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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에 팔려가는 예수 (마 26: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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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팔려가는 예수(마 26:14-16)

지금 이 기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이 조명해 보는 사순절이 계속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이 수난의 역사는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데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유다를 말할 때는 언제나 그 앞에 가룟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이 가룟은 지명입니다. 그리욧 사람인 유다라는 말로써 현재는 지역 이름이 카르야테인 이라
고 하는 지방 출신 유다라 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같은 이름이 많아서 이름 앞에 지역 이름을 언제나 붙여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막달라 지방 출신 마리아라는 하는 말입니다. 이 유다는 3년 동안 13명이 살아가는 생활의 재정 문제를 담당한 재무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 수학 능력이 빠르고 규모가 있어서 살림을 계획성 있게 할 수 있었기에 그 중에서 그런 직책을 맡아서 수고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그가 무엇 때문에 몸값을 받고 지금까지 진리의 가르침을 하시던 스승 예수님을 팔아 넘겼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을 돈 받고 팔아먹는 문제는 예나 오늘이나 인신매매라고 하는 최악의 악덕상인으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영원히 씻지 못할 죄가 있다면 인신매매를 했다는 것입니다. 저 South Carolina charleston에 있는 옛날 그 노예 시장을 하던 건물 하나를 그대로 박물관 같이 보존한 노예 시장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거기 구경간 적이 있는데 지
금 이 교회당 만하게 시장을 지어놓고 그 안에 보면 감옥소 철창처럼 쭉 칸칸이 막아놓고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그 창 속에 다 집어넣어서 시장을 열면 노예를 살 사람들이 그 시장에 와서 쭉 둘러보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끄집어 내가지고 계산대에 나가서 계산을 해주고 끌고 나가던 그런
시장 하나가 옛날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도 인신매매자들은 있어서 어린 소녀들을 윤락가에 팔아 넘기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악덕 포주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도 인신매매의 기록은 여러 군데 나오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요셉은 은 20에 팔려 노예로 애굽으로 갔다는 기록도 볼 수가 있는데 예수님은 은 30에 팔렸으니까 요셉보다는 조금 비싸게 팔렸습니다. 이때의 은 20이나 30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첫째로는 유다는 매우 계산이 빠른 사람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자신의 살 길을 찾은 것입니다. 이미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의 갈 길은 예수님 자신의 고백으로 분명하여 졌습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점점 굳어져서 아주 심각하게 제자를 주변으로 다
가오고 있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유다 뿐만은 아닌 것 같아요. 인간은 누구든지 어려운 경우에 자기 살 길을 찾아서 약삭빠르게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는 민족 수난의 역사 속에서 불행하게도 친일파 문제가 생겨서 인간관계를 어렵게 했는데 그 판국에서 자기 살 길을 찾다보니 친일파가 되었고, 또 공산당이 밀려 닥치니까 재빠르게 그 쪽으로 몸을 돌려서 살 길을 찾은 사람도 민족 가운데 많이 생겼고 또, 정치나 사회 어디서나 어느 길을 선택해야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최대의 관심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12제자도 빠짐없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로부터의 국권 회복을 시킨다고 생각해 왔고 자기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혁명적 노선에 적극 참여하는 혁명 동지요 주체 세력이라고 자신들을 믿어 왔습니다. 그럼, 그 일이 성공한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거기에 큰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따라 왔는데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시고 그 시간이 점점 더 임박해 왔을 때 이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제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변하지 않고 계속이 됩니다. 승천하시는 현장에서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마지막 그 관심을 질문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예수님이 갈릴리 전도를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실 때 나귀를 타고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그 길에 많이 모였습니까? 얼마나 예수님을 환영했는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깔고 당나귀가 그것을 밟고 지나가라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환영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그랬습니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수도인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올라오는 혁명군으로 모두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결정적으로 다 틀려졌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바랬던 예수님은 정반대의 상황, 사형수가 되어 죽는 일이 지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계산이 빠른 유다는 자기 살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이 일에 적극 동참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현실에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생각해 낸 것이 예수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을 세우면 그 공로가 인정되어 자기는 살 것이라고 판단이 됐습니다. 빠른 계산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에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먼저 제안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일을 꾸며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왕에 그런 일을 추진하려면 돈이나 챙기자.' 그런 계산이 또 나왔습니다. '망해 가는 집안에 건질 것이 무엇인가? 돈 챙겨 달아나자.' 이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은 팔아 넘기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돈을 만지다가 돈에 대한 불의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가 물질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은 요한 복음 12장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 불평을 합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가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거기 유다의 생각을 요한 복음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라.
300데나리온이 헌금 궤에 들어가면 그것을 훔쳐가려고 그런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는 돈에 눈이 어두워진 도둑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험악한 판국에 예수님을 팔아먹고 돈을 챙기는 머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보화라고 말할 때 무엇을 말하는가 세 가지가 보화입니다.
첫째는 옷입니다. 옷이 얼마나 귀했는지 성경에 나오는 옷 사건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한 나라의 최고 군대사령관이 엘리사에게 와서 문둥병을 고치고 그 값으로 귀한 선물을 했는데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 사령관이 최고의 큰 은혜, 문둥병을 고
치고 나서 옷 두벌을 준 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 사형을 당해 죽었는데 그 이유는 전쟁을 하고 그 전리품 가운데 아주 아름다운 외투 하나를 훔친 것이 죄목이 되었습니다. 옷이 보화입니다. 더 뚜렷한 일은 예수님 돌아가실 때 입으셨던 홍포를 누가 갖느냐 그 사형 현장에서 제비 뽑았다고 하였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에게는 옷이 보화입니
다.
두 번째는 식량입니다. 먹는 곡식을 보화로 취급하여서 식량 구하는 이야기는 성경에 수없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돈입니다. 옷과 식량과 돈은 유대인이 가장 귀하게 취급하는 보화가 됩니다.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이 돈에 대한 정의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사용자에 따라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기쁨을 돈이 우리에게 줍니
다. 하나는 버는 기쁨이고 또 하나는 쓰는 기쁨입니다. 물질은 절대 죄악시 하거나 경멸하여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벌 수만 있다면 힘껏 벌어서 훌륭하게 사용해야 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이 돈에 대한 경고는 물질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어느 사회나 끔찍한 일이 좀 벌어지는데, 아버지 재산을 빨리 차지하기 위해서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 Houston Texas에 가면 Houston에서 제일 부잣집이 있는데 Oil 부자입니다. 석유 재벌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 죽었어요. 범인은 분명히 그 집의 큰
아들이라고 다 소문이 나 있는데 물증이 없어요. 그래서 그 집은 지금 관광 코스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저도 가봤습니다. 아버지를 빨리 죽여야 이 거대한 재산이 자기 사용의 권한에 들어온다는 계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L.A에서도 베버리에서 사는 갑부의 두 아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몇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생겼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까? 그래서 성경에서는 제일 경계하는 일이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이 내 마음에 우상화되어 버리면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끔찍한 일도 저지르게 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우상이 되어 버리면 한 가지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죽여야 됩니다. 유대인의 격언 가운
데 '돈을 잘 지배하라 그리하면 돈은 당신에게 충성된 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돈을 섬기면 그는 당신에게 폭군이 될 것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했다는 뉴스가 나간 후에 신문에 누가 만화를 그려서 제가 봤습니다. 돈 많은 아버지가 아들한테 죽을까봐 걱정을 해요. 그래서 아들을 오라고 해서 앉혀놓고 약속을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은 다 네 것이니라. 아버지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니? 나 죽은 다음에 네 마음대로 쓰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것은 아마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 해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 뜻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만화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는 글이 써있어요. '오래 살려고 보약만 먹으면서…'
제가 지나가는 목사님을 설교를 한번 시켜서 또 들은 일이 있는데 그분은 자신의 과거의 고난스러움을 간증했는데 재미가 있어요. 그는 뭐, 반공 포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포로생활을 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석방은 됐는데 포로 출신이 일가 친척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고 오고 갈 곳도 없고 그런데 자기는 그래도 어려서 교회 열심히 다닌 기억이 있는데 그래서 대한민국 거리를 어디를 가서 잠을 자고 어디에 가서 밥을 먹고 주머니에는 돈이 하나도 없고 갈 곳이 없어 이리저리 거지처럼 돌아다니다가 밤새도록 잘 곳이 없어서 헤매다가 이렇게 보니까 어느 조그만 교회, 판잣집 다 쓰러져 가는 그런 교회가 하나 있는데 새벽기도 하려고 불을 켜놨더래
요. '아이고, 교회를 바라보니 내 팔자에 맞는 교회가 하나 있구나! 불 켜놨으니까 한번 들어가 보자.' 그래서 들어갔답니다. 교인이 아무도 없더래요. 불은 켜놨는데 아무도 없고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 교회인데 '아이고, 교인도 아무도 없구나. 어쩌면 내 팔자하고 이 교회하고 맞느냐!' 그래서 들어가서 할 일이 없어서 팔자에 맞는 찬송가를 한 곡 불렀대요.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혼자서 눈물 흘리면서 찬송가를 했더니 목사가 나오더래요. 아마 자기 생각에 아무도 안나오니까 목사가 항상 불만 켜놓고 안나왔던 것 같은데, 어느 한 사람이 와서 노래를 부르니까 목사가 안 나올 수가 없어서 나왔는데 나와서 이 목사는 더 팔자에 맞는 찬송을 부르더래요.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둘이 팔자에 맞았대요. 야!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묘하게… 그런데, 그 친구가 그 길을 통해서 목사가 됐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다니까요. '돈이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고,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을 살 수가 없도다. 돈
이 집은 살 수 있으나 가정은 살 수가 없고, 오락을 살 수 있으나 기쁨은 살 수가 없도다.' 서양 격언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30이 자기 삶에 분명히 행복이 될 줄 믿었기에 그런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성경에 나옵니다. 오늘 말씀이 26장인데, 27장에 가면 유다는 자기 손에 들려져 있는 은 30냥을 보고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저주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파멸의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돈 30냥을 들고 그것을 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반갑게 말해주고 돈을 주던 자들은 '네가 지은 죄다. 너의 죄 값은 네가 당하라.' 저주를 해버렸습니다. 유다는 들고 온 은 30을 집어던지고 자기 파멸의 갈등을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는 예수를 배반한 자의 그 마지막이 어떻게 비참했는가를 조금 끔찍하게 묘사했어요.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그냥 그대로 묘사해 버렸어요. 만약 유다가 돈에 노예가 되지 않고 그 명석한 머리로 의로운 판단을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장렬한 동참을 선언하고 나섰다면 지금쯤 기독교의 역사는 유다에게 기울어져 있을 것입니다.
기왕에 죽을 것을 생각하나 잘못함으로 영원한 죄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보화를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
뭐, 예수님이 괜히 그러셨겠습니까?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에요? 가장 안전한 투자일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진리이던가 아니면 예수님이 거짓말하셨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돈을 선택한 유다는 하늘나라 열 두 보좌의 상징인 12사도의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맛디아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세상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어떤 사람은 재벌이 되고 어떤 사람은 농부로 살고 어떤 사람은 선생님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또 거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똑같은 때가 두 번 있습니다. 낳을 때와 죽을 때입니다. 시작과 끝은 똑같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지혜가 많았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죽은 다음에 입히는 수의를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남자나 여자가 거의 같아요. 그런데 그 수의에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주머니를 달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가져가는 것이 없다는 인생의 마지막을 표현한 것이랍니다. 결국은 똑같아지고 맙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3년 동안 같은 환경에서 같은 목적을 두고 같이 살아왔는데 하나는 순교자가 되어서 지금까지 빛이 나는 이름의 베드로가 되었고, 가룟 유다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인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생각 하나를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가 돈 숭배만 안했다면 유다도 그 꼴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유다의 경우는 주어진 소유가 불행이 된 것입니
다. 예수까지 팔아서 얻은 은 30냥 때문에 그는 자기 파멸의 갈등에 자살해 죽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쓸만한 말을 했습니다. 도둑놈도 강도도 절대 못 가져가는 영원한 내 소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못 가져가고 아들도 딸도 절대로 못 가져가고 남편도 아내도 빼앗지 못하는 절대적 내 소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먹은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사업에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맞아요. 돈 잘 버는 사람과 못 버는 사람을 보면 돈 잘 버는 사람들은 돈을 종으로 부립니다. '너 따위 때문에 내가 너한테 굴복할 줄 아느냐? 네가 뭔데?' 또, 쓸 때는 아주 멋지게 쓰면서 겁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돈은 그 주인의 명령이 무서워서 줄줄 따라 온답니다. 그러나 돈만 보면 벌벌 떠는 돈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돈이 말하기를 '내가 저 따위 사람에게 갈 필요가 없다.' 하고 안 따라온답니다.
스승이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서까지 돈을 얻어야 된단 말인가? 아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 남편은 장례하고 돌아온 부인이 신문에 이런 말을 했어요. 자기 남편이 자기 아들한테 죽었어요. 장례식을 치러야 될 것 아니에요? 돌아와서 그 저녁에 가족들을 모아놓고 '자, 우리 가족 전체는 공동 자살하자! 어떻게 살겠니? 이게 뭐냐? 우리 집안이 그래도 괜찮게 사는 집안인데 돈 때문에 우리 집안이 이 지경이 되다니!' 지금 가룟 유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살 수가 없어서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늘 나라의 상징인 12 보좌에 한 그림자 한 자리를 차지하던 사람이 아닌가? 내가 어찌 이렇게 되었는가?'
은 30에 팔려 끌려가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 나라 옛날 주 기철 목사님께서는 그때를 연상하면서 영문 밖에 끌려가는 예수님을 상상적으로 meditation하시면서 나의 마지막도 저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복음성가 한 절을 지었잖아요? 옛날 옛날 우리가 어릴 적에 잘 부르던 복음성가!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신 두 어깨에 십자가
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에 길이라네.' 자기도 그렇게 죽었죠.
예수를 버리고 얻고자 하는 행복! 그것은 가장 큰 불행이 왔습니다. 여러분! 다른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소유하십시오. 그것이 오늘 사순절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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