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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과 진리와 생명 (요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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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요한복음 13장 33절 말씀으로 인함입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6-37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심정은 나머지 열한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 따라올 수 있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불안을 느끼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알리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에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아버지 집으로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시는 일은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도 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의미는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신 후에 다시 오셔서 친히 우리를 예비해 두신 그 처소로 이끌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적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육적으로 듣고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제 베드로를 대신해 현실주의자이고 회의주의자인 도마가 질문합니다. 5절 말씀을 봅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한 경우가 없습니다. 말이란 서로 뜻이 통해야 말이 됩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의 수준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이큐(IQ)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화의 단절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상적인 생활은 육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상식을 기초로 해서 대화를 나누며 이런 것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문제가 들어오면 육적 사고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로서 세상의 도덕, 윤리, 합리성의 잣대로 재면 맞지 않습니다. 왜 교회는 많은 돈을 들여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느냐, 내국인들에게도 전도해야 하는데, 왜 외국에 나가서 전도한답시고 잘난 체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갈등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둘째, 영적인 것은 훈련을 받고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터득하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설교를 들었지만, 육적인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고 말씀, 기도, 찬송에 익숙하다고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영적인 것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령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기도는 머릿속으로 생각해서 하지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기도할 것에 대해 부담을 주시는 부분을 기도해야 합니다. 찬송이라고 모두 찬송이 아닙니다. 체임버를 하거나 찬양할 때 성령님의 감동으로 해야 참된 것이 됩니다.

셋째, 그러나 육적인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세계로 인도하는 길목이 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는 가장 신앙적인 말을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죽은 후에 부활을 믿고 있었지만, 당장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치 우리의 믿음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번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이 나이에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불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이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마리아의 수가 동네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자, 여인은 유대인인 당신이 어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며 따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알았더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대화와 육적인 대화의 차이입니다.

인생길의 3W와 1H
본문에서 도마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무엇(What)이고 어디(Where)이며 왜(Why) 가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How)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마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 ‘길’이라는 단어 하나를 던졌습니다. 도대체 길이란 무엇인가요? 인생의 가장 기본적 문제가 길이라는 단어 속에 집중돼 있습니다.
모든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세 가지는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길입니다. 인생은 스스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인생의 길이란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6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는 예수님께 무엇이 길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다시 말해 죽음 후의 세계를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며 성경 구절에서 가장 탁원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추리해 볼 수입니다.
하나,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설명해 주실 때 선언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는 무엇이고 무엇이다’는 식입니다. 그런 표현이 요한복음에 일곱 번 나옵니다. 6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선언하셨습니다.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10장 7-9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다.’ 10장 11-14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이다.’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4장 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근원은 출애굽기 3장 14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한 후 장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다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불에 이끌려서 가까이 하던 중에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시며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당신을 누구라고 설명해야 하느냐고 묻자,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출 3:14)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무엇이고 무엇이다’라는 선언적 설명이 여기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여러 길이나 진리 그리고 생명 중에 하나라는 것이 아니라, 절대 신(神)적 권위로 선언적 성격을 가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독특한 선언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
둘, 우리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진리, 생명은 곧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엔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으로 인해 시험에 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원주의자들, 범신론자들, 휴머니스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뭔데 자기만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종교, 좋은 사상이 많이 있는데 굳이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그런 독선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그런 사상을 배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길은 화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사람들에게 막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길이 되셔서 트여진 것입니다. 길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따라서 길은 목표에 이르는 수단과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길에 관해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는 도중에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방황한다고 말합니다.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는 것을 방황이라고 합니다. 또 한 사람은 지름길을 몰라 걸어왔던 길을 계속 맴도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합니다. 길을 가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율법적인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길도 없는 곳을 무작정 가는 사람입니다. 이를 가리켜 무지하다고 말합니다.
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오련이라는 수영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수영으로 현해탄을 건넌 사람입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헤엄쳐 도버해협을 건넌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수영으로 현해탄이나 도버해협은 건널 수 있지만, 태평양을 건너진 못합니다. 곧 겸손한 마음으로 배나 비행기를 이용해 건너야 합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현해탄이나 도버해협은 건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천국으로 가진 못합니다. 인간의 천국행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길의 문제’입니다.
‘기독교만이 절대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전후좌우에 있다. 기독교, 불교, 유고, 이슬람도 좋다. 모든 종교는 하나가 돼야 하지 않느냐’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 세계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참된 진리는 복잡하거나 여러 갈래가 아닙니다. 공자나 석가처럼, 손으로 길을 가리키거나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식의 얘기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길을 걸을 때 방황하지 말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자유케 하시는 진리의 예수
두 번째, 예수님께서 ‘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가려면 조명이 필요합니다. 길이라고 모두 길이 아니며 바른길, 지름길, 안전한 길을 선택해야 됩니다. 잠언 14장 12절을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진리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진리는 곧 예수님을 두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37절에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반대는 거짓, 불의, 불법입니다. 에베소서 4장 18절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떠나면 총명은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의 흐트러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는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9절에 “나의 깨닫는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사기꾼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되어 갔습니다.

빛이 되신 생명의 예수님
세 번째,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이다’고 선언하십니다. 생명이란 삶의 근원이자 에너지입니다. 생명은 변화와 부활과 거듭남을 잉태해 줍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정의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고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다’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생명이 있고, 마귀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죽음이고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바이오’ 생명이란 동식물의 생명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이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3장 36절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고, 그 길을 비춰주는 진리이며, 그 진리 안에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 진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약 태양이 두 개라면 지구는 매우 뜨거워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두 분이라면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나보다 둘이라서 복잡하고 불편한 것이 더 많습니다. 1+1=2이지, 1.99999라든지 2.00001이면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 구원, 자유도 하나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이런 절대 진리를 상대 지식이나 진화론적 사고에 연결해 희석시켜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 학문의 대상, 지식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논쟁의 대상은 더욱 아니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논쟁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 존재에 대한 설명 없이 곧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며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은 오직 예수
하나님에 관해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입니다. 하나님께선 인간의 경배와 찬양의 대상일 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해야 합니다.
인간은 여러 갈래 길이 있고 다양한 진리가 있으며 많은 형태의 생명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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