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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이 교훈하는 부모와 자녀 (잠 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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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버이 날이고 교회에서도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 가정의 부모님들께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경은 부모와 자녀에 대해서 꼭 필요한 말씀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보십시오.
“부모의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자녀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13절에는 부모로서 “아이를 훈계하지아니치 말라” 했습니다. 자녀가 혹시 잘못이 있을 때 자식에게 매를 드는 일이 있는데 물론 이것이 매를 든 부모에게나 매를 맞은 자식에게 괴로운 일이지마는 사실은 자식에게 큰 유익이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은 음부에서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바로되게 하기 위해서 잘못할 때 알아차릴 만큼 매를 드는 것이 아니라, 때리기 위해 때리는 학대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녀에게 부상을 입히고 심지어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 같은 데서는 자녀에게 매를 들고 벌을 주는 경우가 있으나 몸에 자국이 나거나 상처가 나면 내 자식을 때렸어도 법에 저촉됩니다.
성경의 교훈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부모가 지고 바로 지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도로 인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24-25절에도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운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원리로 구성됩니다. 부부의 사랑도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주면 반드시 남편한데서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바랐던 만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섭섭해하고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주는 만큼 받아야 하고 받는 만큼 주지 못할 때 애정의 비극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는 만큼 가야하고 가는 만큼 와야하는 것이 인생의 근본 원칙입니다. 주기만 해도 안되고 받기만 해도 안됩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어느 한 쪽만이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한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사랑이지 상호간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상호작용입니다. 우정도 그렇습니다. 오고 가는데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초월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또 줍니다. 아낌없이 줍니다. 반드시 받기 위해 주는 사랑이 아니요, 받지 못한다고 섭섭해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준다는 의식조차 없이 그저 주기만 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기쁨이요 주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받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님 닮은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깊고 높고 넓은 사랑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천사를 여러 해 걸려서 지상에 왔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세 가지를 골랐습니다. “예쁜 꽃”, “갓난아이의 웃음”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천사는 그것을 바구니에 넣어 가지고 여러 해 걸쳐서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예쁜 꽃은 시들어 볼품이 없어졌습니다. 갓난아기는 자라서 천지난만한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한결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을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인생의 진실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한결같이 아름답습니다. 샘물이 넘쳐서 사방에 철철 흐르듯이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는 사랑의 샘물이 넘쳐흐릅니다.
우리는 그 맑은 샘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인간의 인격의 밑바탕에는 어머니의 맑은 사랑의 향기가 흐릅니다. 우리의 신체는 밥을 먹고 자라지만 우리의 정신의 정신과 인격은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여자는 약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합니다. 무엇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처럼 강하게 합니까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자식이 잘 되는 것이 어머니의 소원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따라서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린애들의 예쁜 얼굴울 보는 부모의 기쁨이 있습니다. 아무리 꽃이 아릅답다고 하지만 어린애들의 얼굴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자기 애보다 더 예쁜 애는 세상에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린애들도 가만히 보면 더 예쁜 애가 있고 좀 그렇지 못한 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애의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린애가 몇달 지나 하루하루 웃기 시작하면 웃는 아기 얼굴처럼 귀엽고 예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린애가 좀 더 커서 뒤집을 때가 되면 그것도 귀엽구요, 배밀이 하게 되면 그것도 사랑스럽구요, 엉금엉금 기어다니면 그것도 훌륭해 보입니다.
어린애들 동작 하나 하나에서 부모들은 기쁨을 가집니다.
그러다가 이 어린애가 좀 더 자라서 혼자 서고 걷게 되면 부모들은 박수를 치고 어린애를 격려하며 좋아합니다. 더구나 “엄마”, “아빠!”하는 말을 하게 되면 얼마나 신비스럽습니까
그래서 이때쯤 되면 엄마들이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흔히 하게 됩니다. 옆에서 엄마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애가 말 몇 마디 간신히 하게 되면 뭐라고 자랑하는지 아십니까 “우리 애는요, 벌써 못하는 말이 없어요.” 합니다. 왜요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서 그럽니다.
우리 나라도 전과는 다르게 생활양식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부부가 어린애를 데리고 예배에 출석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지하실과 2층 예배실에 자모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가끔 어린애들 데리고 예배 드리는 부모님을 보면 아주 명랑해 보입니다. 어린애들을 보는 엄마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
사실 어린애들과 엄마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자모실에서는 강단이 보이지 않아도 별로 지장이 없을 것 같아요. 가만히 보면 애 엄마들은 애들 얼굴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강대를 볼 시간이 없을 것같아요. 좀 분주하기는 하지만 어린이 방에서 얼굴 찡그리는 어머니는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는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그러다가 애들이 점점 커서 유치원에 가면 얼마나 대견하고 예쁩니까 유치원에 가서 그림 하나 제 손으로 그려오면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 스럽습니까
국민학교에 가면 얼마나 귀였습니까 혹시 상이라도 하나 받아 오면 얼마나 훌륭해 보입니까 그래서 그 사장을 사진틀에 넣어서 방에 걸어 놓습니다. 장해 보여서 그렇습니다.
교육열이 과해지는 것이 ‘치맛바람’이라는 말로 통했습니다 마는 그 말이 왜 생겼을까요 애들이 너무 예뻐서,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따라가고, 여기저기 분주히 다니며 들락날락하다 보니까 치마에 바람이 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요사이 애를 많이 낳지 않고 하나 아니면 둘만 낳으니까 더욱 자녀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 같아요. 애들 공부 때문에 자동차를 사는 집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는 가정의 화평을 가져옵니다. 어떤 때는 부부간에 말다툼을 하고 구름이 잔뜩 끼어서 앉아 있다가도 애들이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서 “엄마, 아빠” 하면 성이 나서 겨울 동산처럼 얼어붙어 있던 것도 봄동산의 눈처럼 사라집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부 싸움이 심각해져서 “나는 이런 집에서 못살아” 하면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부인이 문밖으로 나왔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고집을 부리며 부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사실 부인의 속셈은 ‘내가 이렇게 나간다고 야단하면 남편이 붙들겠지’ 했는데 붙들지 않으니 나갈 수밖에 없잖겠어요
한참 맥없이 속에는 화가 치밀어서 걸어가는데 밖에서 친구들하고 놀고 있던 애가 ‘엄마, 어디가“하면서 달려옵니다. 보따리를 싸든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어린애도 눈치를 채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 못가! 나하고 살아.“ 하면서 매달려서 그만 엄마는 어린애 손에 끌려 집으로 다시 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어린애가 이혼 방지하는데도 가정법원 판사보다 낫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도 부모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취직을 해도 기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어도 기쁨이 있습니다. 이처럼 자녀는 부모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 줍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절을 보세요.
“내 아들아 만일에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했습니다. 24-25절에는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운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 요한 3서에 보면 사도 요한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믿음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서 여러가지 다른 소식 듣는 것보다 그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기쁘다고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것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하는 생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생활, 그 계명을 지키는 생활, 범사에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생활, 성결과 겸손, 진실과 근면, 충성과 절제, 그리고 사랑의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안에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교회에서 봉사하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정성껏 일합니다. 이 얼마나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일입니까
믿음 있는 부모로서 그 자녀에 대한 제일 큰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자녀가 믿음이 점점 자라서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왜 이것이 그처럼 큰 기쁨입니까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낳기 전에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엘리가 볼 때 꼭 술에 취한 여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더러 술이나 깬 다음에 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한나가 엘리에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나의 주여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아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아들 사무엘을 젖뗄 때까지만 집에서 키우고 젖뗄 때쯤 되어서는 하나님께 서약한 대로 성막에 두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갖 젖을 뗀 어린애를 부모 없이 성막에 있게 했으니 마음이 잠시인들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한나는 하루도, 한 순간도 아들 사무엘을 잊지 않고 기도했고 매년 제를 드리려 성막으로 가서 일년에 한번 아들을 만나는 한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이 사무엘이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해서 나시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는 바로 왕의 칙령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람의 가정에서 난 남자아이는 다 엎어 죽이라는 지시가 내린 때였는데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라 그 목소리가 커져서 더 이상 숨겨 키울 수 없으므로 나일강에 버렸고 미리암이 지켜보게 하다가 바로의 공주에 의해 건짐 받게 되었고 미리암더러 유모를 구해 달라는 요청에 생모 요게벳을 지도자로 장성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자녀를 위해 믿음으로 드리는 부모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자녀가 잘 되고 진리 안에서 살면 부모는 왜 기쁩니까
그것은 교육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이나 교회 학교의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를 가르치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어릴 때 성격이 부드러울 때는 길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굳어지면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어릴 때 교회 학교에 다녀 본 사람은 도중에 교회를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쉐마라고 해서 신명기 6장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조 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가정교육이나 교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자녀가 잘되고 진리 안에 살면 부모가 기뻐합니다.
왜요 이것은 수고의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우리 가정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뿌리고 가꾸는 수고없이 수확의 기쁨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슨 책임을 맡았든지 성실히 수행할 때 큰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도 빠짐없이 잘 참석하시는 분이 가장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한 주일이 시간으로 말하면 168시간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몇 시간이나 주님을 위해 바칩니까 신문 읽는 시간과 성경 읽는 시간 중에 어디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십니까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교회에 나기는 것을 강요하면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가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해서 보냅니까 공부를 해야 사람 대접받을 수 있으니까 싫어해도 보냅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는 교회가 꼭 필요합니다. 강요해서 나오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헨리 아이언싸이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완전한 교회를 발견하면 그 교회에 다니지 마세요. 왜냐하면 당신이 그 교회를 더럽힐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들 앞에서 교사나 목사나 교회 직분 맡는 이들에 대해서 비난하지 마세요. 부모의 생각 없는 비판의 말이 은연중에 여러분의 자녀가 교회를 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런 경우에 실제적인 실패자는 교회가 아니라 부모와 그 자녀 입니다. 누가 교회를 비판합니까 일을 맡았지만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비판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성실하게 맡은 일을 감당하면 심령의 병이 치료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만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뿐 아니라 그 심령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믿음 있는 부모에게는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기도입니다. 우리 자녀 가운데 믿음이 없어서 마음에 짐이 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시고 계속 기도하세요. 지금 안 이루어 주시면 다음에 여기서 안 이루어 주시면 천국 가신 후에라도 꼭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 길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세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에게 신실한 신앙이 있으셨다면 그 신앙을 물려 받으셨습니까 부모된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자녀에게 자녀에게 물려주고 계십니까
이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힘쓰고 계십니까 믿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다른 것 다 했어도 신앙을 물려주지 못하면 큰 실패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믿음 있는 부모, 믿음 있는 자녀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회에 유익을 끼치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가정이 행복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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