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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산상의 체험 (막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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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 복음에는 모두 변화산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주 간단한 말로 그 때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벧전 1:16-18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한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식은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 가운데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싫은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사귈 때 얻은 경험들을 비록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변화산의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일절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도 제자들이 아무리 친히 본 그대로를 말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로 듣지 않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인 줄 압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여기 세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수석을 차지한 사람들이요, 때문에 중요한 기회에는 예수님과 동행할 특권을 부여받았던 이들입니다. 예수께서 요란한 거리를 피하고 고요한 산에 오르신 것은 장차 임박할 고난을 대비하여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그 얼굴과 의복이 변하여 장엄한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더불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기도가 깊은 데 들어가면 그 사람의 얼굴이 변화하는 경험을 합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그 생활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모세를 보건대 시내산에서 사십 일을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한 후에 그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물론 정도는 다르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사람은 그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산상변화의 역사 후 엘리야와 모세는 떠나려 했는데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나 엉겁결에 말하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고 했습니다. 이 베드로의 말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성품을 알 것 같습니다. 전후를 가리지 않고 생각된 바를 그대로 표현하는 열정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할 때 구름이 저를 덮으며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표징합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구름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때에 하늘로부터 들리던 음성이었습니다. 평지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변화산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서 아들 예수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 모든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알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분명히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왜 나타났겠습니까?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과 복음의 대화를 의미한 줄 압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자로 나타났고 예수님은 복음의 대표자이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수난은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대로 이루어진 것이요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님을 믿는 자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나 엘리야보다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습니다. 여러분! 가령 낮에 햇빛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다른 것을 바라본다면 다른 것이 보입니까? 마찬가지로 빛 되시는 하나님을 쳐다보는 사람은 세상의 귀하다고 하는 것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과 가까이 하라는 것은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신자가 하늘나라에 간 것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좋아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자기를 오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더니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무엇을 좀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더랍니다. 그 사람을 따라 갔더니 어떤 곳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세요” 그리고 한참 후에 “무엇을 보았습니까?” 묻길래 “캄캄한 세상만 보일 뿐입니다” 그랬더니 안내하는 사람이 “아 그래요. 그러면 다시 한번 더 자세히 살펴보시지요” 그래서 다시 자세히 보니 캄캄한 밤중에 많은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면서 피난하는 길을 찾느라고 야단을 하더랍니다. 그때 그 신자를 안내하던 안내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그래도 여기 그냥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아래 내려가서 캄캄한 중에 헤매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 신자는 사실 과거에는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일할 의욕이 식어져가고 있던 참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험 때문에 낙망한 것처럼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죽으려고까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죽지 않겠다. 살아서 일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변화 산상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거기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산 아래 일터에서 죽을 영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더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언제나 병행해야 건전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자칫하면 변화산상의 신령한 체험도 없이 빈 껍질로 일을 해보려고 덤벼드는 무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의 유행에 따른 운동들이 그처럼 무의미한 때가 바로 이러한 이유를 포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기도의 생활로 변화산상의 신령한 체험을 가져야 할 것이고, 또 거기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산 아래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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