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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라기의 저주와 십일조3 (말 0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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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고정관념입니다. 즉,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말할 때 누구나 기본적 논제로 떠올리는 것이, 과연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안 드려도 되는가? 하는점 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이런 부분 부터 시작해서 십일조를 드린다면 과연 어디다 드려야 하는 것이고, 그 용도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십일조를 도적질한다는 말씀은 무엇이고, 말라기 선지자로부터 십일조에 대한 경고를 받는 이유와 대상은 과연 무엇이며 누구인가?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대략 이런 문제에 치중해서 말씀을 드려 왔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오늘 십일조를 계산하는 일반적인 방식, 즉 수입이 백만원이라고 한다면 거기에서 수치상으로 계산된 십만원이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일조인가? 하는 등등... 그야말로 현실의 논제들을 들어서 유치하리 만큼 지금까지 말씀드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실제적으로 되어져 있는 사실들을 들어서 말씀을 드려야 쉽게 납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해 온 것입니다.

어쨌거나 지난 시간까지 여러분들에게 드린 말씀은, 그리고 이 시간 더 보충하고자 하는 것은, 십일조의 논제나 문제가 십일조를 감사함으로 낸다 안 낸다 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모든 계산적인 문제를 떠나서 십일조를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아직도 십의 일이라는 수치적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역시 십일조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또다시 말해서, 십일조에 대한 문제는 십의 일을 조건없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드린다던가 하는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의 일이라는 계산을 벗어나느냐? 못 벗어나느냐?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감사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하더라도 그 감사 이전에 이미 ‘십의 일’이라는 계산적 입장에서 드린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 연보라기 보다는 이미 자기 계산이 전제된 일종의 종교세와 같은 할당금인 것입니다. 어쨌든 연보에 관한 한 그런 수치적 계산은 필히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10절을 먼저 읽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 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 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 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에 보면, ‘온전한 십일조’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이런 식으로 주제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여러분들이 좀 냉철한 판단을 갖고 생각하실 때, 오늘 십일조를 강조하는 자는 그 목적을 어디에 두고 강조한다고 생각이 됩니까? 따라서 십일조를 바치는 자는 어디에 관심들을 두고 있다고 봅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자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데 강조점을 두고, 또 바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현실 아닙니까? 더욱이 강조하는 자나, 따르는 자나, 양자 모두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했다 해서, 십일조로 복을 내려 주시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고, 복을 내려주지 않으시면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지는 것 아닌지요? 그래서 “예수믿고 3년 안에 부자가 못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한국교회 저변에서 공공연하게 떠도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식의 말을 유치하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 십의 일이라는 계산을 벗어나지 못하면 어쩔수 없이 결국 그와 같은 생각에 놓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어느 분이 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 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로 십일조에 대한 최종 결론입니다. 물론 말라기 선지자가 한 말의 의미도 예수님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에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고 말라기 선지자의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이 말씀을 못알아 들었다는 지도자는 현재 한국교회 안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알아들은 결론이 무엇인가 하니, 말라기는 물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내라 하셨다는, 그리고는 으레히 십일조 계산에 초점을 맞추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일조를 내라던가 또는 계산을 철저히 해야 된다던가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십일조를 하려거든 올바르게 하라는 의미로 되어진 말씀인 것입니다. 즉, 말 그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말씀하신 것인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들어 십일조를 철저히 계산해서 바쳐야 한다는 말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 또는 십일조를 온전히! “인간은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정확한 십일조 계산을 못하기 때문에 넉넉잡아 십분의 이, 또는 십분의 삼, 더 나아가 별도의 십일조까지 해야 온전한 십일조가 된다. 물론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서 되어지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말입니다.여러분! 만약 ‘온전한 십일조’를 그렇게 해석한다면,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행위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근채까지 철저히 계산하는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저주하셨는데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모든 소득에 대한 십일조를 철저히 계산해서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을 ‘십일조 계산을 철저히’ 하라는 뜻으로 적용한다면 무엇인가 성경과 말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어쨌거나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근채까지도 철저히 계산하는 십일조! 과연 오늘 여러분들이 그 정도까지 신경을 써서 십일조 계산을 하시는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유대교라는 종교가 직업이었기 때문에 밥먹고 늘 생각하는 것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대개의 신자들은 이 세상 볼 일 다보고 예수 믿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결코 그에 이를수 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편의적으로 되어진 말이 바로 십의 이,삼조 또는 별도 십일조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기발한 발상입니까? 모름지기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이런 계산에 있었을런지 모릅니다. 여러분! 신앙은 결코 적당히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다시 말합니다. 오늘 ‘온전한 십일조’라던지 또는 ‘십일조를 온전히’ 라던지 할 때, 대개가 계산을 철저히 하라는 말로 이해해서 돈 계산에 치중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도 제게 그 자료가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 노량진의 어느 교회에서는 십일조 계산방식을 도표로 인쇄해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오만원 수입에서 부터 천만원 수입까지, 더 나아가 돈의 수입 뿐 아니라 이익과 관련되는 모든 수입의 십일조까지 계산을 해 놓았는데, 그 밑에다 덧붙인 말이 “십의 일조로서 성도의 의무를 다한 것은 아닙니다. 본시 하나님 앞에는 십의 십조, 모든 것을 다 드려야 하는데, 십의 십조를 다 드리라고 하면 인간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니까 일단 십의 일 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궁극에는 십의 십을 다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라는 말로서 십일조 의무를 강조해 놓았습니다. 모름지기 신앙초기에 있는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무리없이 받아 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다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화 있을진저’ 할 때 이 말은 ‘저주를 받으라!’ 라는 말인데요. 모두 저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아니면, 근엄한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러한 점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되어진 저주의 핵심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행위인데요. 비록 바리새인들이 지금 예수님께로 부터 형식적(외식)이라는 질책과 저주를 받기는 해도, 실제로 그들의 십일조 행위는 오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당시 가장 귀하게 여기던 박하와 회향에서부터 가장 값어치 없는 근채(나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십일조 계산을 철저하게 해서 바쳤습니다.

계속 중복되는 말입니다만, 오늘 한국신자들이 어설프게 계산해서 내는 십일조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계산상 완벽한 십일조였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로 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점을 볼 때,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는 분명히 계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잘 못하시는 듯 한데요. 저를 모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온전한 십일조’ 라고 할 때, 어떻게들 생각해 오셨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돈 계산하는 방법으로 생각지 않으셨습니까? 내 수입에서 과연 얼마를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가 되는가 하는데 말입니다..??

어쨌거나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온전한 십일조’나 예수님께서 ‘의와 인과 신’을 함께 드려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나, 이 모두가 오늘 한국교회가 말하듯, 또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듯, 돈 계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만,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 할 때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지적하시는 이유와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직접 본문을 보시다시피 오늘 한국교회에서 말하듯 정성없이 드리는 십일조, 계산을 철저하게 하지 않은 십일조, 이런 저런 이유로 십일조를 못 내거나 안 내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인가요?
 
여러분! 착각을 깨시기 바랍니다. 십일조에 대한 말라기나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들의 십일조에서 무엇이 빠졌다고 말씀하십니까..? 무엇이 더 중하다구요? 무엇보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한국교회에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놓고 ‘외식적인 십일조’ 이렇게들 말합니다. 그러나 바라새인들의 십일조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면 상당한 문제가 발생됩니다. 왜냐하면, 근채의 수입까지도 철저하게 계산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외식이라고 평가한다면, 오늘 여러분들이 대충 계산해서 바친 십일조는 과연 어떤 평가에 속하게 되는지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바치는 십일조가 바리새인들의 철저히 계산된 십일조를 결코 능가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하기 좋은 말로 외식이라고 몰아 부친다면 여러분들의 십일조는 그야말로 외식×외식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성도의 당연의무로 또는 감사함으로 바쳤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신 이유는 십일조 계산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십일조라는 물질적 계산, 그런 것 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 즉 의와 인과 신,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난한 고아나 과부, 나그네들을 돌보아야 할 ‘사랑의 의무’ 그것을 바리새인들은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도 고아나 과부, 나그네들을 돌보아야 할 ‘사랑의 의무’를 전혀 구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십일조를 강조할 때, 대개가 돈 계산에만 치중하지 십일조의 기본이자 목적인 사랑의 정신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오늘 한국교회에서 사랑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의 명목으로 구제연보라던가 선교헌금이라던가 하는 것이 따로 있고, 또 무슨 바자회라던가 하는데서 얻어진 그야말로 별도의 수입으로 구제행위를 구사하기는 합니다만.. 제 말은, 십일조를 강조하거나 쓰는 용도에 그런 사랑을 의무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교회는 드물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십일조의 용도는 대개 ‘목회자 생활비’ 등으로 적용, 해석하고 있고 또 대개의 일반 성도들도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본시 십일조의 용도는 세 가지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레위족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로, 둘째는 성전 기물을 보수하거나 마련하는 비용으로, 셋째는 고아나 과부, 나그네들을 위해 쓰는...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대대로 패역한 제사장들은 레위족의 생활비로 돌아 가야 할 십일조와 성전에 사용되어야 할 십일조, 심지어는 고아나 과부에게 돌아 가야 할 구제의 십일조까지도 몽땅 자기들의 몫으로 챙겼습니다. 이러한 제사장들의 행위는 급기야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입장에 처해 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유대교의 지도자들... 즉 예수님 시대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율법과 성전을 가운데다 놓고 여전히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계산된 십일조를 바친 행위가 바로 그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어떤 이들은 “바리새인들 자신이 직접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데 이용을 한다니 무슨 말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십일조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

저를 모두 보시기 바랍니다. 이 상황을 오늘로 바꾸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간혹 보실 수 있듯이... 어느 교회의 주보를 보면 십일조, 감사연보, 건축연보 등등, 그 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모든 연보 종목에 그 교회에 목사님으로부터 자녀에 이르기까지 매주일 이름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목사님까지도 십일조나 연보에 충실하는 것 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글쎄요..?? 때로는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는, 목사인 나도 이렇게 십일조라든가 모든 연보에 충실하고 있으니... 그 다음은 말씀 안 드려도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철저한 십일조! 정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한 것일까요? 여러분!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 관계로 이 시간 다 말씀을 드리지 못합니다만,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행위를 저주하시기 전에 되어진 앞 부분들의 말씀을 세밀히 살펴보시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아시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라기서 3장 10절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 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 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 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는 바로 이 구절을 놓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현실에 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철저히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들을 앞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 말에 따라 십일조를 바친 신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서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을 위해서 드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구절에 되어진 ‘온전한 십일조’를 십일조 계산을 철저히 해서 바치라는 말로 생각해서 지금까지 십일조 계산에만 모두들 치중해 있습니다.

...누구든 남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은 전혀 계산할 생각도 못하고 오직 자신의 축복을 위한 계산에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비록 신앙적 양심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나머지 ‘십의 구’를 자신의 몫으로 확정지으려는 인색을 합리화시킨 행위이지 결코 하나님이나 가난한 자를 위해 드려진 십일조는 아닌 것입니다. 더불어 십일조를 드린 후, 그 마음속에 축복에 대한 기대가 눈꼽만큼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진정, 축복은 커녕 오히려 말라기나 예수님이 내리신 저주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항상 똑같은 원리에서 말씀이 되어져 있습니다. 과거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진 율법도 그 조목조목을 온전히 지키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율법의 조목조목을 따라가다 보면 궁극에 가서는 죄된 행위는 지양되고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게 된다는 원리에서 율법의 순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 또는 다른 의미로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철저히 지켰다고는 하지만 최종 궁극에서 나타내야 될 ‘사랑’의 행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상에서 ‘외식’이라 할 때는 모두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명령하는대로 참으로 행했다면 그 끝은 분명히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 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 말씀이 쉽게 이해 안 되시면 ‘율법의 끝은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십일조 이야기로 되돌아 가겠습니다.온전한 십일조... 비록 나물 한 뿌리의 십일조까지 계산해서 바쳤다 하더라도 거기에 사랑의 동기와 목적, 의무가 빠져 있으면 실로 아무것도 아닙니다.더군다나 그런 식으로 낸 십일조로서 복을 받는다던가 또는 받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일 뿐 아니라 오히려 방금 앞서 말씀드렸듯이 십일조를 말한 자나, 그 말을 듣고 따른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온전한 저주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에서 ‘온전한’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향해 말씀하신 의와 인과 신, 이것은 모두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물이든 십일조이든 이 기본적인 정신이 빠져 있다면... 그래서 십일조 계산을 아무리 철저히 해서 바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나타내거나 또는 복이라는 기득을 위해서 바친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에 따른 사랑이라는 것은 앞서 여러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고아나 과부, 나그네들을 돌아 보는 정신을 말하는 것인데, 십일조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다면 결국 자신을 위해 바쳤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가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할 때, 이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십일조로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이 아니고, 본시 십일조에 따른 ‘사랑의 의무’를 그대로 실행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고, 그렇게 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는 ‘온전한 십일조’를 말할 때, 돈 계산을 철저히 하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는 정말 한심한 현실입니다. 그 뿐 아니라 더욱 한심한 것은 그런 식으로 계산된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등, 그리하면 축복이 강같이 넘친다는 등의 말을 핏대를 세워가며 외치는 자들과 그러한 말을 사실처럼 믿고 이웃에서 빚을 내 ‘미리십일조’를 한다는 사람, 또 그런 자를 신앙좋은 사람이라고 교인들 앞에 세워 광고까지 하는.. 정말 이것은 한심적 차원을 넘어 분명히 저주아래 있는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십일조의 행위나,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행위나, 예수를 믿는다는 행위나, 이 모두에서 나타나야 하는 궁극적 행위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이 사랑의 정신과 의무가 빠졌거나 나타나지 않는 모든 행위는 비록, 요즘 흔히 도는 말로 자신의 집까지 모두 팔아 바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낱 종교적 열심에서 되어진 무속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오늘 한국교회에서 축복받기 위한 십일조를 비롯해서 모든 헌금의 정신이 어디 있든지 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정처없이 바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박관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말이 있습니다. 즉, 오늘 한국교회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다시피 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인데요. 야고보서 2장을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을 뒷받침 하는 말씀들 입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을 강조할 때, 여기까지는 아직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행함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에 따라서 문제는 복잡하게 되어집니다. 모두 저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의 구절들을 자세히 보면, 2장 21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 구절이 야고보가 ‘믿음의 행함’으로 말씀하고 있는 핵심부분입니다. 따라서 오늘 한국교회가 믿음에 따른 행함을 강조할 때도 역시 이 구절을 중심에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는 아직 문제가 없습니다만,그 다음 ‘아브라함이 자신의 귀한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 한다. 그것이 곧 믿음의 행함이다...’ 이렇게 말할 때 바로 여기에서 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되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은 가상적인 말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 한국교회 저변에서 행함을 말할 때 흔히 따라 붙는 말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을 앞 세울때는 대개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예를 들어서 무엇을 교회에 바치도록 하는데 인용한다는 말입니다.

표현이 좀 복잡하게 된 것 같습니다만, 모두 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 믿음에 따른 행함을 말할 때, 대개 두 측면에서 말을 하는데, 하나는 윤리나 도덕적인 행실과 사랑의 행위를 의미하는 말로, 또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를 믿음에 따른 행함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윤리나 도덕적인 행함을 말할 때 기계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바로 율법의 ‘십계명’이고,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는 행함을 말 할 때는 오늘 주제로 살펴보는 십일조라든가 하는 모든 헌금의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적극적인 말은 나중 ‘율법과 복음’을 주제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때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십일조만을 중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교회를 2,3년 정도 다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오늘 ‘믿음에 따른 행함’을 말할 때, 대개 무엇을 말하던가요? 여러분들의 윤리적인, 그것도 일상 생활의 윤리를 철저히 강조하던가요? 아니면 무엇을 내고 바치라는데 역점을 두어 말하던가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귀한 아들까지 하나님께 바쳤다”는 말을 앞세워 여러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지 않던가요? 그것이 바로 믿음의 행함이라고들 말하면서 말입니다.

어쨌든 이런 한심한 현실은 오늘 대개의 신자들이 성경을 깊히 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데요. 앞에서 읽어드린 구절들의 전후를 살펴보면, 야고보 형제가 말한 ‘믿음의 행함’은 십일조라던가 또는 무슨 연보를 바친다던가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설명 드리지 않아도 야고보 형제가 말씀하신 믿음의 행함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나... 다시 한번 다짐을 두고 지나가도록 하십시다. 이 구절을 보면 분명히 가난한 자들을 돕는 사랑을 믿음의 행함으로 말씀하고 있지요? 따라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 전반에서 말하는 율법의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믿음의 행함이라던가, 또는 저변 일각에서 되어지는 십일조를 바쳐야 된다던가 하는, 연보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 기왕 야고보서를 펼쳤으니 한 구절 더 참고하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 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경건이라는 말은 믿음과 행함을 포함한 의미의 말로서, 행함의 세부적인 내용을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고 야고보 형제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이 말씀을 따라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모두 저를 보시기 바랍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할 때, 이 말은 바로 ‘사랑의 행위로 나를 시험해 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수차 말씀드렸습니다만, 말라기 당시 제사장들이라던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라던가 이 모두가 한결 같이 가난한 이웃에게로 돌아가야 할 사랑의 몫을 자신들이 몽땅 가로챘습니다. 따라서 말라기가 ‘하나님의 것’이라 할 때, 그 하나님의 것이 바로 이 십일조의 용도, 즉 ‘사랑의 몫’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신자의 당연의무니 뭐니 해서 굳이 하려거든 그 십일조가 여러분 교회내에 어려운 성도들을 위한 사랑의 비용으로 쓰이도록 목적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도하는 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 십일조 강조라던가, 또는 바치는 명분이 최소한 성경적이 될 것입니다. 십일조를 끝내 놓지 못할 것 같으면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드려지는 연보와 사랑의 행위는 결코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라 할 때는 이미 ‘십의 일’이라는 한정적 계산을 앞세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계산과 한정이 없다는 말, 익히 알고 흔히 쓰는 표현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으로서 구원받은 입장에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이 아닌 사랑의 법으로 행위를 나타 내도록 합니다. 그 성령의 역사를 따라 나타나는 사랑은 율법에서 처럼 ‘십분의 일’이니 하는 제한적 계산과 사랑이 아닌, 말 그대로 온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정말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십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식의 따짐은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다시 말씀드립니다. ‘십분의 일’을 계속 따진다는 것은, 곧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미도 폐기된 율법의 명령을 따라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축복은 고사하고, 오히려 저주를 면할 수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알만한 질문 하나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말할 때 무엇이라고 하는가요? ...사랑의 하나님! 그렇습니다.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사랑을 기본 에 놓고 말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을 아무리 철저하게 지킨다 하더라도 이 사랑의 중심과 행위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을 간절히 사모하고 믿는다 하더라도 이 사랑이 없으면 역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랑의 본질과 속성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특히 구약을 보면 백성들이 십일조나 제물을 바치는데 있어서, 거기에 사랑의 정신이 포함되어 있던지 없던지 그런 것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성경 전체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역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온전한 제사를 강요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제사를 자주 드려야 자신들이 챙길 몫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4장 8절을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1260쪽 입니다. 호4:8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이 말이 구어체이기 때문에 요즘 젊은 이들이 이해하기엔 쉽지 않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이 들고 있는 ‘오픈성경’에 되어진 주석을 보면 쉽게 이해 될 것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죄가 많으면 제사도 많고 제사가 많으면 수입도 많기에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타락을 고무했다는 의미...”

다시 부연하면, 당시 제사장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거나 죄 짓는 것을 방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도록 부추켰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자꾸 죄를 지어야 제사를 자주 드리게 될 것이고, 그래야만 자신들이 챙길 제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는지요?모름지기 구약시대나 오늘이나 이러한 지도자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속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깊히 보셔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모르는 것만큼 속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라기 본문으로 돌아 가겠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한 온전한 십일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와 인과 신, 이것은 모두 사랑의 행위를 말한 것으로서, 이 중심과 목적이 빠진 십일조라던가 또는 예배나 제사 이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길 없는 행위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서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다 바쳤다 하는 종교적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중심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자 답게 사랑의 마음을 갖고 그 행위를 매사에 구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이라 할 때는 인간의 인정(人情)적 차원에서 구사되는 그런 측은지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생명을 사랑하시듯한 그런 생명적 사랑, 즉 아카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나중 달리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십일조에 관한 부분만 치중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이미 여러차례 강조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십일조를 하실 때, 과연 사랑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모름지기 십일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셨다 하더라도 고작해야, 십일조를 바쳐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계산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 그 이상의 생각은 못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강해를 듣는 지금부터는 깨어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 다시 요점만 간추려서 이번 주제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저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하신 ‘온전한 십일조’는 철저히 계산된 돈이나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할 때, 이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신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대로 패역한 제사장들은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 여러분 무엇이 저주인지 아십니까? 우리 한국사람 관점에서 저주라 할 때, 대개는 육신의 고난이나 질병, 또는 집안이 폭삭 망한 것 등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상에서, 특히 이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하신 저주는 오늘 우리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런 세상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인 것, 즉 하나님께로 부터 의롭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이나 오늘의 사람들에게나 한결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께 인정(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저주라는 앞의 말은, 율법의 행위가 하나님께 구원으로 인정되었다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길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곧 율법 행위아래 있던 자들에게는 저주의 증거가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또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 혹은 다른 표현으로 유대인, 더 나아가서 오늘 율법의 행위로서 성화구원을 이루어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저주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2천년전,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오늘,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된지 2천년이 다된 지금, 이미도 저주로 끝이난 율법의 행위를,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그 행위를 온전히 나타내야 성화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정처없이 뛰는 한국교회 신자들... 정말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율법 전체도 아닌 십계명만으로 말입니다. 아니,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외우는 것 마저도 제대로 못하는 그 알량한 열심으로 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을 했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어쨌거나 하나님의 구원을 정말 중히 여기실 것 같으면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정말 그래야지만 구원을 받습니다. 부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던가 또는 몇 푼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성화의 길이니, 성도의 의무라는 식의 착각에서 속히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결코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 누구나에게 있는 무속심리를 종교화해서 그 열심으로 아무리 집을 팔아 바치고 헌신봉사 해 보아야 구원은 커녕 세상적 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구절마다 각색해서 무엇을 바치면 복받는다,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라 했으니 기도하고, 금식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받는다는 등, 그래서 오늘도 그 말을 믿고 정처없이 뛰는 사람들, 정말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기도...? 금식...? 그렇지요? 모름지기 대개는 기도나 금식으로, 그것도 철야기도, 금식기도로 구하고 두드리고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뿐 아니라, 교회를 지도하는 자들도 대개는 이 구하고 두드리라는 말을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름지기 이 말씀을 따라 지금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을 했어도 여러분들이 바라는 그 무엇도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후로 무엇인가 채워 주시겠지 하는 기대는 여전히들 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문제입니다. 성경을 자신들 손에 직접 들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도대체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쯤 생각들을 해 보시고 그런 식으로 하셨는지요? 아니면 그저 남이 하는 말을 따라 듣고 그렇게들 하셨는지요?
모두 저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오늘 처음으로 교회를 나온 초신자도 아니고 이미 여러분들 나름대로 열심히, 그것도 수년씩이나 믿는 가운데서 지금까지 성경을 깊이 살피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한심한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 어디에 하나님이 금식을 기뻐하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아마 이사야서 58장 6절 첫머리에 있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이라는 말씀을 생각해서 그러는가 봅니다만, 어디 한 번 찾아가서 확인해 보고 지나 가도록 하십시다. 구약 1038쪽.. 모두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가 큰 소리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하신다고 되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금식말고 다른 행위를 기뻐하신다고 되어져 있습니까? ...무슨 행위요?
그렇지요! 걸핏하면 밥이나 굶고 떼를 쓰는 그런 행위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거든 며칠씩 금식한다 그런 식으로 궁상들을 떨지 말고 너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사랑으로 서로 돕고 위하는 것이 바로 내가 기쁘게 받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 너희들에게 복이 임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서 58장 6,7,8절을 누가 다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 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 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자! 시간이 많이 지났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결론은 여러분들이 취하시길 바라고.. 앞의 마태복음 7장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이 말씀은 오늘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말하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나, 방금 제시한 이사야서의 말씀이나, 지금까지 주제로 말씀드려온 십일조에 관한 말라기의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저주하신 말씀이나, 야고보 형제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할 때나, 그 기본과 궁극적 의미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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