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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미천하오니 (욥 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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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천하오니(욥기 40:1-14)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욥기 40장의 말씀도 욥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의 공평함과 그 섭리의 합리성을 반박하는 일입니다. 욥은 그 동안 자기가 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시련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심도 가져 보았고 하나님께 불평도 해 보았고, 하나님의 종들의 말을 반박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욥이 범한 죄입니다. 사람은 타락한 이래로 본성이 악해졌기 때문에 이런 죄를 범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전에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얼마나 사양했습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1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며 자기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사양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하며 자기의 메시지가 부족하다고 사양했습니다.

4장 1절에 보면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했습니다. 자기의 권위가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4장 10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며 말재주가 부족하다고 사양했습니다. 4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하면서 자기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5장 23절에 보면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했습니다. 모세가 과거에 실패한 것을 말합니다.

6장 12절에 보니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해 봤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신다 해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하는 거부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노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장 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섭리에 대하여 자기의 이론을 펴면서 발뺌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이런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편 73편을 보세요. 아삽 자신도 이런 죄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찌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내가 의를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반론을 전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훌륭합니다. 16-17절에 보면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시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주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의문과 불평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알고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반론을 펼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완전하고 지혜롭습니다. 그 섭리가 깊고 오묘하고 크고 넓기 때문에 제한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중에는 지나 놓고 보아야만 알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욥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미처 몰라서 괴로워하고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께 대드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 그의 태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3-5절을 보세요.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이리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미천하오니.”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뵈올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의롭게 살아 보려고 힘쓴 것 하나 가지고 욥은 은근히 자기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대하고 나니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옛날 아브라함도 자기 자신이 티끌과 같음을 인정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인간은 벌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 생명이 호흡에 있는데 수에 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대로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헛된 것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가 악합니다. 그 성품에 있어서는 더욱 악합니다. 요한 칼빈이 말한 대로 우리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습니다(Total Depravity).
그래서 깨어지고 부스러진 거울(broken mirror)처럼 되어서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있을 곳은 먼지 속이며 인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러구저러구 중얼거리고 불평하는 것은 어떤 피조물에게 있어서나 터무니없는 행동이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을 악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죄의 성격은 깎아 내리는 것이고, 의의 성격은 추켜세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추켜 세워 주고 북돋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보면 “내 백성을 위로하라” 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 힘을 더해 주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고, 낙심된 사람에게 소망을 안겨 주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을 깎아 내립니다. 공연히 사람을 헐뜯습니다. 세우지 아니하고 무너뜨립니다. 칭찬하지 아니하고 비난합니다. 우리가 욥기를 처음 생각할 때 보셨지요.
욥은 우스 땅에서 살면서 순전하고 정직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10남매의 자녀가 출중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동방에서 큰 자라고 존경을 받고 살았습니다. 더구나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 보려고 애쓰며 심지어 그의 자녀들이 혹시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하지 않을까 하여서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습니다. 욥의 행사가 늘 그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보실 때 마음에 들었고 대견스러웠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단에게도 욥을 자랑했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그때 사단이 하나님께 뭐랬어요?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주께서 그와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넉넉히 주어서 산울로 두루셨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이 이 온 땅에 널리게 해서 그런 거예요.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 모든 소유물을 쳐보세요. 그렇게 되면 아마 주를 향해 찬송하던 그 입으로 주님을 대면해서 욕을 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단의 하는 말입니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파서 어떻게 해서든지 망하게 해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허락하에 하루 아침에 욥이 10남매 자녀를 잃게 되고 그 많은 재물을 다 원수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 봉변을 당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험을 무사히 잘 통과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했어요?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 시험을 잘 이기면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어요.

욥기 2장에 보면 하나님 앞에 나타난 사단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셨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 넘치는 마음으로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눈으로 훤히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얼마나 악랄한가를 보세요. 하나님께 또 상고했습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면 틀림없이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라.” “자식 잃고, 재산 빼앗긴 것으로도 안되고 자기가 죽게 되면 입장이 달라질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처럼 악독합니다. 그래서 그 동안 당한 고난이 얼마나 컸습니까?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했습니다. 마귀의 본업은 이렇게 사람을 못 살게 굴고, 헐뜯고, 깎아 내리고, 무너뜨리고, 낙심시키고 절망하게 하고, 원망하게 하고, 비난하게 하고, 불평하게 하고, 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일어나려 할 때 이것이 사단의 역사구나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 입에서 원망, 불평, 비난, 시비, 한숨이 나와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우리 입에서 이런 것이 나오면 마귀가 기뻐합니다. 마귀를 기쁘게 해서는 안됩니다. 약해지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자리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이것은 욥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인간으로 하나님께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습니다. 욥은 그 동안 자기는 악하지 않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황태자와 같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은 그의 말이 바뀌었습니다. “보세요. 나는 미천합니다.” 완전히 그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바리새인 시절의 사울은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런 사울이 회개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인으로 봅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봅니다.
이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은 큰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청년 이사야는 하나님의 편에서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제단만 본 것이 아닙니다. 촛대만 본 것도 아닙니다. 떡상만 본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의 옷만 본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령한 눈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예배당에 와서 예배는 드리지만 강대상만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천장만 봅니다. 어떤 이는 성가대의 노래만 듣습니다.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나왔으면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령한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갑자기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언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복지를 점령한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마지막에 이런 말씀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사야는 이런 두려움에 싸이게 될 때 곧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습니다.”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제일 먼저 하게 되는 일은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면서 제일 먼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할 때 그 기도를 들으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욥도 그렇게 신앙이 좋았지만 큰 환난을 당할 때 여러 가지 변론을 많이 하다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들을 때 “내가 미천하오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듣기만 하고 하나님을 아직까지도 그 심령에서 친히 대면하지 못한 까닭으로 죄를 회개하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대면하게 될 때에는 누구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질 때에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예배당에는 나오지만 자고새가 남의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죄를 그냥 품고 있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의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두려워서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죄를 자백하자마자 스랍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 있던 펄펄 타는 숯을 갖다가 그의 입술에 대면서 “네 악에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죄를 고백하자마자 죄사함을 받았고 악이 제거함을 입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에게는 악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이 악이 제거함을 받고 이 죄가 사함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죄를 자백하면 자백하는 그 즉시로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다윗도 무서운 죄, 더러운 죄를 짓고 그냥 품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나타나서 죄를 가리켜 줄 때에 깨닫고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하고 자백하고 나자 나단이 “하나님께서도 네 죄를 사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무슨 공로를 보고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곧 그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회개만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했습니다.

회개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문자 그대로 천국의 문입니다.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후회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죄를 보려 하지 말고 먼저 내 죄를 보아야 합니다. 남의 눈의 티를 뽑으려 애쓰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빼기 위해서 먼저 애써야겠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길을 걸었던지 어떤 잘못을 했던지 과거를 청산하고 바른 길을 가면 죄사함을 받고 우리 마음속에는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는 새로운 평화와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오리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하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욥이 회개했습니다. 같은 죄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죄를 지었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잠 28:13).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미쳐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신령한 눈으로 나자신을 보게 하시고 내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 용서함을 받게 하시고 기쁨과 평화를 주시옵소서. 내가 미천함을 알게 하소서.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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