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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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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 15, 16장 말씀(다락방강화)은 성경 전체 말씀에서 핵심이 되며 마태복음 5, 6, 7장 말씀(산상수훈)과 쌍벽을 이룹니다. 전반적으로 예수님의 특성이 잘 녹아 있는 아주 독특한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설교이고, 다락방강화는 생애의 마지막 때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하신 설교로 둘 사이에 3년이라는 공백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이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하신 설교라면, 다락방강화는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비공개적으로 하신 설교입니다. 산상수훈이 예수님 삶의 본질과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다락방강화는 예수님의 죽음과 그 후에 성령의 임재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내면적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락방 강화’
특히 우리가 여행 중이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산상수훈과 다락방강화의 말씀을 읽는다면 예수님 삶의 원리와 본질을 한 눈에 꿰뚫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암송한다며 더욱 좋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락방강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두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신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에서 너무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는 척 하지만 마음속에 근심, 걱정, 염려 등을 한 짐씩 지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신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심각한 대화를 선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락방강화를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또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고 ‘나의 살과 피’라며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상한 말씀과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둘째, 열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던 중에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열두 제자들 중에 가장 믿을 만하고 상징적 존재인 베드로마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다락방의 전체 분위기는 썰렁해졌고 사람들의 마음은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근심하는 제자들
셋째,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시게 되지만,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계속 엉뚱한 소리만 하고 아직도 뭔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두고 떠나신다는 것이 예수님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에 비해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이유를 쉽게 깨달을 수 있었던 비결은 성령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밝히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사람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가장 무서운 것은 암이 아니라 마음의 근심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걱정, 불안, 염려, 의심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암이나 에이즈 그리고 사스는 사람의 육체를 파괴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영혼을 파괴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근심이 없어야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무한대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근심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체적인 질병이 오면 근심하게 됩니다. 회사에서 쫓겨나거나 사업장이 부도나게 되면 걱정하게 됩니다. 그런 일로 우리가 근심하고 불안해하는 원인은 죄책감 때문입니다. 시편에 있는 말씀처럼, 은밀하고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지었을 때 그 죄의 무게가 주야로 눌러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 32:4)는 고백으로 보아 인간은 죄책감으로 인해 영적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하나, 우리가 근심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아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근심하는 마음이 가득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하실에 갇혀 있다면 태양이 하늘에 떠 있어도 볼 수 없듯이, 우리가 근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둘, 근심하는 마음은 우리 미래의 문을 닫게 만듭니다. 삶에 파멸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까닭은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근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어 모두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셋, 근심하는 마음은 최악의 상태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좋은 것을 생각지 않고 항상 부정적이고 절망적이며 파괴적인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넷, 근심하는 마음은 자살을 유도합니다. 항상 최악의 상태에 골몰해 있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합니다.

근심은 허상에 대한 집착
우리가 근심에 대해 상식적으로 알아 둬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이 근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근심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허상일 뿐입니다. 근심하던 것이 실제 상황으로 연결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은 과대망상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잃고 애굽으로 피신해 갑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아내가 매우 예쁜 것을 알고 다른 남자들이 탐을 내어 아내를 빼앗아 갈까봐 괜히 걱정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궁리 끝에 소설을 짓습니다. ‘누가 물으면 누이라고 하자’고 사라와 약속했습니다. 상상에서 출발한 근심하는 마음이 과장으로 발전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구성한 후에 현실에서 구체화했습니다.
둘째, 근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굳게 가진다면 근심은 안개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셋째, 근심하는 마음의 배후에 마귀의 세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에게 염려의 귀신이 들면,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지고 남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근심, 의심, 어둠의 더러운 세력들을 대적하면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1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첫 번째,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으시고 죽을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죽으신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런 가설은 하나의 종교적 허상에 불과할 뿐이지 실현 가능성은 아주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태양은 항상 떠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태양이 더 반짝이고, 믿지 않는다고 태양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태양의 존재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개인의 문제지 태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믿음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항상 살아 계십니다. 마귀는 자꾸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마귀의 말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해 누군가 뒤에서 자꾸 그 말을 속삭여 준다고 고백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속삭인 마귀는 그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넘어지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비존재이시라면 인간도 비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이고, 개인적으로 저는 머리가 좀 빠진 것 외에 별다른 사항 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존재이십니다. 이것이 존재론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안경이 있다면 그 안경을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안경을 맞춰 보니, 이 안경이 어떤 목적을 갖고 제작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이것은 목적론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두 이론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갖고 창조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인생의 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절대로 논하지 않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며 창조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을 말씀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신 분이십니다. 태양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로 논쟁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이미 태양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천국이 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길이시요, 진리시요, 참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근심하는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두 번째,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천국은 있습니다. 만약 천국이 가공의 것이라면 천국이라는 단어조차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처음부터 없는 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보이든 보이지 않던 그 실체가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천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따라서 근심이나 의심 그리고 불안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세상의 삶으로 인생이 끝이라면 우리는 염려하고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영원을 여는 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선물이 됩니다. 곧 부활의 몸으로 주님께 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의 최대 고민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윤회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것일까요? 많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거나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업의 실패가 인생에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병든 것이 인생에 병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죽음, 눈물, 슬픔, 애통, 질병 등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인생에서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들을 잘 정리해 두고 아침마다 읽게 된다면 근심하는 마음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이 있어 죽음 이후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예수님이 오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한 말씀은 없는 천국을 만들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놓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사람들은 율법으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후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믿음으로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3절 말씀을 읽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세 번째,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의 처소를 마련하신 후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 가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심 많고 잘 믿지 않는 우리를 위해 천국행만큼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제가 처음 미국을 여행했을 때, 당시 LA에 여동생이 변호사 시험을 준비 중이던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저의 여행 목적은 미국에 들러 세미나를 하고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의 성지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도착해 오랜만에 동생을 보기 위해 전화했습니다. 그리고 초행이라 불안하니 공항으로 마중 나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짐을 들고 한 시간 정도 기다려도 나온다던 여동생은 나타나지 않고 소식도 없었습니다. 택시를 타려니 동생의 집 주소도 모르지요, 말도 통하지 않지요, 전화 통화를 시도해도 연결이 되지 않지요, 속은 탈대로 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길이 막혀 제 시각에 마중 나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어느 여행객의 차를 얻어 타고 LA로 들어온 경험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미국에 대해 전혀 모른 상태에서 지도 한 장만 들고 찾아간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혹시 귀빈 자격으로 미국의 사절단이 와서 기내 동승은 물론이고 미국에 도착해 최종 목적지까지 안내해 준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천국으로 갈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영과 육이 분리되는 순간에 천군 천사들이 와서 우리의 영을 감싸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죽음에 대해 방황하지 말며 안심하고 눈을 감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열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말고 감사하며 멋지게 살아야 합니다. 저와 같이 암에 걸려도 삶을 ‘엔조이’하며 병을 끼고 사는 것입니다. 고난을 떼어버리는 것도 좋지만, 고난과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즐기는 삶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고난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눈을 돌려 주변을 살펴본다면, 기쁘고 즐겁게 일할 것들이 많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즐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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