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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속죄일과 초막절 (민 29: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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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한 인류는 자기 마음을 괴롭게 함이 필요합니다. 참된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괴롭게 하여 반성케 하며 회개케 하기 위한 절기의 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당한 고난을 기념 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7월 15일부터 7일 동안인데 이렇게 여러 날 그 행사를 가지게 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 때는 추수를 마친 기쁜 시기입니다. 기쁜 때에 옛날의 고난을 회고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레 23:42-43). 그 이유는 기쁨은 고난을 통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절기는 감사절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절기에 가장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됨은 이 때문입니다. 1. 속죄일 (7-11절) 7절에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날은 속죄일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백성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와서 죄의 용서를 간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들의 죄악들을 고백했었습니다. 즉 자기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로써 금식을 하도록 했었습니다. 희생제사에 있어서는 단지 한 마리의 수소만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물들은 이전과 동일하며 단지 하나의 예외가 있을 뿐입니다. 즉 스스로 괴롭게 하는 규례에 따라 수염소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화목제를 드리도록 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자기들이 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자기들의 양심에 무거운 고통을 느끼게 되어 오로지 하나님께 대하여 화목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희생제사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이 절기의 특징은 하나님 백성이 마음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곧 각각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의미로 신령한 근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회로 모이는 것과 노동을 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마음을 괴롭힘으로 죄를 없이 할 수는 없으나 죄를 사랑하는 마음은 중단시킵니다. 죄를 사랑하지 않을 때 회개가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통회할 때에 결단코 외식으로 하지 않아야 됩니다. 욜 2:13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며 우는 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 약 4:9-10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울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죄를 회개할지라도 속죄의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사죄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속죄일에는 속죄자 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생축의 제물을 많이 바쳤습니다. 여기 기록된 번제물, 소제물 또는 속죄제물 등이 모두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겸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시 바침이 될 것을 예표합니다. 번제는 생명을 바치고 있는 것이고, 소제는 생활과 노력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죄제는 그렇게 바치는 신자가 여전히 자기에게는 죄와 허물이 있는 고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계속적으로 힘입기 위함인 제사입니다. 속죄제물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2. 초막절(12-40절) 속죄일 즉 사람들이 자기의 영혼을 괴롭게 해야 했던 날 직후에 초막절이 뒤따랐는데 그 때에는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기뻐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눈물로 뿌린 자들은” 곧 “기쁨으로 거둘”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절기에 대한 율법은 레 23:3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제에 관한 지시가 부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화제를 7일 동안에 여호와께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1) 그들이 기뻐하는 날은 제물을 드리는 날이어야 했습니다. (2) 그들은 초막에 거행할 동안 계속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 장막 상태에 있는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를 꾸준히 지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권익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3) 7일 중 날마다 바쳐지는 제물은 수송아지의 따로 따로 그리고 낱낱이 지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반복해 놓은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처럼 그들에게 이 의식을 매우 정확히 준수하고 날마다의 일 속에서의 그 법령을 믿음의 눈으로 항시 주목할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4) 수송아지의 수는 날마다 감소되었습니다. 그 명절의 첫 날에 그들은 열 세마리를 바쳐야 했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비록 그것이 명절의 큰 날 이었고 성회로 송축되었을지라도 그들은 수송아지 하나만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날에는 모두 수양 둘과 어린 양 열 넷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비록 그것이 명절의 큰 날이었고, 성회로 송축되었을지라도 그들은 수송아지 하나만을 드려야 했습니다. 다른 날에는 모두 수양 둘과 어린 양 열 넷을 드려야 했지만 이 날에는 수양 하나와 어린 양 일곱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 입법자의 뜻이었습니다. (5) 소제와 전제는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드린 모든 제물에 부속되었습니다. 아무리 고기가 많을지라도 떡과 마실 것이 없는 식탁은 잔치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식탁에는 이런 것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6) 우리가 다른 명절을 자킬 때처럼 날마다 속죄제가 드려져야만 했습니다. (7) 상번제가 아침이나 저녁에 빠져서는 안 되며 날마다 이것이 아침 에 제일 먼저 그리고 저녁에 마지막으로 바쳐져야만 했습니다. (8) 자원제와 서원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 23:40에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름다운 나무실과와 종려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여호와‥‥‥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속이 완성된 내세의 새 땅에서 평화와 즐거움으로 사는 승리한 교회의 행복을 말해줍니다. 장막절은 감사절인 만큼 감사행위가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감사로만 충만한 내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감사를 풍성히 합시다. 장막절은 추수감사절과 같습니다. 신 16:16-17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차례씩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내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즉 장막절에 감사해야 될 것이 교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감사를 풍성히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감사조건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신다면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공중에 떠다니는 한 개의 먼지보다 더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121:2-3에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 소이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 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옛날 어떤 청교도 한 사람이 자기 아들과 함께 각각 말을 타고 서로 다른 방면으로 갔습니다. 그 아들은 그 날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알았습니다. 저녁때에 그가 아버지를 만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감사하는 말을 듣고 대답하기를 “나는 말을 타고 다니지만 이때까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으니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참된 감사인 줄 압니다. (3) 하나님께서 깊은 은혜를 주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실감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한 은혜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도 은혜 되게 하십니다. 롬 8:28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애기가 어머니의 보는 세상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은혜들을 다 느끼지 못합니다. (4) 범사에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고로 감사해야 합니다. 난관과 역경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를 찾아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는 마땅히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도록 힘써야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또 다시 은혜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욕심이 너무 많아서 받은 바 은혜를 생각지 않은 것이 유감입니다. 메튜 헨리 목사는 한 번은 강도에게 돈지갑을 빼앗겼습니다. 그 때에 그 는 말하기를 “나는 남의 것을 도적하지 않았으니 감사하다”고 했다 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 표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주님께 찬송할 기회가 되었으니 감사해야 되고, 괴로운 일을 당했으면 하나님께 기도할 기회가 되었으니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올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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