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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맹세하지 말라 (약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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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
12절에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한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이 말씀은 산상 보훈의 주님의 말씀과 흡사합니다. 마 5:33-37에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세란 예부터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있었으나 유대인에게서는 심하였습니다. 구약에서도 맹세 자체는 허용했으나 거짓맹세는 금하였습니다. 민 30:2의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거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할 것이나 신 23:2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죄라”한 것이 그것 입니다. 유대인들은 맹세를 하되 대상에 따라 등급을 정했고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저버려도 좋다(마 23:16-18)고 생각했습니다. 맹세란 진실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이고 맹세 자체가 허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훈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전능자가 아니기 매문에 맹세를 지킬 능력이 없고, 인간은 연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맹세의 대상도 정할 수 없습니다. 즉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요 자신의 머리는 스스로 검게도 희게도 못하기 때문에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이유 없이 무분별하게 맹세하는 것은 공통된 죄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큰 죄악으로 생각하나 하나님의 이름을 인용하는 것은 큰 죄악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여 맹세로 자기기만을 채웠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면서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계명 중 삼 계명에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6:13의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이나 레 19:12의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기록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함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한 중대한 사건에 국한되어야 함을 제한한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하찮은 일에도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사소한 문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맹세는 지극히 엄숙한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는 약속입니다. 구약에서 몇 가지 하나님 면전에서 맹세함을 볼 수 있습니다.

(1) 창세기 23장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처를 구하기 위해 그 종 엘리에셀을 보면서 가나안 땅 여인이 아닌 고향의 친지 중에서 여인을 구해 줄 것을 맹세시켰습니다.

(2) 창세기 47장에 야곱은 요셉에게 11형제들의 안정을 맹세시켰습니다.

(3) 창세기 50장에 요셉은 그 형제 자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 년 후 고향 가나안에 돌아갈 때 자기의 유해를 가지고 이장시켜 줄 것을 맹세케 했습니다.

(4) 사무엘하 20장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후에 다윗이 왕이 되거든 자기의 혈족을 지켜줄 것을 맹세케 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 하나님 면전에서 엄숙히 맹세했고 그 맹세를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약하기에 사소한 일에까지 사람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루지 못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이를 금하신 것입니다.

2.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라 12절 하반에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한 것은 아니라 하며 죄 정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 5:37에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게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한 말씀과 유사합니다. 본문은 소극적으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고 적극적으로는 “그렇다, 아니라”를 사실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즉 진실 하라는 말입니다. 진실한 자에게 맹세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옳은 것을 아니라, 아닌 것을 옳다” 하는 것이 다 죄악이요 위선인 입니다. 유대 사회의 랍비들의 교훈에도 “너는 맹세하는 습성을 가지지 말라 이르든 늦든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진리의 정당성을 위해서도 맹세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은 맹세로 인하여 무가치하게 될 것이고 너희 이웃을 속이게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말이 정직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런 맹세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신뢰성 결여, 모순, 타락이 맹세의 습성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됩니다. 질병의 제거도 그 원인부터 제거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말이 옳으면 옳다. 그르면 그르다는 진실성이 일관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맹세를 말라는 교훈은 법정에서 서약하는 것이나 결혼식에서의 서약에는 저촉되지 아니할 것이나 요는 마음의 허위를 맹세로 가리 우는 잘못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에 있어서 진실로 일관된다면 무모한 맹세의 원인인 핑계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엣세네파는 맹세를 일체 금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일 다근 사람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하면서 맹세하기를 요구해 온다면 자기는 벌써 신뢰할 가치가 없다고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며 이미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어떤 최선의 보증은 맹세가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인격인 것입니다. 야고보의 견해는 모든 말은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말은 진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거짓과 타락의 인간으로 전락해 가는 것을 볼 때 슬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세상에선 맹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우리는 맹세 이상의 진실 된 삶을 살아서 우리의 인격이 보증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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