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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 (눅 23: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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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멘, 확실히 인정한다.

서로의 의견이나 뜻이 맞을 때 사용하는 행동이나 말을 우리가 살펴보면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눈을 쳐다 본다든지 아니면 그래,오 케이라는 말을 쓰는 등 다양한 표현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말 가운데 우리가 서로의 의견이나 뜻이 맞을 때 사용하는 말은 `아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아멘이라는 말은 아만( )이라는 말에서 나온 분사형태의 단어로 확실하다는 의미 즉 우리가 만나며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대상에 대하여 완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할 수 있는 말이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확증한다 지지한다, 성실하다, 믿을만하다, 확실케하다, 신뢰하다, 믿다라는 의미로 서로가 마음이 하나가 되어 의견이 일치 된 가운데서 할 수 있는 고백이며 신실함과 믿음이 전제된 가운데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 `아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거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의미로 기도가 끝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해주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내가 확신한다, 믿는다' `그렇게 되어질 것에 내가 동의한다. 그런 의견에 내가 동의한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시대 때이 말이 사용되어 온 것을 살펴보면 제판에 있어서 옳은 것을 확증할 때 즉 여인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때 사용했던 것을(민 5:22) 볼 수 있으며, 율법을 백성들에게 선포할 때 모든 백성들이 아멘했던 것을 볼 수 있으며(신27:15-16), 느헤미야 5장 13절에서는 느헤미야의 말에 대하여 백성들이 아멘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역대상 16장에서는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긴 후 감사시를 읽을 때 온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뿐아니라 신약에서도 여러군데에서 이 아멘은 내가 믿습니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확신합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5절에는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종을 고치기 위해 찾아온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는 아멘 응답 즉 믿을만하다 확실히 내가 너의 믿음을 보장한다라는 아멘의 응답을 하셨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부분의 `아멘' 즉 `내가 믿는다. 확신한다'라는 의미의 말은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아멘으로 응답하신 사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아멘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가 너의 의견에 동의한다. 내가 너의 말을 확신한다. 그래 내가 그것을 믿는다 내가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동의한다라고 말씀하셨던 `아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전파하시 고 회개를 선포하셨으며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들을 고치시며 겸손한 사랑을 실천하시면서 살아오신 뒤 드디어 많은 사람들의 정죄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피와 살을 주셨건만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주님을 저주했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의 모습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야 될 자라는 것을 알 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묵묵히 우리 또한 주님 자신과 같이 죽음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임을 보이시면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사형 집행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사형틀에 달린 두 사람에게 초첨을 맞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사형집행을 교수형 즉 목을 매달아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살던 당시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형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은 다음 서서히 고통을 당하면서 죽게 만드는 잔인한 사형방법으로 최고의 형벌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사형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과 함게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한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다시말하면 너 스스로 인류의 왕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왜 인류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네가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느냐 어서 너도 스스로 살리고 나도한번 살려 보아라'라고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가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이와 같은 모습 속에서 우리 주님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해달라는 강도를 향해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 주님은 내가 너의 마음과 일치한다. 내가 너의 신실함에 대한 요구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라는 아멘 응답을 두번째 강도에게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우리에게 있는 아멘 응답

여러분은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이 강도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순간인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이 두 강도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 두강도의 모습속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두 강도의 모습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똑같은 죽음의 상황이 주어졌지만 한 사람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 저주를 받은 자야 네가 그렇게 큰 소리를 쳤지만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결국은 십자가 밖에 없지 않느냐 네가 무엇을 했다고 큰 소리를 치느냐 인류를 구원한다고 인류의 죄를 사한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 이 망할 놈아 결국 십자가에 달릴놈이 무슨 사랑이고 무슨 구원이냐

그러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어쩌면 우리들 또한 죽음의 많은 상황속에서 우리의 모습이 바로 첫번째 강도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날마다 교회에서 사랑을 가르치고 배우고 은혜를 받는다고 하지만 공부는 매일 안되고 집에가면 매일 꾸중만 듣고 친구들도 보기 싫고 모든 것이 않되는 일밖에 없는데 뭐가 기쁨이고 뭐가 사랑이야라고 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라고 원망할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첫번 째 강도와 같이 예수님 어디 이런 모습 가운데 있는 나를 구원할 수 있으면 구원해 보시지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모든 것을 준다고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다고 하셔넣고 이게 뭡니까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죠 라고 우리도 모르게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강도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여 내가 비록 당신을 빌지는 않았고 당신의 깊은 진리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 나의 모습이 끝이 아님을 당신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죽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이 가는 그 영원한 하늘 나라에 나도 함께갈 수 있게 도와주소서"
조금은 치사한 모습같고 비굴한 모습같고 죽음앞에서 두려워하는 자같지만 오늘 우리 주님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이 달린 십자가를 인정하는 사람에게 내가 아멘이라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어떤 사람은 불평하가고 포기하고 좌절하며 비관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긍정하고 도전하며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해결책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십자가에 달린 인간이 신에게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하는 것이다 마치 첫번째 강도가 외쳤던 것과 같이 외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도 어떤 사람은 그러한 고독을 그저 사랑하면서 운명으로 알고 그것을 즐기면서 살아야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두번째 강도를 통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에 던져라 그러면 내가 아멘으로 응답하겠다"
"아멘 내가 너희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낙원으로 변화시켜주겠다"

4. 아멘 응답을 만들어가는 삶

오늘도 우리주님은 마치 십자가와 같은 고난의 상황속에 있는 우리들을 향해 아멘응담으로 화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아픈 몸과 미워하는 모습속에서 당하는 고통,욕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상함, 학교 공부로 인해 당하는 모든 아픔,경제문제로,이성교제로 모든 십자가와 같은 문제속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멘 응답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그것은 바로 나를 생각해 달라고 하는 간구에서 출발되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건강의 문제로 십자가와 같은 아픔속에 있는 나를 생각해 주십시요'
`주님! 학업의 문제로 십자가와 같은 아픔속에 있는 나를 생각해 주십시요'
`주님! 이성의 문제로,부모님,선생님,친구의 문제로 십자가에 달린 나의 모습을 색각해 주십시요'
`주님! 나는 아직 구원의 확신도 없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도 알지 못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나를 생각해 주십시요'
`주님! 나의 외모와 나의 성격과 나의 습관을 생각해 주십시요'
이런 적극적인 간구속에서 우리 주님은 "내가 아멘,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아멘 응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모든 삶에 아멘으로 응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한 마음이 되기를 우너하시며 우리의 고통을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아픔을 함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첫번째 강도와 같이 주님을 모독하며 하나님이 있는데 왜 세상이 이 모양이며 나의 생활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느냐고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되며 우리의 모든 삶에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던 주님을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고 첫번째 강도와 같이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내가 바로 너와 친구가 아니야 내가 너와 한 마음이되어 너의 모든 삶을 천국으로 바꾸어놓고 싶은데 너는 왜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는 고난주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은 첫번째 강도와 같은 모습의 우리들에 의해 고난 당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베다니 중등부 친구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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