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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까닭 (요 15: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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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몇 가지 관계를 가집니다. 첫 번째는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새끼를 보호하고 젖을 먹이면서 사랑을 합니다. 젊은 남녀는 만남을 통해 자연적으로 서로 끌리게 되고 사랑의 불길을 댕기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랑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본능적이고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의무적이고 쌍방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도 나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배신하기 때문에 나도 너를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식 사랑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그럴 듯하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떤 두 사람이 서로 견원지간인데,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듯이, 사랑은 서로 주고받을 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주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인 것 같습니다.

의지를 갖고 택한 사랑
세 번째는 일방적이고 의지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상대방의 반응, 조건, 환경에 상관없이 마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 그리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그냥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무엇이 그리 좋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무조건 좋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받길 원합니다.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가 그런 사랑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의지를 갖고 서로 사랑하기로 결정했는가 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의지적 결정을 가리켜 ‘선택’(選擇)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본능과 의무를 넘어서 의지가 필요합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하다가 결혼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것은 두 남녀가 인생을 해로하면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얼굴에 화상이라도 입어 평생 핸디캡을 안고 살게 되더라도 서로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대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추측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16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선 지극히 선택적이고 의지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전혀 다른 네 가지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네 가지 형태의 예수님 사랑
하나,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택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면 멀리 도망한 전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과오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본능적이고 의지적인 차원에서 좀더 발전하면 자신이 그 사랑의 주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본인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실패하는 원인은 본인이 스스로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 그 사랑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바로 나야!’라고 자신합니다.
그러다 인생을 살면서 나이가 들고 실패를 경험하며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이 사랑의 주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또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는 것도 가식의 일종이라는 사실도 배우게 됩니다.
둘,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능력이나 조건이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핏줄이라는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아무 조건도 없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분의 선택적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님의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 원성에 해당하는 할 말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 많던 할 말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주님,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 속으로 들어가 저의 인생의 작은 부분이라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셋, 예수님의 사랑은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은 세기적인 사랑이라며 떠들어대지만, 그 사랑의 마지막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전쟁을 일삼아 파멸시키고 서로 비참해지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축복을 만들고 축복은 행복을 만듭니다. 사랑은 파괴가 아니고 복수도 아닙니다. 절망, 좌절, 포기는 더욱 아닙니다. 사랑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고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사랑은 죽어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합니다. 사랑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쳐 줘서 폐쇄적이고 부정적이며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런 사랑의 힘은 20여 명의 노인들과 여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유영철도 얼마든지 녹일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100명을 죽이고 싶었다면서 20여 명을 죽인 것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자라온 과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해 깊은 상처를 입고 인격이 파괴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짐승보다 못한 그런 사람마저 녹일 수 있는 것도 사랑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김대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20명 가량 인명을 빼앗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구치소에 뛰어 들어가 계속 그에게 전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저항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가는 길에 신체 장기를 기증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또 저는 강남 서진 룸살롱 살인 사건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은 한 형제와 지금까지 교제하고 있습니다. 가끔 인간의 힘으로 그런 교제가 가능할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과실을 많이 맺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넷, 사랑은 기적을 만듭니다. 우리 서로 사랑해 봅시다! 자신에게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미움, 분노, 증오의 벽을 넘어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정치 세계에도 정적이 있고 사업에도 경쟁자가 있듯이, 우리도 살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은총이요, 응답 받을 때 더욱 큰 은총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모두 이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찌 보면 착취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상대방의 시간, 열정, 돈을 빼앗고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면서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복을 주신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봐야 남에게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가치 ‘용서’와 ‘사랑’
오늘날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원한 가치는 바로 용서와 사랑입니다. 시대와 역사와 문화와 환경마저 초월하여 이룰 수 있는 영원한 가치도 용서와 사랑입니다. 모든 민족과 나라와 언어와 인종을 뛰어 넘는 것도 바로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주님의 최고 명령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경험한 주님의 사랑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워하고 비판하며 고발함으로써 각자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웁니다. 그들이 싸울 때,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짐승처럼 변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고 용서가 아니라 복수이며,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찾아 헤집고 다닙니다. 어둠은 빛이 찾아왔을 때 환영하지 않으며 결코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양식은 환영이 아니라 거절이고, 칭찬이 아니라 비판인 것입니다. 빛의 자녀에 대한 본질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읽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세상이 교회를 곱게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지 못한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교회가 세상에서 존경받지 못할 일을 많이 한 것도 한 가지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각 분야의 안티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인간들은 각종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악한 표현들을 서슴지 않고 마구 내뱉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는 바람에 그리스도인들마저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에 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핍박하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모함하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적대하는 것은 곧 그분께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본질은 어둠이지만 예수님의 본질은 빛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 5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싫어하는 데는 영적 원인이 있습니다. 그 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교회가 일시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과 본질적으로 빛을 싫어하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까닭은, 어둠인 세상이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은, 엄밀히 말해 우리의 허물과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신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 12절 말씀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해외 선교지에 나가보면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선 예수님을 전도한다는 이유로 현지 정부로부터 쫓기고 숨어 지내야 하며 때로 붙잡혀 감옥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기도 합니다. 현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물러나야 하고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사회적 시선을 의식한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는 가족을 죽여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양식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환영받고 잘 나간다면 아마 그 사람은 가짜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빛의 역할을 하지 않고 어둠과 동조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세상은 그 사람을 이용해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핍박할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그에 대한 좋은 사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읽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의 소속은 세상이 아닌 예수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모함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로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즘 진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소속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쪽에 속해 있으면 이 쪽으로 가야하고, 저 쪽에 속해 있으면 저 쪽으로 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참 진리는 당 없고 파도 없으며 소속이 다르다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에 깜짝 놀랄 정도로 북한 찬양 사이트가 많아졌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이트도 많아졌습니다. 그것도 정당한 공격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의도된 공격들입니다. 이유는 기독교가 그들과 입장을 달리하고 소속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23절 말씀을 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모함하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고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들에겐 물질과 권력이 신이기 때문에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무신론(불가지론까지 포함)이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마귀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무신론 사상은 궁극적으로 마귀를 섬기는 일이 됩니다.
이미 세상 사람들은 사탄에 유혹돼 우상, 물질, 권력 등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것을 숭배하든 자신을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만 제외한 다른 대상이 무엇이든 숭배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미신이 많은가 봅니다. 그래서 점을 치러 다니고 많은 부적을 갖고 다니는가 봅니다. 귀신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높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도님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길 원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참 진리와 영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고 빛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그들로부터 조롱도 받고 핍박도 받으며 고난 속으로 들어가 승리하는 차원 높은 믿음의 경지를 체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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