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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의 율법 (약 0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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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한 자의 부요함과 부한 자의 빈곤함 5-7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사람 보기에는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으로 부한 자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6-29에서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를 택하시어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고래로 하나님의 유력한 성도들은 가난하고 핍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가난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벌써 받아 가지고 있는 천국 보화가 너무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최초의 설교가 눅 4:18의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산상보훈의 첫 축복이 마 5:3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복음 선포의 주요 대상이 바로 가난한 자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 사람의 대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이 말씀 한마디로 주님이 얼마나 가난한 생활을 하셨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고 과부의 연보를 축복해 주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다가 가난한 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하였으니 세리 마태를 제외한 열한제자들 역시 갈릴리의 무산대중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은 부요한 자들이 아니라 거의 무산대중이 아니면 노예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보면 지도자들은 거의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장막을 지으면서 세계 전도한 사도바울, 성 안토니, 성 베네딕드, 성 프랜시스 등 모두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종교개혁자 루터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가난한 사람으로 시작하고 가난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의 역사를 이어왔고 자라왔으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5절의 본문 말씀처럼 믿음을 풍성케 하십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통하여 사랑이 풍성케 하고 기쁨의 은혜를 풍성케 하시고 전도에 열심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가난한 자를 기억하십니다. 생활이 좀 어렵다 하더라도 조금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며 더 가까이 해주십니다.

2.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8-9절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이유는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에서 여기 최고의 법이란 헬라 원어로 “노모스 바실리코스”로써 왕적 율법이라고 지적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주께서 가르쳐 주신 황금률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명령 “이웃을 사랑하라”를 고귀한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이 위대한 명령이 바로 모든 율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어느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성취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 성취된다. 그 사람의 수명은 연장되며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안식일은 어느 계명보다 중하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율법 전체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작은 계명을 지켜서 받는 축복이 클진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최고 법을 지킨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3. 자유의 율법 10-12절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였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의 조문을 지켰다고 해도 율법을 지켰다는 성적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런 율법관은 하나님의 법을 하나의 외부적 행동 관계의 법규집으로만 여기는 착오입니다. 기독교의 율법관은 율법을 자유의 율법으로 봄이니 그 실행은 사랑의 정신으로만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조문의 외부적인 실행 여부로 판단 받는 것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어느 정도의 사랑에 들어갔느냐 하는 점에서 판단 받아야 합니다. 자유의 율법은 정죄에서 해방해 주는 신약의 복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정죄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새 율법 곧 생명의 율법 아래 있습니다. “자유의 율법에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에서 자유의 율법이란 구약에 대한 신약, 모세의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율법에 비취어 말하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은 새로운 표준이 된 자유의 율법에 비취어 말합니다. 사람을 정죄하고 억압하는 모세의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율법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새로운 의무를 동반합니다. 긍휼을 통해 구원 받았음으로 그와 같이 긍휼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억압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하기를 요구하는 의무인 것입니다.

4. 긍휼의 생활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긍휼이 없는 것은 신앙이 없는 증거니 신앙이 없는 자는 정죄의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긍휼이란 말은 하나님의 긍휼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긍휼을 보여주는 자만이 긍휼을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마 5:7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용서할줄 모르는 종에게 내린 징계에 대하여 말씀하시었습니다. 그의 일생의 교훈은 긍휼을 베푸는 자가 긍휼을 얻게 될 것이라는 데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심에 비한다면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긍휼히 여기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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