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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 (욥 0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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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친구 빌닷이란 사람이 욥에게 찾아와 한 말을 이 시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첫 시간에 생각한 욥기 1장에서 욥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욥은 하나님이 칭찬하고, 사단에게 내놓고 자랑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시기로 말미암아 욥은 정말 뜻밖에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형통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되면 제일 배 아파하는 것이 사단입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을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욥이 어려운 일을 당하는데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찾아와서 한 말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빌닷의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통되는 점은 모두가 욥의 편이 아니라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단의 계획을 돕는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한 사람이 잘 되고 번영하면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가 졸지에 어려운 환경 가운데 들어가면 그를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환경에 들어가게 된 원인을 그 사람에게 돌려버립니다.
예수님이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온 예루살렘 시민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고난을 당하시게 되니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간사합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 중에 “사람의 코가 몇 번이고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모두 잘 되면 모두 “그 사람의 코가 잘 생겨서, 그 코가 복이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안되고 어려운 경지에 이르게 되면 같은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의 코가 복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코가 달라진 것은 아닌데 상황이 달라지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마 욥이 번영하고 잘 되어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칭찬을 받을 때는 욥의 친구들도 와서 “자네는 그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악에서 떠난 생활을 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을 하네 그려”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처럼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는 욥을 보고는, 전에 했던 말은 다 잊어버리고 모든 고통의 원인을 욥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 8장의 빌닷의 말을 보아도 한마디로 욥을 동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의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을 고루게 함같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같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말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야 합니다.
몰론 빌닷의 말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는 굽은 것이 없으십니다. 공의의 심판, 바른 심판을 행하십니다. 세상의 심판은 공의롭게 되기 어렵습니다. 물론 재판장의 이상(理想)은 공의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제한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공의의 심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얼마전 전 매스컴의 보도를 보고 우리가 가슴 아파하는 일 중에 하나는, 경찰이 심문 도중에 학생을 질식시켜 죽인 사건입니다. 만들어 놓은 각본대로 진술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진술하도록 만드는 심문 방법은 지극히 원시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시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고문을 통해서 본의 아닌 사실과 다르게, 하라고 하는 대로 진술해서 형을 지우는 미개한 인간의 방법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데 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의롭게 인정되어 죄 없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될까요?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기독교의 선언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돌로 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치라” 했습니다. 그때 간음하다 끌려온 죄 있는 여인을 돌로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 마음에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어떻게 됩니까? 솔직히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양심대로 해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구원받을 자신이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대구에 다녀왔는데 집회를 끝내고 호텔에 안내한 집사님이 “목사님, 좀 피곤하시겠지만 잠깐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하셨습니다. 그래서 들어오시라고 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서 그 교회의 안수 집사가 되고 성가대 대장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얼마 안 있어 장로가 될 물망에 올라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고민이 있어요. 어떤 분은 지금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구원받을 자신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자신이 없어요. 물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서질 않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잘못하는 일이 있고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죄를 범하면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히려 어떤 면으로 보면 양심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 사람의 집에는 사람이든 짐승이든지 간에, 맏아들 맏짐승을 다 죽이는 재앙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심판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고센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다 바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의 맏아들 맏짐승을 다 죽이는데,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피를 보고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이스라엘 집이라고 해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피를 보고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Passover)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인보다 의로워서 이런 재앙을 면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피 때문에 면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모든 도덕적인 수준에서 월등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사업 능력이 탁월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사이 사회에서는 “교회 장로들이 하는 사업이 부도가 난다”는 말이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사람도 부도가 나는데, 믿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비난하면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의 피가 있기 때문에 그 피의 공로로 죄 씻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정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는 것은 너무 분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그 피의 공로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미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3-34절에서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5-6절을 보십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왜 그렇습니까? 고난 중에 피난처와 도움이 되실 분은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처한 모든 사람의 할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예레미야애가 3장 40-41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고 합니다. 손을 드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부르짖는 자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항복하는 자세입니다.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언젠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리오마는, 환난의 때, 곤고한 때, 실패한 때, 어두운 때,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 아니하셨도다”(시 66:18-20).

오늘 주신 말씀에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의로운 집”이란 말이 나옵니다. 어떤 집이 의로운 집입니까? 경건한 가정을 말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찾는 가정입니다.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가정입니다. 이런 집은 평안하고 번성하게 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33편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였나니 곧 영생이로다” 했습니다.
화평한 가정, 화평한 교회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에서 부부가 매일 싸우게 되면 부모님이 함께 계실 수 있습니까? “아, 우리가 있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 그런가 보다”하고 눈물을 흘리시며 그 집을 떠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 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사무엘하 6장 10-11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가 오벧 에돔의 집에 있을 때 그 집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집, 개인, 교회, 나라가 복이 있습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1.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 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일년 아니 일평생 동안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 가정 안에 하나님을 모심으로 이 땅 위에 살면서도 하늘 나라를 맛보시며 사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본문 7절을 다 같이 찾으셔서 읽으십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이 하시는 사업에 이와 같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구나 여러분 심령에 이런 축복이 임해서 종려나무처럼 번성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빌닷은 인생의 깊은 면을 말해 줍니다.
9절에 보면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했고, 11절에 보면 “왕골이나 갈대가 푸르더라도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른다”고 했습니다. 14절에 보면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하면서, 14절 하반절에는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다” 했습니다. 15절에는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 인생의 일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그림자와 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여러분의 그림자가 지금 어느 상태입니까? 그림자에다 마음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아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이 잔칫집에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마음이 초상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세상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 풀은 마르게 될 날이 오고 꽃은 떨어지게 됩니다.

세상 사람이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거미줄과 같습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정성과 정열을 기울입니까? 그리고 그 거미줄에는 나비나 잠자리 심지어 참새까지도 걸려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걸린 것이 기진해지면 슬그머니 나와서 거미줄로 칭칭 감아 놓고, 먹을 것을 간직해 놓은 데 대한 흐뭇한 마음으로 집에서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흐믓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이지만 지나가던 아이들이 막대기로 그렇게 정성 들여 쳐 놓은 거미줄은 걷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15절의 말씀대로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그 집이 보존되지 못”합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좋아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의 집을 의지하고 그 사업을 굳게 잡고 권력을 누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와 술수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외적인 형통 속에서 그 집이 그의 왕궁인 것처럼 교만을 떨며, 그의 성곽인 것처럼 그 속에서 방어하고, 거미가 거미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그가 먹이로 삼고자 노리는 자들을 유혹하는 데 그것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그의 집을 쓸어버리실 때가 오는데 그때는 거미의 분비물로 만들어진 거미줄처럼 쉽게, 그리고 틀림없이 쓸어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에서 형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이처럼 거기에서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고 기대할 때 결국 실망할 수밖에 없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그들의 재산을 굳게 잡으려고 노력하나 하나님은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빼앗으십니다. 그러면 그들이 모은 이 모든 것들은 누구의 것이 될까요? 그 많은 것들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곡한 자의 확신은 무너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 그러니까 집이 매우 필요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했을 때 넘어질 것입니다.

“사악한 자가 죽을 때 그의 소망이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들은 오히려 그를 실망시킬 것이며, 그를 스스로 들뜨게 했던 그의 어리석은 소망은 끝없는 절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의 소망은 끊어지고, 그가 은신처로 삼았던 그의 거미집은 쓸어버림을 당하며, 그는 그 속에서 찢겨질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런 때에 세상이 변하고 흔들린다 하여도 굳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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