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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눅 08: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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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을 받던 여인을 고쳐 주신대 대하여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열 두 살 된 회당장의 외동딸을 살려주신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Ⅰ.회당장 집으로 향하여 가는 예수님(40-42)

오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흐름은 이러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으로 가서 좀 쉬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6,000마리의 떼 귀신이 들어서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소리소리지르며 무덤 가에 거하면서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귀신들린 자가 있어 사람들이 쇠사슬과 고랑에 메여 지켰으되 그것을 끊고 깨뜨렸습니다.(막5:4) 그래서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떼 귀신을 2,000마리 돼지 때에 들어가게 하므로 이 돼지 떼가 비탈길로 내리달아 바다에 몰사하므로 삽시간에 거액의 손해를 본 거라사인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한 사람이 온전해지고 새사람이 된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물질이 없어지고 손해 본 것 때문에 예수님을 거라사에서 떠나시도록 배척을 하므로 예수님은 다시 본거지로 돌아오셨습니다.(40)
예수님의 본거지가 가버나움인데 이 가버나움에 돌아오시게 되자 무리들이 환영을 했습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는데 특히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 가는 그의 외동딸 때문에 가장 많이 기다렸을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12살 된 외동딸이 있었는데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 나이 12살이면 성인이 되고 이때부터 시집을 가는데 곱게 기른 외동딸이 시집도 가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이 회당장 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오시자 그 발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많이 구하였습니다.(막5:22,23)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고 있을 때,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깃을 만짐으로 그 병이 깨끗해졌습니다. 이 사건이 43-4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간에 끼여들었기 때문에 삽화된 사건이였습니다.
노상(路上)에서 이렇게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느라 지체하고 있으니까 회당장 야이로는 속이 매우 답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빨리 가야 하는데, 내 딸이 죽기 전에 가야 하는데 누가 예수님께 손을 댔는가 불평도 했을 것입니다. 누가 손을 댔느냐고 찾으시면 빨리 나아 오지 않는다고 속으로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뭘 꾸물대느냐고 중얼거리기라도 했을 것입니다.

Ⅱ.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49-50)

이렇게 아직 말씀하실 때에 49절을 보십시오.
회당장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빨리 모시고 가려던 회당장 야이로는 그 소리를 듣자 그 자리에 그만 풀썩 주저앉았을지도 모릅니다. 진작 가자니까 시간을 끌던 예수님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야이로의 마음속에 이제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모시고 가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곁에서 이미 죽었는데 예수님을 데려가도 소용이 없다는 둥 별별 소리를 듣고 야이로의 마음이 대단히 흔들렸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런 마음의 생각과 그 관경을 보시고 또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만, 현대인의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야이로는 아이의 부고를 받고 놀라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절망과 갈등으로 뒤범벅이 된 야이로를 보시고 3가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먼저는 “두려워 말라” 하시고
둘째는 “믿기만 하라” 하시고
셋째는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즉, “딸이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1)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미혹하여서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경우이겠습니다. 아브람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약속을 해 주셨지만 어려울 때는 그만 그의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조카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 나라에 전쟁이 나서 롯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가군(家君) 318명을 거느리고 야간 기습 작전을 하여 롯을 구해 왔습니다. 히브리 민족인 아브람 히브리란-건너온 자의 뜻으로 들어온 백성을 뜻하겠습니다. 이 건너온 작은 부족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 작은 부족이 큰 부족을 쳐부수고 쑤셔 놓으니까 벌집 쑤셔 놓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만약에 쳐들어오는 날에는 족탈불급입니다. 그래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창15: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줄 믿습니다.
또, 신약에 사도 바울의 경우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 가서 자기 지식을 믿고 또 철학을 의존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큰 실패를 하고 누가 아덴을 떠나라 하지 않아도, 핍박이 없어도 부끄러워 스스로 고린도로 와서 좌절하고 있을 때, 사도행전 18:9-10절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면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아무런 염려할 것 없습니다.
딸이 병이 들었던, 외딸이 죽었던,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면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마태복음 28:20절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해 가시면서 마지막 유언을 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2) 둘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흔들리는 야이로를 보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였습니다. 회당을 이끌어 가는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들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와서 예수님을 모셔 가려고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4:35),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4:39), 각색 병을 고치시고(4:40), 문둥이를 깨끗께 하시고(5:12-16), 중풍 병자의 죄도 사해 주시고, 들것에 메여 왔던 이가 침상을 들고 걸어갔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5:17-26) 안식일날 회당에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쳤다(6:6-11)는 소식을 동료 회당장에게 들었을 것입니다. 또, 이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으로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며,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상여를 메고 나가는데 상여를 멈춰 세우시고 살려 주셨다는(7:11-17)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잔잔케 하고, 또 오늘은 12해를 혈루증으로 앓으며 많은 의원에게 재산을 다 날리고 병은 더 중하던 차에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더니 금방 깨끗이 나았다는 간증을 지금 듣고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 수많은 이적과 기사들은 모두 가버나움 근교에서 생긴 사건으로 또 회당을 중심으로 일어났기에 많은 회당장들의 모임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모시러 왔는데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하며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주님은 그를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셨습니다. 믿음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 그 들은 이야기들이 사실이므로 “믿기만 하라” 하시는 말씀을 이 시간 성도님들이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일어난 사건들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주의 영광을 볼 줄 믿습니다.

3) 셋째, 딸이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소망이요 진리의 말씀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말씀을 보고 날마다 날마다 새 힘을 얻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일행은 회당장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이렇게 도착을 했을 때, 마가복음에 마가는 표현하기를 사람들이 헌화하고 울며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 장례를 지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마 날씨가 너무 더워서 시체가 빨리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이로의 딸이 죽자 그 집은 장례를 할 준비로 부산했습니다. 당시 장례식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피리 부는 사람, 곡하는 사람을 고용해야 합니다. 부잣집은 더욱 많은 사람을 고용하여 온 집안을 피리 소리로, 곡하는 소리로 떠들썩하게 했습니다.(마태 9:23,24)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고 피리를 불고 곡을 하므로 “다 물러가라 하시고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어 주시고자 했으나 불신을 했습니다. 믿지를 않고 비웃었습니다. 이렇게 불신하고 비웃고, 울고, 헌화 하고, 피리를 부는 이을 마태복음 9:23-24절에 “물러가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및 아이의 부모만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시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기를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Ⅲ.아이야 일어나라(51-56)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면서 왜 사람 차별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좀 못하면 고쳐서라도 12명을 다 데려 들어가시지 않고 왜 셋만 데려 가셨는가 이것이 늘 궁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에 이러하셨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도 9제자는 산하에 두시고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변형되셨습니다.(9:28) 이 때도 3명만 데려 가셨습니다. 또,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도 그러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의 기도 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 하사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14:3-34) 하시고 돌 던질 만큼 나아가 기도 하셨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베드로,야고보, 요한 만을 늘 따로 데리고 가서 기도하시고,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으시고 함께 일하며, 함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수 많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있고 교인들이 있어도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의논의 대상이 된고 예수님이 인정해서 쓰시는 제자들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쓰시는 제자가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5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부모, 예수님, 이렇게 6명이 방에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렀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는 말은 아이의 어머니가 아침마다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던 부드러운 말씨와 동일합니다. “아이야 일어나라”는 것을 마가복음에는 <달리다굼> 했는데, 달리다굼은 아람어입니다. 이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해서 누가는 “일어나라”고 했습니다.(막5:41) 그랬더니 그의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그 부모가 놀랐습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사람 죽은 것이 3곳 나옵니다. 이 3곳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이 다 살려 주셨습니다.
① 누가복음 7장,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고,
② 오늘 본문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고,(7:41)
③ 요한복음 11장,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아이였고,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은 청년 이였고, 나사로는 장년이었습니다. 또, 이들이 죽은 시기를 보면 야이로의 딸은 방금 죽은 것을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은 죽어서 장례를 지내려고 가던 장례 행렬을 멈춰 세우시고 관에 손을 대어 살려 내시고, 나사로는 죽어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나는 것을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개념은 “잠을 자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경우 모두 다 “잔다”하시고 특히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나 되었을 때,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노라 그러므로 깨우러 간다”(요11:11) 하시고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도 “잠들었다”고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행7:60)
잠이 금방 들었던, 깊이 들었던 깨우는 것은 꼭 같습니다. 신약 성경에 이 세가지 경우 모두 다 잠에서 깨우실 때 그 말씀이 동일합니다.
누가복음 7:14 청년아 일어나라
요한복음 11:43 나사로야 나오라
누가복음 8:54 아이야 일어나라
이렇게 죽은 자를 “일어나라”고 하시므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의 주님이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부활의 주님이신 것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영광을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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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8.

7.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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