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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받을 만한 믿음 (행 1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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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캐나다 국경 사이에 세계 10대 장관 중의 하나인 [나이아 가라]라고 하는 큰 폭포가 있습니다. 그 폭포의 양쪽 벽 사이에 쇠줄 을 걸어 놓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어떤 청년이 빈몸으로 줄타 기를 해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건너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감격해서 열광을 하며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제 그 청년이 되돌아 서 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등에 의자 하나를 걸머지고 건 너겠다는 것입니다. 관중들은 더욱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냅니다.

당신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빈몸으로 건넌 사람이 의자 하나 쯤이야 별 문제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 곡예사 는 마이크로 관중들을 향해 요청합니다. 내가 다시 이쪽에서 저쪽으 로 의자를 등에 걸머지고 건너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그 중의 한 사람 대표로 내가 걸머진 이 의자에 올라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요청에 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 물어봅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입니까 아 그럴꺼라고, 이게 믿음입니까 아 옳은 말이라고, 이게 믿음입니까 아멘, 그렇고 말고, 이게 믿음입니까 고개를 끄덕인다고, 이것이 믿음입니까

뭘 믿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를 믿는 사람, 즉 신자라고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믿음이 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도 믿음이라고 합니다. 도 대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한 번 물어야만합니다.

 흔히 그리스도인하면 착하게 사는 사람,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등 으로 규정지으려고 합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윤리적 기준이나 윤리적 생활에 의해 우선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 서 어떤 사람은 아무개는 교회에는 안 나오지만 예수 믿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분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외적인 결과나 혹은 윤리적인 현실에 의해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앙의 근본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러운 연합 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밖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속에 있는 생명에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 오해가 너무 많습니다.

 1. 지식

하나님을 알고, 성경지식이 있을 때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성경 을 많이 읽고, 교리를 잘 알고, 성경지식이 많으면 믿음이 좋다고 합 니다. 그러나 지식과 믿음은 별개의 것입니다.

교회 생활 속에서도 볼 수 있듯이 똑똑하다고 다 은혜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 들, 성경에 대한 지식이 해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종종 믿 는자의 자세와는 동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제가 불교의 교리를 깊이 알고, 많이 안다고 불교적 신앙이 깊다 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의 경전을 외운다고 해서 불교적 신앙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불교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 고 있다고 해도 저는 개신교 목사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지 불교 신자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가 외우는 성경 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내 삶속에 서 올바로 실천되지 못할 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요 한복음 3:16 한 절을 외우는 것보다 못합니다. 한 절을 알아도 똑바 로 알고, 똑바로 믿어야지 성경을 좀 안다고 또는 조금 외운다고 무엇 이 다 된 듯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외우는 것, 읽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외우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실천하시 기 바랍니다. 내가 외우는 성경 귀절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 또는 교리를 조금 아는 것과 신앙을 혼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식과 신앙은 별개입니다.

예수님 당시를 봐도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아는 것에 있어서는 누 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제일 먼저 갑니다. 아는 것이 누가 될 때도 있고, 많은 지식 때문에 도리어 저해를 받는 수도 있습니다. 지식과 신앙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려면 바로 알 아야 합니다.

 2. 감정

감정의 격동을 흔히 믿음으로 오해합니다. 기독교는 종교적 감동 을 즐기는 감상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비적인 면에 치중하 는 하나의 정신문화적인 입장에서의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가 가 지고 있는 그 열매는 생명적인 것으로 삶의 힘과 길을 의미하고 있습 니다. 칼 맑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칼 맑스는 종교란 단 순히 정신적, 심리적으로 그저 마음에 평안을 주고, 잠시 잠깐 감정 의 해소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요즈음 소위 현대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무신론적 입장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종교심리'라는 말로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믿음은 무엇이냐", "종교가 무엇이 냐"하는 물음에 "믿음은 감정승화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감정승화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 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 마음에 평안이 있다고 그것이 진정한 믿 음의 결과냐 무엇에 의한 평화냐가 중요합니다. 내 감정의 해소, 갈등의 해소,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아니됩니 다.

어떤 분들은 유독히 기도할 때마다 소리를 질러가며, 왁짝지껄하 며 기도하는 분이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꼭 그렇게 해야 후련하고, 뭔가 이루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사실, 기도야 하나 님이 들으셔야 기도지요. 기도야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기도지요. 길 게해야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하던가요 이렇게 해야만 기도가 응답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언부언하며 괜히 길 게하려는 기도의 나쁜 습관도 지적하셨고, 큰 소리로 기도하던 바리새 인의 몰지각한 자세도 지적하셨습니다. 내 감정과 계시, 내 감정의 기분과 성령의 역사를 혼동하지 마십시다.

소위 꿈과 현실을 혼돈하는 것은 야만인의 습성입니다. 그런데 어떤이들은 괜히 꿈을 꾸고는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비몽사몽간에 헛것을 보고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꿈을 꾸고는 보통 꿈f 아닌 가봐, 뭔가 있어 하면서 꿈을 현실화 시키려고 합니다. 꿈에 좋게 본 사람은 그저 좋게 보입니다. 혹 꿈에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고는 아무래도 저 사람이 수 찬구명, 내 예감은 보통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그칩니다. 자기주관적인 꿈을 객관화 시키려고 합니다. 꿈과 현실 을 혼동합니다. 자기 주관적인 꿈과 그 감정과 하나님의 계시를 구 분하지 못하는 망령된 신앙인이 많습니다. 요즈음 잠실에서 집회를 열고 예수님의 이름만 도용해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다고 하는 사람, 올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호들갑 떠는 시 한부 종말론자들이 하나같이 환상에 사로 잡힌자들입니다. 이런 이단 의 집단들이 바로 이런 류의 무리들입니다. 이런 것이 다 f환상에 사 로잡힌 잘못된 결과입니다.

 3. 의지

그래서 자기 결심, 의지적 결단 즉 신념 또는 확신을 신앙으로 착 각합니다. 자기의지, 주관적 의지를 믿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제 고집대로 살면서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내 의지로 행하고, 내 의지로 바치고, 내 의지로 끊고, 내 의지로 가고, 내 의지로 봉사하 고 그러면서 신앙으로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 이것이 관철되지 않을 때 신앙마저 포기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 러니 의지가 약할 때 믿음도 약한 줄 압니다. 확f 신은 내 자신의 문제 요, 다만 심리적인 작용일 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4. 종교의식

의식에 동참하고, 많이 가담하여 참여하면서 그것을 그저 믿음의 성장이라고 합니다. 종교의식에 익숙한 생활을 믿음의 생활처럼 잘 못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즈음 얼마나 혼탁해졌는지 교회 열심 히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못된 사람이 많습니다. 기도 잘한다 고 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간단히 말씀f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말하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능력, 생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생명력입니다. 오늘 한 사건을 통 해서 믿음을 낯작 줍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설명합니다. 믿음도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어야 합니 다. 이 믿음은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만 가지고 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짜 믿음, 참 믿음, 살아있는 믿음 하나면 됩니다. 모든 승리가 가능합 니다. 17세기 신학자 허먼의 말입니다. "한 알의 산 신앙이 한 파 운드의 역사의 지식보다 낫고, 한 방울의 사랑이 과학의 힘보다 낫다 ". 믿음은 형식이거나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f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를 왜 믿습니까 구원받기 위 해서랍니다. 그러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10원에 1원 모자라는 것이 구원입니까 구원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구원 이 무엇인지는 알고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극적인 의미에서 구원은 자유입니다. 죄, 사망, 하나님의 진 노, 사탄,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음으 로 해방되고 죄를 이깁니다. 죄는 자꾸 빠져들어가는 특성이 있습니 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노예가 됩니다. 죄의 종이 되어 계속적 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 죄의 반복성으로부터의 탈피,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가 장 무서운 위력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죽음 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죽음 자체로부터의 자유가 곧 영생이요 예수 믿어서 얻는 구원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임종을 보게 되는데 그래도 믿는 사람의 죽음 은 다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홀로 네 형제를 키우시던 한 여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네 아들을 불러 놓고 유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중 막내 아들은 신앙이 없었습니다. 자이 제 아들에게 주는 어머니의 마지막 인사는 이렇습니다. 첫째 아들에 게도 'Good night'. 둘째 아들에게도 'Good night'. 셋째 아들에게 도 'Good night'합니다. 그런데 막내에게는 'Good bye'하더라는 것입 니다. 그래서 막내는 "왜 형들에게는 'Good night'이요, 나에게는 'Good bye'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대답하시는 말씀은 너의 형들은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훗날 다시 만날 것이 기에 나의 죽음은 잠자는 것이므로 'Good night'이요, 너는 믿음이 없으므로 영원히 못 만날 것이기에 이별의 인사인 'Good bye'를 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막내 아들은 깨닫고 믿 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f구 사람과 다 시 하늘에서 만날 것이라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 보면 믿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미래의 기약이 있기 때문입니 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망을 이긴다 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 근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사망을 이기는 그 귀한 역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최종의 축복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것, 하나님 나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전도는 간단했습니다. 요즈음 여 러가지 얘기f 합니다. 교회에 가면 교양으로도 좋고, 복도 받고, 괜 찮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좋은 거래처를 만들 수도 있답니다. 다 쓸데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 믿고 천당갑시다"하면 되는 것입니 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고 잘 된다고요 잘 되봤자 얼마나 자 되겠어요 예수 믿고 복 받는다고 요 복 받아야 얼마나 받겠습니까 얼마나 살거라고, 그것도 옷걸 이가 좋아야지 몸은 고물인데 옷만 좋으면 뭐합니까 집은 좋아서 뭐 합니까 이제 다 되었는데 대충대충 살지. 자동차를 주어도 허리가 아파서 못 앉아 있겠는데-. 복을 쥐도 별 볼일 아닌데, 별거 아닌데 복 받는다고 합니다. 복 받을 그릇이 되어야 복을 받지요.

예수 믿는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천당입니다. 어차피 가야 될 것이고, 곧 가게 될 것인데. 그래서 최권능 목사님 말씀대로 '예수천 당' 하나면 됩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천국을 외치면서 회개하라 고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천국이 저희것임이요" 모두 천국이 궁극의 목적입니다. 괜히 쓸데없이 빙빙 돌려가며 너무 복잡하게 만들지 마 세요. 예수 믿는 목적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바로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f사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우리가 예 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깁니다. 우리는 약하나 주님의 힘 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자 녀되는 것을 의미하며, 치유와 회복을 의미하며, 영생을 의미하며, 온 전케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 회복된 인간, 바로 하 나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인격,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곧 구 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 말로 어렵게 표현하면 샬 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자기가자기를 스스로 구원하지 못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 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겠다고 해서 자기 머리칼을 수 위로 잡아 당긴다고해서 살아나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힘을 쓸수록 자 꾸 빠져들어 갑니다. 자기구원 자구책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구 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요, 전권적 인 역사요, 창조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실 때 그 앞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 우리의 자세가 문제가 됩 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바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그 바른 자 세,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새로운 것, 또는 모험을 좋아합니다. 산을 타 는 등산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빌딩 사이를 왔다갔다 하기도 하 고, 인공 암벽을 만들어 놓고 올라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모 험심 강한 젊은이가 묘안을 생각했습니다. 다 보이는 가운데 산을 타 거나 하는 것은 좀 쉽다는 것이죠. 그래서는 한 밤 중에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산을 타고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더듬 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올라 갑니다. 사실 정상이 어디쯤인지, 자신이 어느 만큼 올 라왔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한참 올라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미 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쑥 미끄러지는데 아찔했던 정신을 차리고 반사 작용으로 손을 내밀어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밑 은 몇길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낭떠러지입니다. 그렇다고 한 밤중에 혼자 올라왔으니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도와 줄 사람도 없습니다. 날 이 새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이제 이 청년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 기 시작합니다. 살려달라고 말입니다. 한참을 기도하는데 하나님께 서 드디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네가 잡고 있는 그 손을 놓아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하나님이 나 를 살리시려는 것인지, 산산조각을 내시려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놓 으면 분명 저 낭떠러지로 떨어져 목숨을 부지 할 수 없을 터인데 말입 니다. 이때 청년은 다시 외칩니다."하나님말고 다른 분 안계십니 까" 그러다가 기진 맥진 더 이상 매어 달릴 힘이 없을 때 날이 밝 았습니다. 이제 밑을 보니 말과 땅 사이가 불과 한 뼘 정도 한 20Cm 밖에는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아닙니까 아무리 큰 은혜를 주셔 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없으면 그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믿 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 음. 도대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무엇이냐 사도바울은 루스드라에 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하면서 내려다 보니까 열심히 듣거든요. 여 기서 바울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배 목사님들 의 말씀에 의하면 한 교회에서 설교를 오래하다 보면 설교 듣는 자세 를 보고 그 사람의 믿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듣 고 내가 소화해야지 옆의 사람은 왜 찌릅니까 복음의 능력은 집중적 으로 받아야 나타납니다. 그래야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또한 목사 의 얼굴 보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죄 많은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오 되 처음 나오는 사람은 앞에 나오기를 꺼려합니다. 저 뒤에 앉기 시 작하다가 믿음이 자라면서 점점 가까이 가까이 나오게 됩니다. 그 래서 성숙한 교인들은 앞에서부터 앉습니다. 예배 30분 전부터 뜁니 다. 앞에 앉기 위해서 말입니다. 믿음의 정도가 여기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온다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가 그리고 듣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똑바로 쳐다보고 들어야지요.

사도바울은 지금 설교하고 있습니다. 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내려다 보니까 앞에 앉은앉은뱅이가 열심히 쳐다 보는데 얼마나 알 아듣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로 열심히 쳐다 보는데 바울이 보니까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듣는 자세, 이 듣는 믿음 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 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사람은 교회에 까지 나와 앉아서도 하 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심령입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 입니다. 믿음은 곧 듣는 마음입니다.

농아들은 말을 못하기에 벙어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손으로 대화 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90%는 말을 할 수 있는 신체적 구조를 가 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혀의 구조도, 입의 구조도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듣지 못해서, 안들려서 배우지 못하여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벙어 리 아닙니다.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어도, 잠재력이 있어도 듣는 기능이 망가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들어야 하고, 옳게 들어야하고, 들을 것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외칩니다 "복음은 들음에서 나고" 듣지 않은 복음을 어떻게 믿겠느냐 전하는 자가 없는데 어떻 게 듣겠느냐 보냄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전하겠느냐 그리고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다음으로 생각할 것이 들을 뿐만 아 니라 들으면서 자기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특별 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자라. 그래서 걸어본 적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향해 일어나라고 합니다.

앉은뱅이입장에서 볼 때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앉은뱅이 도 분수가 있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요, 걸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데 말입니다. 멸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러나 이 앉은뱅이는 그렇 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계속해서 아멘 아멘하고 받아 들이던 중에 일어나라고 하니 자기가 앉은뱅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 습니다. 그는 과거를 잊고, 현재를 잊었습니다. 그의 생각 속에는 말씀 하나뿐입니다. 상식도 없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아직 한번 도 걸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어떻게 순종합니까 우리의 믿음이 이래서 절름발이가 되는 것입니다. 해 본 적이 없으니 까 안된다는 것입니다. 들어 본적이 없으니까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받은 은헤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밤새 껏 그물을 내리웠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리라. 못잡았습니다마는 말씀하 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며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 로 많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과거의 경험, 안된다는 이야기, 상식 밖이라는 이야기,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 이런 것들이 바 로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요소들입니다. 일생동안 걸어보지 못했더 라도 이제 걸을 수 있습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도 이제 가능합 니다. 또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소문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 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여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에도 전에 그런일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건넙니다. 여기 에 모세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홍해 앞에 당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물을 치고 건너가라 하시니 모세는 지팡이로 물을 쳤습니다.

그런데 홍해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당황하는 모세에게 청년이 이야 기 합니다. 모세여 하나님께서 물을 치고 건너가라고 했는데 왜 주 저하십니까 그리고는 물로 첨벙 뛰어 드니까 물이 쫙 갈라지더라는 것 입니다. 저는 그말이 믿고 싶습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입 니까 이것이 소문대로입니까 죽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나, 동정 녀 탄생이나 어느 것 하나 이치에 맡는 이야기입니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이 사람, 아직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이사람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가 앉은뱅이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자기경험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고맙니다. 그저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 힙니다. 말씀에 붙들려 자기부정을 자연스럽게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 다. 다만 말씀이 나에게 무어라고 하시는지 여기에만 귀를 기울입 니다. 여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구원은 곧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합당한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들려지십니까 이제 받아들이시고 순종하십시다. 이제 걷게하시고, 뛰게하시고, 주의 능력을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 그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구원의 능력을 향유하실 수 있기를 바랍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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