즐거움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장의 비유에는 그러한 주인의 즐거움이 잘 나와 있습 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 ⑥ 절)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 ⑨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  - 절)

주인의 즐거움이 느껴 지십니까 주인의 기뻐하는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오 늘 본문 마25:21 과 비교해 보십시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 의 기쁨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창세기부터 내려오는 거시적인 안목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이 비유들의 참 뜻을 알기란 곤란합니다 . 이제 우리는 이利를 남기는 일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두가지의 힌트를 종합해 보면 주인이 우리에게 요구한 <利를 남기는 것>은 주인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의 연속으로 궁극적으로 메시야 사역 , 즉 영혼구원과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 계획대로 진행되 어져 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계11:1 5) 하는 하나님나라의 회복입니다. 사탄을 멸하시고 잃어버린 택한 자를 다 부르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은 가지가지 이고 우리 인생의 사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지만 우리는 단 한가지의 목적 주인 이 맡기신 그 <일>을 위해 살며 그 일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되어 당신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일 자체, 직업 자체, 직분 자체가 목표일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은사들은 당신의 나라를 회복하고 잃어 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은 그 직업이 장막만드는 자였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당시에 직업알선소 노 릇도 했는데 그곳에서 브리스길라의 천막공장을 소³ 받고 취직하여 돈을 벌 면서 주의 복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게 바울의 선교패턴이었죠. 그에게 있어서 직업은 복음을 전하는 방편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오직 하나 였죠.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복음 증거하는 일. 그게 주인에게 사로잡힌 바 된 그의 인생의 유일한 목표 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 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 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니라!> (딤후4:7-8)

많은 사람이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 날에 심판대에서 재판 장이 되실 주인을 기억하지 못한 채, 우리의 인생을 주인이 맡기신 利를 남기 는 일에 헌신해야 함을 까맣게 잊은 채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살고 자기 명예를 위하여 삽니다. 이런 사람은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지식>을 가 진 자라 보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악한 종은 그래서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참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귀결로 <행함>없는 믿음을 만들었습니 다. 애당초 그의 믿음에 결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행함>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많은 크리스챤들이여!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성 공입니까 부를 얻는 것입니까 주의 구속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은 당신의 택한 자들 에게 각각 재능을 주시고 당신의 메시야적인 사역에 동참케 하십니다. 인생의 직업은 가지가지이나 사는 목표는 하나이고, 사는 양식은 다양하나 오직 주 예수의 맡기신 일을 위해 우리의 인생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가정의 모든 목 표도 여기에 맞추어야 하고 교회의 모든 목표도 여기에 맞추어야 합니다. 높 은 자리에 서고 직분을 차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곳에 힘이 분 산 되면 곤란합니다. 볼링은 열 핀을 쓰러뜨려야 하는 경기이나 사실은 한 점 을 향한 경기이듯이 교회의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맡기신 일을 향 해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앞부분에 얘기했던 <각각 재능대로 주고 떠났더니> 하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음미해 보십시오. 달란트 비유가 무엇을 말 하는 지 그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착한 종이었고 누가 악한 종이었습니까 그는 왜 악한 종이었습니까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만한 능력 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재림을 믿고 사십니까 그 때에 무슨 일이 있을지 짐작이나 하십니까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이제 나머지 주인의 일은 누구를 통해 이루어 질지 아셨습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사도 바울의 고백은 주를 참으로 만난 성도의 인생이 어떠해야 함을 아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주의 심판날에 우리 모두 당당하게 서고 자랑하게 되 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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