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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루마리를 먹으라 (겔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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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은 그발강 가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4개의 얼굴을 가진 생물(사람, 사자, 소, 독수리) 눈이 가득한 4개의 바퀴, 생물 위의 수정 같이 맑은 궁창, 궁창 위에 남보석 보좌, 보좌 위에 앉으신 인자 같은 이, 사면으로 비추는 불 같은 광채와 무지개,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 앞에 죽은 것 같이 엎드러졌습니다.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인자야 일어나라 내가 네게 줄 말이 있다.”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반역하는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보내노라”, “그들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손들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을 전하라”, “너는 먼저 내게로 와서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에스겔이 보니 한 손이 그에게로 펴지고 손 위에는 두루마리 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펼쳐진 두루마리 책에는 안팎에 글이 쓰였는데 이 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의 입에 달기가 꿀 같았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환상입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그들은 노예였습니다. 이름만 노예일 뿐 아무 것도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밸론에서 주거의 자유를 보장받았습니다. “델아빕” 언덕과 “그발강 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신앙의 자유와 정치의 자유도 허용되었습니다. 사로잡혀온 여호야긴 왕은 신변의 안전과 재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백성 중에는 장로들이 있어 자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사는 없었으나 율법을 가르치고 할례를 행하며 안식일에 회집이 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가 있는 동안이 바벨론 왕국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구가하고 예술을 숭상했습니다. 포로민 중에 영특한 인재는 뽑아 궁중에서 학문을 연마케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 실례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지자 물산이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금은, 보석, 세마포, 자주옷감, 비단상아, 기명, 계피, 향과 향료,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 밀과 소와 말과 선척타고 무역하는 상인들, 상품들-노예생활을 해도 짐을 질 때만 고단했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았습니다. 한 해 두 해 지나는 동안에 고국도 잊게 되었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아버지가 죽고 2세, 3세가 태어남에 따라 그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코 남의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일은 죽도록 했으나 자기 일이 아니였습니다. 힘은 있는대로 다 쏟았으나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싫컨 먹고 잘 자유는 있었습니다. 결국 그물은 살진 노예였습니다. 무엇이 노예생활입니까 노예는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정당하고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자기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노예생활입니다. 우리는 현대사회 속에서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노예로 부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노예, 물질의 노예, 기계의 노예, 조직의 노예, 제도의 노예가 되어 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내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현대 문명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노예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노예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배만 불리고 살만 찌우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탄식 하면서 에스겔 선지를 불러 세웠습니다. “인자야, 너는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그리고 가서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고하라.”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는 애가와 재앙의 두루마리였습니다.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두루마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먹는다는 말은 음식을 먹듯이 마음에 받아들여 영혼의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선지자의 손을 통해 기록된 두루마리는 Good News라기 보다 Big News입니다. 위급한순간에 울리는 경종, 경고, 책망과 견책의 두루마리가 선지자의 두루마리입니다. 스가랴는 날라 가는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지면에 임할 저주의 선포였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이편 글대로 심판을 받고 거짓 맹세하는 자들은 저편 글대로 정죄를 받으리라. 예레미야도 두루마리를 남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들은 서기관과 방백들은 서로 놀라 마주보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속히 임한다는 경고입니다. 에스겔이 본 두루마리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두루마리였습니다. 여기 슬픈 노래 비가는 마지막 운명이 결정된 자의 비통의 눈물은 아닙니다. 이 애가와 재앙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하여 발하신 경고의 말씀에 “화로다 바리새인이여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는 그 화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곧 사전에 경계하고 회개를 독촉하는 말입니다. 본문을 깨닫고 사명을 완수하라는 말입니다. 두루마리를 먹지는 않고 불사라 버린 왕이 있었습니다. 유대 말년의 여호야김 왕이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왕에게 읽혀주는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한장씩 칼로 베어 겨울 화롯불에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는 3년만에 느부갓네살에게 쫓겨나고 그의 나라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살라 버렸기 때문에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은 70년 포로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두루마리가 불살라 버렸기 때문에 에스겔이 애곡의 두루마리를 먹어야 했습니다.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사로 잡혀온 동족을 향하여 외친 애가는 겨레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백성들은 통회 자복하고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과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때부터 어떻게 살며 무엇을 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70년이 지나고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꿈에도 그리 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날 때는 한 민족이었는데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들은 두 민족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남아 있는 자들과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측으로는 바벨론에 잡혀 간 사람들이 우상과 물질주의에 물들었을성 싶은 데 그 반대였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고스란히 신앙의 정조를 지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단일민족으로서 돌아왔고, 고국에 남아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잡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무너진 저속한 백성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지, 바벨론에 포로로 갔던 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 땅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가 그 땅에 선지자의 소리가 들리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하여 선포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선지자의 소리가 크게 들리면 포로자에서도 선민이 나고 선지자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제 나라 제 땅 안에서 망국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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