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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달라야만 합니다 (욥 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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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달라야만 합니다(욥기 21:1-16)

오늘 생각하게 되는 욥기 21장은 소발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여기서 욥은 그의 친구들이 조금도 그의 호소에 대해서 감동을 받거나 그를 동정하는 것이 없는 것을 보고 이제는 그 자신의 비참함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한결 같이 악한 사람은 세상에서 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하면서 욥이 지금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의 죄 때문에 당하는 형벌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악인이 범죄할 때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죄는 우리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요긴한 대목에 가서 맞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당장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벌을 받는 경우보다 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의인보다 악인이 더 번영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여기 의인의 번민이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제 고난의 절정에서 그의 친구를 향하여 호소하듯 말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을 보세요.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또 조롱할지니라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가 어찌 초급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는 나를 보아라, 놀라라,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 내가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입장을 이해하려면 그의 하는 말을 잘 들어주어야만 합니다.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도움을 줄 위로가 도무지 없다면 나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 주라.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는 위로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게 되면 고난 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너희 친구를 잔인하게 대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했다는 사실을 회고해 볼 때 그것은 너희 스스로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은 후에 나를 조롱하려면 조롱해 보라. 그러나 너희가 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는다면 나를 조롱하기보다는 너희의 생각을 달리 해서 나를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재판장은 아닙니다.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아니다. 나의 이 원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며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에 욥의 원망하는 것이 사람들을 향해서 한 것이었다면 그의 심령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원망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므로 사람에 대한 감정은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환난과 그의 친구들의 책망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내가 갑자기 나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기고 심한 종기로 고통을 당한 그 무서운 날을 추억하기만 하여도, 나를 번뇌케 한 것을 다시 생각해도, 그것이 답답하고 내 몸을 잡는다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구나. 악인들의 이 세상에서 흥하고 그 이웃들의 찬사를 얻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지 않을 수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고 어리둥절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욥은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이상히 여기게 하려 했습니다. “나를 보아라. 놀라라. 나의 환난이 어떠한 것을 설명하는 대신 너희는 너희가 악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사람이 이처럼 환난 당하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없는 섭리의 신비를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아무리 이렇고 저렇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도 가만히 있어 그 결과를 기다려 보라. 그리고 때가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그의 첩경은 큰 물 속에도 있다”면서 “악인이 흥하고 경건한 사람이 환난을 겪는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일의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을 때 우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 7절 이하에는 악인이 어떻게 흥하는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비참하게 되는 것을 말하면서 욥이 바로 악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비참한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욥의 세 친구들의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악명이 자자한 죄인들에게 때로 현저하게 심판이 내린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개적으로 대담하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크게, 그리고 오랫동안 세상에서 흥왕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흥하여 더욱 악을 범하더라도 그들은 계속 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여기서 악인이 흥하는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악인은 망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악인이 수를 늘려 오래오래 사는지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부하게 삽니다. 장수합니다. 영예와 만족을 얻습니다. 세력이 강하고 권세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인물이 될 뿐만 아니라 어떤 동요에도 잘 견디어 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악인이 어떻게 그처럼 번창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땅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악함을 보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악함을 미워하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악함을 처벌할 수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불법의 도가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법을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흥하는 것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한편 그것이 무르익을 때 그들이 멸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악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다 심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서 보응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세상에서 얼마나 흥합니까? 그들의 수는 불어나 그들의 가정이 당당하게 서고 그들은 그것을 보며 기뻐한다고 8절에 말씀했습니다. “씨가 그들 앞에 굳게 선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9절에 보면 그들은 편하고 평안합니다. 소발은 악인들이 끊임없는 놀라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는데, 욥은 그 집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평안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칼이나 활로 인해서 상처를 입고 죽는 일이 그들과는 극히 멀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은 물론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재산은 번창하여 풍족하게 삽니다. 그들의 가축이 번성하여 그들의 기대를 채워 줍니다. 암소가 새끼를 낳아 재산이 증식합니다. 그들은 즐거워하고 유쾌한 삶을 누립니다. 그들은 그 아이들을 이웃들과 섞여 놀도록 내보내는 것이 양같이 무수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무도회를 열고 음악회를 여는 그 자리에서 그 자녀들은 춤을 춥니다. 그 부모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합니다. 그들은 피리를 불고 그 자녀들은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춥니다. 말하자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피리를 불며 즐깁니다. 감각적 즐거움은 정욕에 물든 사람들이 취하는 기쁨이며 그들은 자녀들도 그렇게 기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그들은 마지막에도 그들을 놀라게 하는 두려움의 전조를 느끼지 않고 어떤 근심이나 번민을 느낌 없이 갑자기 죽는다는 말입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복 중에 마지막 복이 호종명(好終命) 입니다. 죽을 때 고통받지 않고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악하게 사는 사람이 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 계속 악을 고집하며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
여러분, 상선벌악(賞善罰惡)이 이 세상 운영의 원리인데 어떻게 악하게 사는 사람이 이처럼 번영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나님을 우롱해도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악한 사람들이 이처럼 흥하는 것은 이상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께 공공연히 도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을 할 정도인데도 그런 악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욱 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 아닙니까? 그들이 더욱 더 하나님을 대적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흥합니다. 그들의 무기로 하나님께 대들지라도 그들은 무력적인 대항을 받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인이 흥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부러워 할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 할 것도 없습니다. 미련한 자의 안일은 계속 죄를 짓게 만들므로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는데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잠언 1장 32절에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고 했습니다.

시편 73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짐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여러분, 악인들이 세상에서 흥하며 하나님과 믿음을 얼마나 경히 여기나 보세요. 그들은 이 세상에서 너무 풍족하고 평안하기 때문에 마치 저 세상을 바랄 필요가 없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믿음을 얼마나 싫어하고 있나 보세요. 그들은 하나님을 싫어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듦으로 우리를 괴롭히지 마시고 또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억압을 받지 말게 하소서” 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사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 없이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지식과 뜻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두려워합니다. 14절에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알려 하지 않습니다. 그 지식은 불순종하는 그들을 끊임없이 책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이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변론하는가를 보십시다. 15절에 “전능자가 누구기에”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피조물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신앙으로 사는 것이 피조물 된 인간의 의무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왕처럼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겠는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는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 이상 더 무례할 수가 있습니까?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냉혹할 수가 있습니까? 섬기는 것을 고된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 자신을 너무 높였기 때문에 자신은 섬김을 받을 사람이지 섬겨야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이 좀 있으면 이처럼 오만한 자리에 들어서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이 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를 느끼지 아니합니다.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혜를 얻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말라기 3장 14-15절에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함으로 빚이 갚아지고 없던 아들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경건한 생활이 세상에서의 출세를 방해할지도 모르며 그에게 손해를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이사야 58장 3-9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잘못 구하면 안됩니다.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헛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가 믿음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그들이 그것을 얻을 수는 없으므로, 하나님을 이처럼 무시하는 것은 배은망덕의 행위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재물을 얻게 한 것은 그들의 세력이 아니고 그 손의 권세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실 하나님 없이 그것을 보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이 떠나기를 청하며 하나님이 주는 축복을 잃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의 말을 들어 보세요.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나는, 그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 그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그들이 행하는 대로 행하지 아니합니다. 나의 인생관, 나의 가치관은 그들의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하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바른 자세입니다. 배로 하나님을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고 사는 세대,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돌아서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첫 부분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여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했습니다.
마지막 때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의 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이고, 그 다음은 이웃이고, 그리고 나중이 우리 자신인데, 그 순서를 뒤집어 놓아서 우리 자신이 먼저이고 하나님을 나중에 놓았습니다. 여기 이 시대의 문제가 있습니다.
God을 뒤집어 보십시오. dog이 됩니다. 오늘 사람들이 이렇게 삽니다. 그러나 “너 디모데는 다르게 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보아야 별 볼 일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권모술수를 가리지 않고 얻고 누리면 된다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바르게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의 삶의 표준이 너무 낮습니다. 예수 믿어 출세하고 돈 벌고 건강하게 살고 하는 정도로 신앙 생활까지도 자기 중심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 삶의 표준을 높은 데 두고 우리의 시선을 땅만 보는 데서 돌이켜 위엣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만은 이런 데서 돌아서야 합니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외양간에 소가 없고 창고에 곡식이 없을지라도”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풀무불 속에서 건져 주시지 않으시더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매 맞은 곳이 아플지라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세상을 따라 가지만” 나만은 따라 가지 않고 고난을 각오하고 나서는 생활입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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