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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부활 고난의 승리 (시 118: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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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주일이다. 만물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 싹을 내는 부활 의 계절이다. 봄을 맞이하는 이들마다 새생명의 희망을 안고 한 순간, 한 순간을 즐겁게, 기운차게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날이 더욱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은 억울하게 죽은 예수, 우리 때문에 죽은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날이기 때문이 다. 억울하게 죽은 수 많은 애국지사들, 정의의 사도들, 전쟁의 희생자들의 죽음은 더욱 슬프고 가슴 아픈 죽음이다. 한많은 죽음이다. 그대로 영원히 땅에 묻혀 사라져 버려져서는 안되는 죽음이다.

 민초들의 촌락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목수에게 사형이란 당치도 않은 형벌이다. 그것도 민중혁명가라는 죄명, 반체제 불순분자라는 죄명, 하느님 을 참칭한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은 너무나 억울한 죄목이다. 눈먼 사람들에 게 빛을 주었을 뿐,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고 문둥이를 깨끗게 해 주었을 뿐, 그 일이 너무나 절박하여 안식일법을 어겼을 뿐인데 정치적 죄목으로 극형에 처한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고 기막힌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 타락한 종교는 예수를 죽였다. 병든 권 력은 예수를 죽였다. 어리석은 민중은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예수는 타락 한 종교를 구하기 위해, 병든 권력을 살리기 위해, 어리석은 민중을 회개시 키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선포 하셨다. 옛날 히브리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의로운 사람들의 집집에서 터져 나오는 저 승리의 함성 야훼의 오른손이 힘을 떨쳤구나 야훼의 오른손이 번쩍 들렸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야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 (시편 118:15-17)

예수의 죽음은 우리 때문에 죽은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은 죽음이다. 옛날 예언자 이사야는 예수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슬픔을 당하였으나우리는 그가 하느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받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으니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이사야 53:4-5) 우리 때문에 대신 죽으신 예수는 부활하셨다. 남을 위한 고난은 무덤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반드시 부활의 씨앗이 된다. 우리의 질병을 위해 예수 는 고난받으셨다. 그러나 우리의 질병은 땅에 묻어 두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는 우리의 죄는 무덤 속에 묻어 두고 영원한 구원으 로 다시 부활하셨다.

 예언자 이사야는 예수의 고난을 인간의 죄를 속량하는 것과 평화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죄의 대가는 죽음"(로마 6:23)이 다. 예수의 고난은 인간의 죄를 속량한 고난이요, 예수의 부활은 죄의 대가 인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한 부활이다. 죄를 속량받은 사람은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고,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요청하신다. 하느님과의 화목 뿐만 아니라 원수와의 화목을 기뻐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직책이 다. 이 일에 성공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의 부활이 예수의 고난의 승리인 것처럼 우리들이 이룩한 평화, 원수관계를 끊고 평화관계를 맺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된다. 남북의 평화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명 령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지상명령이기도 하다. 평화가 없이는 예수의 고난은 억울하고 슬픈 죽음으로 계속 남을 뿐 결코 참 생명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희망 이라 주장하였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신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우리를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 8:32-)

예수의 부활을 가장 두려워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예방하기 위해 빌라도에게 협력을 구했다.

그리고 무덤을 막아 봉인하고 경비병까지 세워 무덤을 지키게 했다.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한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제일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예수가 부활한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의 부활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음모와 마각이 들어날까 싶어서였 다. 스스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거스린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형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이 의인인줄 알면서도 그의 목을 쳤다. 헤롯은 자신의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 만고에 씻 을 수 없는 악을 자행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어 진리를 거스린 로마를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심판하셨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며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죄의 권세는 땅에 묻히고 하느님의 정의만이 살아 있는 것이 다. 하느님의 정의만이 억울한 죽음에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남을 위 한 고난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때문이다.

 지금 이 땅은 말로 다 할수 없는 신고를 앓고 있다. 사람들도, 하늘의 공기도, 땅에 흐르는 물도 신음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이 멸망의 사슬에 얽혀 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 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누가 이들을 위해 가며, 누가 그들을 멸망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할까 예수의 고난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예수의 부활로 죽음에서 행방된 우리들이라고 감히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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