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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 속에서도 주만 바라보는 사람 (시 3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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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서도 주만 바라보는 사람(시편31:9-24)오늘 저희들에게 주신 말씀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상처를 입은 독수리들이 깊은 산 계곡에 모여 앉아서 각기 상처받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날은 것을 배우다가 나무에 찍혀 상처를 입고 그때부터 나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사랑하는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나는 내 선배 독한 독수리에게 할킴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다." 이런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론은 "이렇게 상처입고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우리 집단으로 자살해서 죽자." 하고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높은 벼랑 위에 독수리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날라 왔습니다. 그 독수리의 이름은 영웅 독수리였습니다. 내려와서 앉더니 그 큰 날개를 다 펴면서 "나를 보아라. 너희들이 보기에 아무런 상처가 없고 영광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아라. 내 몸에는 상처투성이다." 그러면서 깃털 속에 감추어진 상처를 다 보여주었습니다. 큰 자국이 있는 이 자국은 내가 처음에 날개를 배울 때 솔밭가지에 찍히는 상처다. 이것은 동료들끼리 싸우면서 입은 상처다. 너희들이 말하는 대로 독한 선배에게 할킨 상처는 이것이다. 마지막에는 영웅 독수리가 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입은 상처가 이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내 마음속에 입은 상처는 더 많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세상에 상처 없는 새는 한 마리도 없다. 만약에 상처 입지 않은 새가 있다면 태어나서 날은 연습도 해보지 않고 죽는 새였을 것이다. 날개를 펴라 우리 한번 날아보자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상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상처 입은 것은 크게 생각하는데 내가 상처 주는 것은 생각을 잘 못해요.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태어난 지 7개월밖에 안된 어린 꼬마의 이마를 보니까 온통 머리에 푸른 멍이 들어 있어요. 제가 깜짝 놀라 가지고 "왜 이렇느냐고?"했더니 엄마가 하는 이야기가 "지금 한참 기는 연습을 하는데 신이 나가지고 한참 기어가다가 여기서 박고 저기서 박아 가지고 멍이 들었다"는 것입니다.여러분, 그렇습니다. 인생은 상처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상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 상처를 어떻게 대처해나가는 태도가 어떤가, 이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봉독한 말씀 가운데 우리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은 또 한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근심으로 마음의 상처로 눈과 혼과 몸이 다 기력이 쇠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눈뜰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 재기할 기력도 없다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너무 큰 상처와 고통 때문입니다.한 주전에 심방을 하면서 노 여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오직 아들 하나를 보고 지금까지 살아오셨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IMF 때문에 부도가 나가지고 어디에 있는 줄을 모르고 그저 보고싶으면 잠깐 와서 가는 것이지 어디에 있다는 말도 안 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속상해서 눈을 감으면 뜰 기력도 없대요. 앉으면 눈이 자동으로 감긴답니다.. "목사님 죄송해요. 예배 드릴 때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제가 눈을 감지만 자는 게 아니에요. 목사님 설교를 다 듣고 있지만 앉아있으면 눈을 뜰 기력이 없어요." 정말 그렇습니다. 속 상하면 눈이 감겨져요. 뜰 마음이 없어져요. 10절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여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내가 왜 고통스러운가? 고민을 많이 했겠지요.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나의 죄악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잘 보세요. 이분은 자기 죄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물론 자기도 죄인이지요. 그러나 그 다음에 문장으로 자기 죄를 심각하니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무슨 뜻인고 하니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그래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고 산다는 겁니다. 폭넓은 개념으로 죄악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너무 쉽게 답을 주어요. 당신이 이러 이러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그러시지를 말라는 겁니다. 세상에는 의로운 사람도 고통을 당하고 악한 사람도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개인의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경솔하게 그렇게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고통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고통의 원인을 가르쳐주신다는 거예요. 본인에게, 아니면 제일 그분을 잘 알고있는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왜 고통을 당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11절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모든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누가 더 큰 상처를 줍니까? 가까운 이웃에게는 더 큰 상처를 당한다 이겁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심히 부담스럽게 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사랑하는 자식입니까? 부모입니까? 아니면 월광에 나와서 같이 예배하고 같이 섬기는 신앙의 동료입니까? 직장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 밑에 있는 사람입니까? 그분을 떠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서로간에 불가피하게 피할 수 없으면서 같이 고통을 주는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를 몰라요. 이웃간에는 이사를 가면 돼요. 그러나 가족은 헤어질 수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야 되는데 그런 관계 속에서 입은 상처라는 것은 너무너무 고통스럽지요. 그리고 내가 한참 잘 나갈 때는 찾아오는 사람은 많고, 아부하는 사람도 많고,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정작 내가 어려우니까 모든 사람이 나를 피하고 모른척하더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가까이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봐, 모른 척 하는 거예요. 여러분, 민심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지만 여론이라는 것은 정직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바르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여론을 위해서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의지가 좌우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세상 인심은 참 무섭고 두려워요.12절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라"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죽으면 그가 썼던 모든 물건을 버리고 겨우 사진 한 장을 남겨놓습니다. 얼마 전 사진까지 치워요. 나쁜 뜻은 아니지만 그분을 생각하고 자취가 나면 막 지우려고 애를 씁니다. 사랑하는 가족일수록 지우려고 애를 써요. 지워지지 않을 때 괴로운게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파기'라고 하는 말은 깨진 그릇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깨진 그릇은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잊어버려요. 여러분, 세상 사람에게는 건망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도 잘 잊어버리지만 우리는 특별히 사람도 잘 잊어버려요. 그게 문제예요. 사람이 불행한 것은 누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누가 나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잊어버렸을 때 그게 참 슬픈 거예요. 더 큰 것은 내가 분명히 옆에 있는데도 마치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해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합니까, 내가 있는데도 자존심상한 인신공격을 하면 그것처럼 아픈 상처가 없다는 겁니다. 세상은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아픔의 경우를 당해본 적이 있으시죠. 13절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사람들이 모였다하면 나를 입방아를 찧습니다. 나쁜 놈이라든지, 사기꾼이라든지, 인격이 안되었다든지, 정직하지 못하다든지, 그러면서 언제나 결론은 그 사람은 망해야 되고, 그 사람은 죽어야 되고, 그 사람은 없어져야 된다든지 음모를 꾀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사람은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나를 괴롭힌 사람을 좀 지옥으로 보내주시고 입을 다물게 해주십시오. 18절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여러분, 목사에게도 상처가 많아요. 목사에게 상처가 없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세상에서 경쟁 속에 사는 사람은 얼마나 상처가 많을까, 하는 생각이 눈물이 나올 만큼 들었어요. 요즈음에 세상에 사는 성도를 보면 제 마음속에 위대하다는 마음이 듭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저는 다 갖추어진 자리에서 언제나 살잖아요. 심방을 가도 세미나를 가도 갖추어진 상태에서 사는데 여러분은 얼마나 상처가 많겠어요. 9-13절까지는 상처를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보기보다 네가 그 상처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하는가, 우리의 태도와 자세를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태도를 보십시오. 우리의 모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4절 "여호와여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죽일 것처럼 그리하여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겠나이다.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크리스챤입니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나이다.16절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이 분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고통 중에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에 빛을 보게 하소서. 3절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주는 나의 반석이시오 주는 나의 피할 산성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어떤 고통 중에도 하나님만 의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고통 중에도 주님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그리하실지라도' 이게 성경에 독특한 문장입니다. 성경은 그리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러했고 우리가 불속에 들어갈지라도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만 믿겠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밭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리라. 여호수아가 그랬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내 뜻대로 마시고, 이 고난의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러나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내 뜻대로 마시고 바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바로 그 고백이에요.우리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어떤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그 길을 가겠다는 겁니다. 도망하고 회피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 고난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을 우리가 믿기를 바랍니다.'필립 안스, 란 분이 있습니다. 참 귀한 분인데 '삶이 고통스러울 때' 라는 조그만 책이 있어요. 고통에 관한 책인데 이분이 한때 고통스러울 때 네 가지를 가지고 고민했대요. 그것에 대한 답을 썼어요.첫 번째, 하나님은 왜 고통을 만드셨을까? 두 번째, 하나님은 과연 능력이 있으신가? 세 번째, 하나님은 과연 공평하신가?마지막에, 과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이 문제는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그 하나님이 나를 돌봐 주실까, 안 돌봐 주실까, 사랑하시는가, 사랑하지 않으신가, 이것 때문에 갈등하신 분이 참 많지요. 이분도 그랬어요. 고통을 당하게 되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6절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소서"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시인은 고통이 오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로 알고 내게 고난을 주신 것은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하나님의 얼굴을 뵙도록 이 고난을 주신 줄로 믿기 때문에 고난을 해결해달라 한 것이 아니라, 주의 얼굴에 빛을 이 종에게 비추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고난이 오면 좋은 기회로 아시고 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 겸손해질 기회가 왔구나, 철이 들 기회가 왔구나, 모든 사람을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 하고 그 고난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두 번째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우리가 고난이 올 때 고난 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보자기에 쌓아진 은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대로 해석하자면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쌓아진 보자기라는 거예요. 고난밖에 안 보이지만 그러나 그 고난 속에는 깊으신 하나님의 비밀의 의미가 있고 큰 상급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런 안목이 있어요. 20절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은밀한 곳, 비밀의 장막에 감추사"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구약에 보면 지성소입니다. 아무도 갈 수 없고 거기는 불도 켜놓을 수 없는 가장 캄캄한 곳 지성소, 성전은 불을 밝히지만 지성소에는 등대도 없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어요. 고난의 비밀 속에 고난의 감추어진 보자기 속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은밀한 곳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고난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아까 말씀을 드린 대로 '필립 안스, 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고통을 에게 주셨는지를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하였다. 놀랍게도 나는 고통이 없는 세계가 이 땅에 존재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어디일까? 나병환자들을 위한 병원이었다. 이 환자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바로 이 고통이 없으니 그들의 특이한 비극이다. 병이 번져가면서 고통신호를 전달하는 신호인 신경마비가 죽은 것이다. 사실상 희생자들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그것 때문에 신체적인 기형을 낳게 되고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어간다. 나는 나병환자를 통하여 고통이 매일매일 우리들을 섬긴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여러분, 고통이 있으므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된다는 거예요. 나병 환자들은 신경이 죽어서 고통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가고, 사는 사람은 사는 사람은 고통 때문에 살아가고, 이것을 나병환자들을 보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살면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고통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분은 계속 말하기를 "고통의 경고가 없다면 대부분 스포츠는 상당히 위험할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섹스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적인 즐거움도 대개 고통세포에 의해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다면 예술도, 문학도, 매우 함정일 것이다. 음악가, 댄서, 화가, 조각가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끓임 없이 생명의 위험가운데 있을 것이다. 맹장염, 신장마비, 골수, 종양 이런 경고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땅에서 정상적인 삶을 사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고통의 당시 우리의 삶을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수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고통은 내게 병이 왔다는 것을 예고해주는 겁니다. 고통 때문에 그 병을 빨리 발견하고 치유해서 살아요. 이런 고통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한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이 고통 때문에 인생을 좌절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신가, 까지도 우리가 의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억 할 것은 8절"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여러분, 사람은 고통만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물의 골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가니 넓은 길이 있더라는 겁니다. 고통이 지나가면 험악한 산을 올라가면 넓은 평야가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세 번째로, 21절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움이로다" 7절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고난 속에도 찬송하고 고난 속에도 감사한다는 겁니다. 이게 특기입니다. 감사하며 사십시다.우리 인간이 쓰는 말 가운데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언어가 있어요. 두 가지입니다. '사랑과 감사'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언어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랑이지요. 하나님까지 감동시키는 언어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금 불속에 들어가면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꼼짝 못해요. 성숙한 사람만이 감사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감사합니다. 지식가지고 감사한 게 아닙니다. 아는 것 가지고 감사한 게 아닙니다. 믿음 있는 사람만이 감사한 줄을 압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위대한 힘을 가졌듯이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도 역경도 환난도 죽음까지도 이기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고난 중에도 감사합니다.마지막, 23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한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니라" 24절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그 고난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지옥에 보내주시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해주세요. 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거예요. 당신도 닮으라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터득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까? 그렇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 사람에게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담대하십시오. 자기에게 다짐한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웃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을 사랑하십시오. 세상을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담대하십시오." 이렇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어떤 두 부부가 있었는데 참 서로 사랑하는 부부입니다. 아내는 전화상담실에 가서 상담하는 것이 직업이었고 남편은 군인이었습니다. 맞벌이 부부이지요.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눈이 안 좋아서 괜찮거니 했는데 계속 나빠집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 했는데 3일이면 괜찮다고 의사가 너무너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해서 수술을 했습니다. 캄캄한 안대를 끼고 3일을 기다렸습니다. 3일 후에 안대를 풀었는데 남편이 앞에 있는데 보이지를 않습니다. 일 주일이 가는데 보이지를 않습니다. 한 달이 되어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3개월을 병원에 있었지만 영영 시력은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대로 퇴원을 했습니다. 얼마나 절망스러웠겠어요. 몇 개월이 지난 후에 그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나 출근하고 싶어, 직장에 나가고 싶어" 그 말을 들은 남편이 눈물이 핑 돌만큼 고맙더래요. 왜냐하면 아내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말이 고마워서 직장에 출퇴근을 하는데 "내가 당신이 혼자 출퇴근할 때까지 바래다줄게."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차가 있음에도 함께 버스를 타고 그 회사 앞에 내리면 정문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남편이 자기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6개월을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는 아내가 "나 혼자 갈 수 있겠다고" 그래서 아내 혼자 출근을 합니다. 어느 날 여전히 이 여인이 언제나 바로 기사 뒤에 앉아 기사가 내리라고 하면 내리는데 기사가 하는 말이 "아주머니, 참 행복하시겠네요." 깜짝 놀래 가지고 "앞도 못 보는데 왜 행복 하느냐고," 오히려 되물었어요. 그때 그 기사가 하는 말이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모르시겠지만 아주머니가 저 버스에서 내려서 다 들어갈 때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 건너편에 당신의 남편이 지켜본 다음에 가십니다. 그러니 당신은 행복하지 않느냐," 충격이 되어서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물어보았어요.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데 말 한마디도 안 해주었어요. 그때 이 여인은 생각에 "나 보다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 시력을 잃어버린 다음에 남편의 깊은 사랑을 확인했어요.여러분, 하나님이 침묵하시지만, 말씀이 없으시지만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습니까? 그분은 우리보다 더 큰 고난을 겪으신 분이에요. 십자가에 달리시고,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나는 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내 가족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주님은 누구 때문입니까?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고통스러우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하실지라도 나는 주만 의뢰하고 나는 주의 얼굴을 뵙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분은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승리하실 것을 믿습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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