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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투하시는 하나님 (출 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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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이해가 될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질투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가운데서도 저질에 속하는 용업니다. 점수를 아무리 좋게 줄려고 해도 이 단어에는 점수를 줄 수 있는 요소가 없습니다. 보통은 도덕적으로 저질인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로 상식적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칠대죄악 중의 하나로 이 질투를 꼽습니다.
하나님이 질투라 그것도 명사로 자기 이름이 질투라는 것으로 표현하시지요. 그리고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형용사로 반복하시지요. 도무지 이해가 안가요.
왜 하나님을 왜 이렇게 까지 표현해야 하는지.

그래서 하나님을 질투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 보니까 에덴 동산의 사건이 생각이 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부각시켰는지 창세기 3장을 보면 우리가 알수 있지요. 야, 하나님이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아니야, 먹어!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지 아느냐 너 그 의중을 아니 그걸 먹고 나먼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하나님이 알거든. 그래서 질투가 나서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이지. 그걸 먹고 주는 것이 아니야 먹어라. 그래서 뱀은 하나님을 아주 고약한 질투의 존재로 부각 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거기에 도전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충분히 하나님을 이 단어에다가 놓고 보면 마귀가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 질 만큼 질투라는 단어는 좋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성경가운데서 가장 조화가 안되는 한 귀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성경 귀절을 읽으면서 초신자들이 당황을 합니다.그리고 가끔 질문을 해요. 이거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도무지 하나님이 어떻게 질투를 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분들은 성경을 참 많이 읽으시는 분들입니다. 적어도 건성으로 읽지는 않는 분들입니다. 주의 깊게 읽었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생각도 안하고 줄줄줄 읽어 내려 가지요.

저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따라야 된다고 늘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1서 4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볼까요. 하나님 = 사랑 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만 적용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리 인자하고 인품이 좋은 사람이라도 000는 사랑이라. 어울립니까 황대성이는 사랑이라! 그러면 웃기네. 그럴 겁니다. 안통해요!!! 오직 하나님에게만 통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질투 라는 말을 하나님께 적용시키니까 어울리지를 않아요. 차라리 황대성이는 질투라 그러면-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받아 들일수 있습니다만.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질투라는 용어를 많이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질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그 의미가 나쁜의미의 질투가 아니라 좋은 의미의 질투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나쁜의미로 하나님을 표현할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해석에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 성령께서 선택하셨습니다. 시인이 자기 시를 쓸 때에 막 생각나는대로 쓰지를 않습니다. 단어 하나를 선정하느라고 한달 두달 몸부림을 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아름다운 글이 나오고 작가요, 시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가르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 너무나 제한 되고 모순이 많은 용어를 전부 가져다 놓고 마치 활자를 하나하나 찾아 내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쓰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靈感인데 성령이 이 질투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하실 때에 그 단어가 가지는 뉴앙스를 몰랐을 리가 없지요. 아무리 좋은 의미라고 할지라도 질투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좋은 이미지를 같지 못하는 단어라는 것을 성령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미지를 손상 시킬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단어를 쓰도록 하셨을까 왜 한낱 변덕스러운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단어! 계집녀 변에 질병:화살에 맞은 상처와 같은 고통스럼움,계집녀 변에 돌석자!(嫉妬)
이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을 할 때는 그만한 위험부담을 각오하면서도 과감하게 쓰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단어가 아니면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단어를 쓰면 그 의미가 약화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본문을 볼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까지 써 가면서 설명 하시는군요. 어떤 분은 이것을 하나님의 표현의 성육신 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종이다.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卑下시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이 될수는 없지요. 그러나 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어린양이다. 예수는 어린양이 될수 없지요. 그런데도 어린양이라고 비하 시켰습니다. 나는 질투다! 할 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체면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시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일수록 우리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주여,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런 용어까지 다 동원 하셔서 말씀하시나이까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겸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진지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세가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배경을 좀 설명 드리지요.

하나님께서 질투라는 말을 쓰실 때에는 그 배경에 독특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결혼서약이 맺어진 부부관계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관곕니다. 그래서 질투라는 것이라도 부부관계에서는 선하게 받아 들이는 것이 관롑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그래서 부인이 질투한다. 그것을 성경도 죄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는 질투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너와 나의 관계는 결혼관계야.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사야서 54장5절에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또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르켜서 요한복음 4:29절에 신부를 취하는 아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가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신명기 7:7-8절 같은데 보면 [나는 너만 사랑해!] 어떻습니까 연인들끼리 속삭이는 말 같지 않아요. 또 신약에 가면 [악한 자가 너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겠다] 아예 접근하지도 못하게 하는 관심!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이야지기요.

따라서 하나님에게 있어서 질투라는 것은 결국 칼빈이 말한 것처럼. 자기 것을 지키려는 강한 의집니다.
신부된 우리를 지키려고 하는 하나님 자신의 강한 표현입니다. 사랑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강한 결의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마음 속에 잘 담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언약의 관곕니다.
그저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 오냐! 하고 받으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사랑의 관곕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둘 중의 하나가 그 사랑을 배신하든지, 그 사랑을 떠나면 질투할 수 밖에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곕니다. 이 배경을 우리가 잘 이해 하시고 이 말씀을 이해해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질투로 표현하는 부분이 세곳 나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보고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경고 할 때.

오늘 말씀도 그렇지요.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 여러곳 나옵니다. 우상숭배를 경고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다가 다른 신을 앉혀 놓고 섬기는 것이지요. 또 그렇지는 않더라도 하나님과 다른 존재를 나란히 놓고 섬기는 것이니까 호세아 10장에 말씀한 대로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우상숭뱁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굉장히 싫어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 하는 죄가 우상숭뱁니다. 두 마음을 품는 생활! 따라서 우리 신교에서는 우상의 요소가 되는 것은 일체 금지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십자가를 세워 놓는 것까지도 금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두번째로 보면 절대로 너희를 위하여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리아 상을 다 깨트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지팡이니, 이상한 막대기니 다 버려야 합니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위해서 순교를 한 사람이라할지라도 그 사람의 관에다가 입을 맞출 필요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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