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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게으른 사람의 삶 (잠 26: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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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람의 삶(잠언 26:13-28)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미련한 사람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저녁 봉독한 잠언 26장 13절 이하의 말씀은 미련한 사람의 또 한가지 다른 면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리석음 때문에 게을러지듯이 또한 게으름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세요.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게으른 사람이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길과 거리를 두려워합니다. 길과 거리를 말하자면 일해야 할 장소요 가야 할 노정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수고스러운 일은 아예 피합니다.

일을 하려고 할 때 게으른 사람은 무엇부터 생각한다고요? 길에 있는 사자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세상일이나 신앙의 일이나 부지런히 일하라는 요구를 받으면 으레히 길에는 사자가 있어서 위험해서 못한다고 핑계합니다. 그런 일은 자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난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비교 22:13, 13:4, 15:19, 19:15, 20:4, 21:25-26, 24:30-34).

시편 104편 20절부터 23절까지를 보세요. 거기에 사자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를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자는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는데 게으른 사람은 거리에 사자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상적인 난관 때문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 또한 미련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11장 4절에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바람만 불면 ‘씨가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 하면서 씨를 뿌리지 아니합니다. 구름을 보면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하면서 거두지 아니합니다. 물론 파종할 때 바람이 부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추수할 때 비가 오는 것이 손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농사하는 사람이 바람 부는 것을 피하고 비오는 날을 피하고 농사하려고 하면 일할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이 디모데후서 4장 1-2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다른 번역에 보면 “말씀을 전파하는데 편리하든지 불편하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여러분이 기억하시지요?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나중에 주인이 돌아온 때에 한 말이 무엇입니까?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나이다” 했습니다. 그때 그 주인의 말이 ‘이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무슨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일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사람은 어려움의 태산이 가로막히면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힘이 들어도 이 산을 돌아가든지 넘어가든지 그것도 안되면 굴을 뚫고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가나안 땅을 앞에 놓고 두 가지 의견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나안 땅은 좋기는 한데 그 곳에 는 산이 험하고 성곽이 견고하여 거기 사는 사람들이 장대합니다. 그러니 그 땅을 점령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고 무서워서 가나안 점령을 포기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곳이 산이 험하고 성곽이 높고 견고하며 거기 사는 사람들이 장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약속하신 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그 땅을 점령할 것을 믿습니다.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못할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갑시다” 한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있는 사람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믿는 만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해가 승리하는 해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두려운 생각, 염려되는 생각일랑 아예 버리고 주님 편에 서서 힘있게 나아가세요. 반드시 여러분의 앞날에 축복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그 다음 14절 말씀을 보십시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 조금 전에 13절에서는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앞에서 두려워서 게으른 자를 보았는데 14절은 자기 안일에 빠져서 게으른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침상에서 한쪽으로 누워 있다가 그 쪽이 싫증나면 또 다른 쪽으로 돌아눕습니다. 해는 이미 뜬지 오래고 부지런히 일어나 일해야겠는데 그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서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잠자리를 걷어 젖히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돕니다. 소변을 보아야겠는데도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치우니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동식 화장실을 찾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로마서 8장 5-7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 도 없음이니라”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이 육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뱅뱅 돕니다. 왜요? 육신을 따르는 것은 쉽고 영을 따르는 것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대개 힘든 것보다는 쉬운 것을 따릅니다. 부지런하기보다는 게으른 편이 쉽습니다. 그래서 게으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문짝도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그 자리에서 아무런 성장도 없이 왔다갔다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생활을 한 번 살펴보세요. ‘내가 처음 믿을 때보다 얼마나 성장했나?’말입니다. 육신에 붙어 있는 돌쩌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합니다.

에베소 4장 22절 이하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하였습니다. 여러분! 과연 새 사람을 입었습니까? 골로새 3장 9절에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렇습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말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지식, 우리의 생활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 25장 15절을 보세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이것은 물론 과장법에 속한 표현입니다마는 마련된 축복을 받을 손도 펴지 아니하는 게으름을 의미합니다. 주님 말씀하신대로 구하면 주실 터인데 구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찾으면 찾을 터인데 찾지 않고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면 열릴 터인데 두드려 보지도 않고 돌아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주시려고 마련된 축복이 있는데 손을 내밀기가 싫어서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에 게으른 사람은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이렇게 예배당에 나오고 성경반에 참석만 해도 되는데 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그릇을 손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 다음 절 잠언 26장 16절을 보실까요?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게으른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형제처럼 비슷합니다. 자기 게으름의 불합리성과 어리석음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선히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은 ‘이유를 대답한다’는 원 뜻이 있는데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선한 사람의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로 주 안에서 수고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이유를 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이런 지혜로운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아니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처럼 미련한 자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좋은 평가는 게으름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이미 충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얻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큰 암초가 됩니다.

사도 바울의 빌립보 3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그것을 얻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잡으셨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아직 이것을 잡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원칙을 따라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정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는데 좀 서툴러도 앞으로 나아가면 넘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멈추면 넘어지고 맙니다. ‘스스로 섰다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그리고 게으른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단 사람이 무엇을 하나 살펴보다가 그들을 흠잡는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치욕이 될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그런 게으른 사람에게서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게으른 사람은 다른 것 특별히 할 것이 없으니까 남이 하는 일에 간섭을 잘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 말씀에 경고가 있습니다.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사실 자기의 일에 바쁜 사람이야 남의 일까지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일에 등한히 하는 사람이 대개 남이 하는 일에는 간섭을 잘 합니다. 자기 책임은 없고 잘한다, 잘 못한다 말하기는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왜요? 자칫하면 위험을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싸우려고 으르렁대는 개의 귀를 잡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싸우려고 으르렁대는 개의 귀를 잡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 개는 덤벼들어 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일에 간섭 말고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충실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1절에 “종용하여 자기 일을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0-22절에도 같은 뜻이 있습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과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조용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는 중에 힘과 능력을 얻습니다. 사실 흥분하고 당황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조용해야 무엇을 생각할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고, 내 의무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아서 그것을 꼭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자기 일을 하니 아니하고 돌아다니면서 일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아니할 뿐더러 일 하는 사람을 비난하며 방해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조용하여 자기 일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을 하기는 하는데 말이 많습니다. 자랑도 많고 불평도 많습니다. 그러지 말고 말없이 조용히 일하는 것이 귀합니다. 말이 많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관계를 적게 맺을수록 좋습니다. 특별히 남의 말 하지 말며 자기 일을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귀한 사명 맡기면서 그가 장래 어떻게 어려움을 당할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고 있는 다른 제자를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 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말고 너는 네가 할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심할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믿느냐? 어떻게 기도하느냐? 어떻게 봉사하느냐? 그것 상관할 것 없이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금년 일년 성경 말씀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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