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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리라 (요 1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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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메시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신 후에 다시 데리러 오실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락방 강화의 내용
두 번째 메시지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아버지를 알았고 또 보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 것을 믿는다면 두 가지 기적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보다 큰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예수님께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모든 것이 끝장나고 수포로 돌아갈 것인데, 제자들에게 기적과 축복을 약속하시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기적과 축복이 계속 된다고 말씀하시는 결정적인 비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믿는다고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 굉장한 충격을 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아주 새롭고 놀라운 진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16,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간구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보혜사의 강림을 약속
‘또 다른 보혜사’란 헬라어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분’,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에 대해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 주시는 분이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인격이 다른 예수님, 다른 대언자, 다른 위로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똑같은 역할을 하시는 보혜사께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모습은 다르지만 보혜사는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적과 축복 그리고 약속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곧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성령님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16절 말씀을 통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또 다른 형태인 예수님께서 영으로서 다시 오시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에 대해 성령님을 체험하기 전에는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죄 문제와 부딪히게 될 때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죄 문제, 성격 문제, 인생 문제 하나 해결하시지 못한다면 우리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개인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실 수 없다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신이라면 우리에게 변화가 있어야 하고, 개인적 제(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선 권능자이십니다.

또 다른 예수님이신 보혜사 성령
16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 예수님의 또 다른 형태로 오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둘,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세상으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요청하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은 보혜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단적으로 말해 보혜사 성령님의 덕분입니다. 사람이 똑똑하고 유능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수양이나 득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성령충만을 힘써야 합니다.
셋, 보혜사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동일하게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지만,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선 시공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은 시공의 제약을 받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수천, 수만, 수백만 명을 동시에 믿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도 순식간에 일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경험으로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면 모든 현상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17절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 보혜사 성령님께서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류와 모순투성이지만 성령 하나님께선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오류와 모순이 전혀 없으십니다.
둘, 세상은 능히 보혜사 성령님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박사 학위를 받거나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다 해도 사람의 이성, 지성, 지식 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우리는 알고 믿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33세 된 한 청년의 죽음이 나의 구원으로 믿어진다는 사실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셋, 보혜사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과 상관없이 개인의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또 좋은 메시지를 듣게 되면 기쁨이 솟아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는 성령님
세상은 능히 성령님을 받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받아 알고 믿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성령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그분은 우리 안에,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크리스천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크게 세 번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영원히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가슴에 손을 얹어 보면 그 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며 위기를 넘기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실체를 느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잠이 들어버리자, 아내가 노트에 이렇게 써놨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깊은 밤에 홀로 설교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은 가까운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님 안에 있고 성령님께서 제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개인적인 근심과 걱정을 모두 털어버리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이며 이런 방법으로 주님의 기적과 축복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열렸던 집회에서 딘 셔먼(Dean Sherman)은 믿음으로 선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미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성령님의 음성 듣기를 고대할 때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가짐도 없이 그 사실마저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 체험의 실례(實例)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었을 때와 성령님을 체험했을 때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교회 생활, 행사, 설교 등에 상당히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체험하고 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성령님의 그 힘이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힘을 느낄 수 있었는데,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할 때 예전과 다른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또 성령님을 체험했을 때 나타난 현상으로 귀신들을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전에 볼 수 없었던 더러운 정욕, 욕심, 귀신들의 활동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을 체험한 후에 저는 놀랍게도 예수님께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삼위일체에 대해 무감각했는데 지금은 삼위일체의 진리가 가슴을 저리게 만듭니다. 진리에 대해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육체의 본능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함과 연약함과 질병과 죽음에 대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약하고 미숙하며 불완전하지만 그 사실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제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에 안심이 됩니다. 예를 들어 실수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밀고 나간다는 담대함마저 생겼습니다. 이것도 성령님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18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의 고아처럼 살고 있습니다. 마치 우주의 모든 고민을 혼자 지고 있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독이나 외로움 등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불안, 소외, 허무함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오직 기쁨, 감사, 찬양, 승리, 축복, 믿음 등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9절 말씀을 읽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살아있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날’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를 말합니다. 즉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후를 말합니다. 그때 성령님과 접속하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접속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켜라’
포도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가면 곧 말라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결론으로 21절 말씀을 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신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14장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과 하나님의 말씀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에 순종하는 말씀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오늘 예배 후에 나누게 될 성만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접속되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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