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눅 10:25-37)

첨부 1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큐티를 하면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고,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면 감사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에게 감사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우리의 생각과 삶 속에 있는 율법주의의 잔재 때문에 알게 모르게 복음의 능력이 제한을 받고, 은혜의 풍성함이 눌립니다. 여러분, 은혜로 살면 율법을 무시해도 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온 것이다”(마 5:17-18)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의 요구보다 더 완전하고 더 거룩하고 더 영원한 곳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더 완전한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행함을 요구하는 믿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한 율법학자가 일어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앉혀놓고 가르치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이 마을이 그 중간 쯤 되는 곳이라면 이곳에는 유대인의 고급관리나 대제사장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학자는 이 마을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예전에 ‘나를 믿고 따라야 영생을 얻는다’(요 5:39-40)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되레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율법학자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눅 10:27)이 율법학자는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십계명 중 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한 말씀이 신명기 6장 5절입니다. 그리고 5-10계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한 말씀이 레위기 19장 17-18절입니다. 이 말씀을 율법학자가 잘 정리해 대답한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도 인정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살 것이다.”(눅 10:28)율법학자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덧붙인 말씀은 한 가지입니다. ‘그대로 행하면’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에 이르는 믿음은 행함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사람을 옭아매서 사망으로 이끄는 율법주의도 무섭지만, 믿음의 행위를 무시하는 것도 무서운 일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비유 율법학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보이려고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눅 10:29) 이 사람은 자신을 예수님에게 공증받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십니다.우리가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강도만난 사람은 유대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의 골이 깊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고,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바치는 성전세와 헌물 때문이었습니다. 이 싸움이 심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차별주의가 만연했습니다. 사람을 죽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형벌이 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면 그것을 그냥 보고 지나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에 여리고는 사제들이 많이 살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해발 500미터 정도 차이가 나는데, 이곳을 연결하는 길은 30킬로미터 정도 되는 매우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양쪽에 동굴이 많이 있는 지역은 도둑과 산적들이 은신하는 곳으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강도를 만나는 일은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거의 유대인인 청중들은 권위의식과 특권의식이 있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쁜 역할로 나오는 것을 속으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좋은 역할로 등장할 자신들(유대인)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마리아인이 등장해 강도 만난 자를 그냥 돌봐준 것이 아니라 여관에 머물며 잘 돌보아 준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떠날 때 돈을 주면서 잘 돌봐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비록 비유지만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라고 물으십니다.(눅 10:36) 내 중심의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율법학자가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여라.”(눅 10:37)여기 등장하는 ‘자비’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중심성품을 말하는데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번역할 때 90% 이상 ‘love’로 번역되었습니다. 특별히 ‘실패하지 않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unfailing love)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비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성품입니다.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기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기한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내 생각, 내 견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이웃으로 선택합니다. 당연히 이웃 사랑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이웃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필요에 맞는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수치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분은 죽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할 수 있는 자비가 한 가지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 재정이 어려운 사람은 우리가 끝까지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강도당한 사람은 우리가 끝까지 도울 수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영혼을 강도당한 사람입니다. 이들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끝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십니다. 누구나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에게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율법주의의 한계를 깨는 길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갈등의 벽을 넘어서십시오. 편견의 벽을 넘어서십시오. 복음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십시오.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