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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요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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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속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능력을 보이시는 까닭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머무실 때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36가지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해결한 구원

이 기적 중에 기적, 표적 중에 표적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3번에 거쳐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의 경우에는 야이로가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간구할 때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하러 가시는 도중에 12년간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을 붙잡았고 그 사이에 아이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다음으로 살리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장지에 가는 도중에 관속에 있는 자를 살리신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후상의 문제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장례를 치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속에 있는 시신은 죽은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보면 이 두가지의 기적들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요한복음 11장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상태였습니다. 이미 시신은 부패해서 냄새가 났습니다. 주님은 이런 상황에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여러분,
기적 중에 다른 것은 다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는 막강합니다. 로마서 5장 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죽음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스럽게 하며, 슬프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나님께 보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경우는 장례식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죽음을 날마다 대합니다. 죽음을 마주한 유족들은 예외 없이 혼란스러워 하고, 슬퍼하며, 힘들어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천국을 믿고, 영생을 믿고, 구원의 확신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은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권세로는 죽음이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진시황, 알렉산더 대왕, 시저의 권세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돈으로도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건강관리를 잘 해 왔다 하더라도 죽음이 부르면 가야 합니다.
죽음은 인류 최대의 원수입니다. 죽음은 가는 자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의 삶도 온통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불에 데인 것처럼 아픕니다.
진정한 구원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이 이생이 전부라면 우리는 어쩌면 가장 불행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 된 자 앞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죽은 자를 일으키신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고, 여러분이 예배하고 찬양하는 그 분이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곁에 있었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야기 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이미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진작 오셔서 오라비를 살려주시지 않으셨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도 이런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왜 진작 오시지 않았는지, 왜 그때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으셨는가’를 질문하곤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1∼3절을 보십시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는동안 일정한 거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에서는 베드로의 집을 중심으로 사역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에 계실 때 거처하시던 곳이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머리둘 곳이 일정치 않으셨던 예수님이 자신의 집처럼 편하게 쉬셨던 곳이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는 친밀한 관계였고 그분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이러이러한 상황이 생겼다고 알려드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실 형편이 못되신다고 해도 말씀으로 고쳐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도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사람 중 누군가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병이 나을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그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주님의 대답을 아니 들으니만 못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약속을 받았는데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말입니다.
더구나 그때에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멀리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룻 길이면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들은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면 예수님이 서둘러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체하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사실은 나사로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신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저하신 원인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무렵에 나사로는 이미 숨을 거뒀을 것입니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룻 길은 걸렸을 것이고, 예수님은 이틀을 더 지체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룻 길을 걸어 나사로에게 가셨을 것을 생각하여 시간을 계산해 보면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이 예수님께 전해질 무렵에 그가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죽지 않을 자를 억지로 죽이는 경우는없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놀라운 일에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신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이틀을 더 지체하신 것은 놀라운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나사로의 죽음이 완전히 확인되기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들이 고통중에 있을 것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편치 않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불평을 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신 것에 대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거기 없었던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급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언제 개입해야할지 언제 주셔야 할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진작 응답해 주셨다면, 그 때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왜 여기까지 상황을 몰아가십니까?’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지체된 응답, 지체된 일이 오히려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주님이 금방금방 응답하셔서 무엇인가를 받는 경우는 따져보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금방 응답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큰 증거가 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포기했을 때 응답하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영광을 받으십니다.
기다림이 진짜 믿음입니다. 믿음은 기다릴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셨지만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3년동안 가르친 것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도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로부터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들으신 후로부터 십자가와 부활과 영생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어떤 제자도 이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요 죽음도 끝이 아니며 그 너머의 영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부활하실뿐 아니라 예수안에 있는 우리들도 마지막 때에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시로 나사로의 죽음을 사용하셨습니다.

마르다의 신앙고백

여러분,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이 죽음에 대해서 ‘잠잔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잠자는 것을 보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깊이 잘 수록 오히려 좋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27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이 말은 분명하고, 완벽한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은 겨우 몇명 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3년간 예수님으로부터 교육을 받고도 지성으로 깨닫고 이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에 도달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도 이 믿음의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으리라는 고백 또한 큰 믿음입니다. 이것은 ‘주님만 곁에 계시면 불가능은 없습니다’라는 고백인 셈입니다.
더구나 주님이 나사로가 죽지 않으리라고 한 연후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르다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그 와중에서도 ‘이제라도 주께서 원하시면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또 이런 고백도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을 믿지만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에게는 주님이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과거적인 믿음도 있었고 장차 주님이 오시면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는 미래적인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고 완벽한 신앙고백도 있었지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나사로를 일으키리라는 믿음, 절망에서 나를 일으키시리라는 믿음, 이 문제의 고통속에서 나를 다시 회복시키시리라는 현재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문제에 깊이 빠지면 믿음을 미래에 둡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역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이 아니라 먼 미래에 소망을 두는 믿음을 갖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삶을 다스리시므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믿음은 부족합니다.

마르다가 믿지 않았다는 것은 곧 드러나고 맙니다. 그녀는 무덤의 돌을 치우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자 이미 죽은지 한참이라 시신이 부패해서 냄새가 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마르다는 믿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강한 믿음이 있었지만 죽음의 현실앞에서 믿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우리도 작은 시련 앞에서 그 믿음을 내려놓을 때가 많습니다. 모두가 이미 끝난 일이라서 이제는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포기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34, 35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통분히 여기고, 민망하게 여기시고, 슬피 우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셔서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잃은 고통과 슬픔을 아십니다. 우리가 당한 일들이 얼마나 슬프고 힘든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주님이 통분히 여기시고 분노하신 것은 그들이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주님은 절망과 고통 앞에서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 이미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셨는데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를 보고 애통해 하실지도 모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행동하십니다. 그러한 순간 방해하는 사람은 오히려 믿음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자들의 얄팍한 믿음과 신앙과 성경지식이 하나님의 일을 제한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손놓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안에 죽어 있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역사하시고자 하실 때 그것을 막고 있는 불신의 돌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옮겨야 그 안에 죽어있고 썩어 있어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 믿음으로 드러나서 생명이 역사하실 때 우리에게 온전한 회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믿음의 역사를 포기해서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놓고 믿음을 적용하지 못하는 우리의 한 부분을 다루시기를 원하십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여러분,
그렇게 매달려도 응답받지 못해서 포기한 문제라도 지금부터 믿으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41∼44절을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이 말씀은 중보기도입니다. 우리보고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절망에 빠져있고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있어 사망에 종노릇하는 우리, 믿음을 발휘하지 못해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서 중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안에서 중보하고 계십니다.
어떤 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떤 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제일 어리석은 일은 포기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흔들릴 수도 있고, 실족해서 넘어질 수도 있지만 제일 나쁜 일은 포기하는 일입니다. 끝까지 가십시오. 주님은 해결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마르다보다 좋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신앙도 실족한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지 못했을 때 제자들조차도 쓰러지고 넘어졌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어쩔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존심이 죽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보호장치들이 다 죽을 때 그래도 우리가 감사하고 평안을 잃지 않는 것은 내가 죽으면 우리 안에 부활의 열매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잃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고난이 와서 세상 것을 잃을 지라도 그것들이 죽으면 생명이 역사할 것입니다.
바울처럼 이런 고백을 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세상을 향해 죽으면 날마다 부활로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 고집, 정욕,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죽고 내 안에 부활 생명으로 사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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