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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 (창 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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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서적들은 역사적 인물을 기록할 때 비교적 그 사람의 장점을 기록하고 단점이나 수치스러운 일은 기록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는 아브라함의 끔찍한 실수, 그 수치스러운 허물을 여지없이 파헤쳐서 후대 사람들을 위하여 경계와 교훈을 삼게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실수와 허물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연단해서 마침내 위대한 신앙 위인이 되게 하셨으니, 아무리 허물이 많은 우리들이라도 아브라함과 같이 신앙의 위인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1. 아브라함의 나그네 길에 평탄한 길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창 12:10에 “그 땅에 기근이 있음으로”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을 떠날 때에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자 풍년은 고사하고 기근부터 밀어 닥쳤던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만하고 농락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의중을 다 측량하리요. 하나님은 종종 이와 같이 사람의 계산법에 맞지 않은 비상수단을 쓰십니다.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시험은 유혹을 동반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통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원수 아말렉이 쳐들어 왔습니다(출 17:1-8). 기갈도 해결 못하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 판에 적의 침입을 당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마 4:20에 40일 금식기도하신 후에 마귀가 와서 시장하신 주께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성도들이 나아가는 길에는 이같이 이중시험이 언제나 밀어닥칩니다. 병들어 신음하는데 직장마저 쫓겨나고, 사업 실패로 허덕이는데 우정의 배신까지 당하는 눈물겨운 일이 언제나 뒤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은 마침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기근을 말없이 감수하면서 해결책까지도 하나님에게 구했어야만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춘추, 우기 두 차례만 비가 내리는데 5월에서 9월까지는 건조기로써 그 지역에는 물이 마르고 초장도 말라버립니다. 이와는 반대로 애굽은 대륙 끝에서 삼각지로 뻗어 흐르는 나일강 하구에 옥야천리가 펼쳐져 있어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강수로 인해 세계 곡창지였습니다. 그 이웃 나라들이 흉년들 때마다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내려간 것과도 같이 사방에서 양식을 사러, 또는 흉년살이를 하려고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애굽은 과연 살기 좋은 곳입니다. 신비롭고 경이적인 딴 세계입니다. 저바울이 죄 없는 죄수가 되어 로마로 호송되던 그 큰 배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곡식을 싣고 로마 시장으로 가던 그 배가 아닙니까? 그러나 애굽은 성경에서 자주 비유적 언사로도 사용하였습니다.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세상과 짝하는 불신앙이요, 속화 타락을 의미합니다. 사 31:1에 “말을 의지하고 병거와 마병의 강함을 의지하고 구하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는 화있을진저 이는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대개 애굽은 세상으로 비유했습니다. 애굽과 짝하는 것은 세상과 연합하는 것으로 정죄해 왔습니다. 그러나 유대 역사 애굽으로 잠시 피난가라는 명도 있었습니다. 창 46:3-4에 야곱이 애굽으로 이민가는 것을 꺼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야곱은 그의 신앙이 연단에 연단을 통하여 높은 차원에 달했고 성결의 수준은 높았던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가도 속화 타락하지 않기 때문입 니다. 다음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와 예물을 드리고 자기 고국으로 떠난 후에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하라는 지시를 받고 애굽으로 갔지만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받아 아무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아브라함은 아무런 지식도 없는 글도 불구하고 경거망동했습니다. 그가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애굽을 정화하려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거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과는 상의도 없이 기근으로 인한 일시적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천박한 자기 판단으로 경솔히 애굽으로 내려간고로 그는 치명적인 범죄를 하게 된 것입니다.

3. 신앙을 잃어버리고 비겁해지고 법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국경선 가까이 이르렀을 때 큰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애굽인들은 아름다운 부인을 보면 그 남편을 살해하고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취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은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크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사라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제의했습니다. 창 12:11-13에 “그대는 아릿다운 여인이라 내 아내라 하면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처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당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가난을 면하고 네 생명의 위험을 피하는 길이라 하여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아내를 남의 손에 넘기려는 아브라함의 의도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창 12:7)의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창 20:12에 보면 사라는 사실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말은 반 진실, 반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그 누이가 현재 자기 아내라는 것을 숨겼으니 그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어두움에 빠졌던 것입니다 차라리 이 때 아브라함은 애굽 왕 앞에서 사라는 자기 아내이므로 양도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죽으면 그의 명예는 하늘나라에도 빛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러하질 못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래의 예측대로 우선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 갔습니다. 사래는 바로의 궁으로 불리워가고 그 덕분으로 아브라함은 양과 소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의 소득의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만 것입니다. 가정은 파괴되고 산단는 것이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애굽에서 부유하게 사느니 차라리 가나안에서 굶주리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복이었습니다. 사탄의 방석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고생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에서 사라를 구원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다시 약속의 말씀을 기억케 하신 것입니다.

 4. 용서하시는 하나님

 창 12:17에 “여호와께서 사라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로가 사라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손을 썼습니다. 꿈으로 계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릴 때는 우박이나 홍수로, 또는 한재, 온역으로 내리셨습니다. 여기서는 아마 온역을 내리신 듯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는 바로는 아브라함을 둘러 창 12:18-19에 “네가 어찌하여 네 아내라고 고하지 아니하였느뇨 네가 어찌 누이라하여 나로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고 크게 책망하며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데려가라” 하고 사라를 내주었습니다. 바로가 보복하지 않은것만 생각해도 다행한 일입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하나님의 보호로 기적적으로 살아 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끄러운 실패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였습니다. 벌받은 바로는 아브라함을 후대하게 대접하여 호위대와 재산까지 붙여서 그 나라를 떠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시는 은혜였습니다. 이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체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등도 똑같이 경험한 사실이었옵니다. 하나님은 실수와 죄악을 징벌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회개시켜 끝까지 일으켜 세우고 건설하시는 의지를 가진 신임을 아브라함은 뼈저리게 체험한 것입니다. 시몬 케델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의 어릴 때 경험담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한 한번은 이웃집 배나무에서 배를 훔쳐 땄습니다. 그 이튿날 이웃집 할머니가 소년을 방문하여 큼직한 배 하나를 손에 들려주고 들고온 장미꽃으로 부드럽게 소년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는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맞은 매가 아니었으나 장미꽃으로 맞은 소년의 뺨은 부끄럼으로 빨개졌으며 그는 울면서 말없이 할머니의 가슴 속에 안겼다는 얘기입니다. 이와 같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아브라함에게도 장미꽃으로 뺨을 두둘기는 사랑의 형태로 체험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실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 “진실과 정직만이 축복의 비결이라”는 교훈을 되뇌이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되돌아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우리의 실수와 죄악을 탓하기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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