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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사적 교인 (행 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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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적 교인(사도행전 17:10-15)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선교에서 일단은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그로 인한 박해로 말미암아 피신을 해서 그는 사십 킬로 서쪽에 떨어져 있는 베뢰아로 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이방사람들로 인하여 핍박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고생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빌립보 감옥의 문이 열리는 아주 드라마틱한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감옥에서 통쾌하게 옥사장을 전도하고, 빌립보교회가 서고, 그리고 당당하게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방사람들로 인해서 오는 무지한 핍박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정면적으로 견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대사람들의 핍박을, 율법적으로, 혹은그들 나름의 유대주의적 신학적 이견으로, 특별히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오는 이런 핍박을 사도 바울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무지몽매한 이방사람들이 끌어다가 때리는, 그런 고통이라면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또 그로 인한 결과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는다는 유대사람들이 시기 질투해서 아주 계획적으로 핍박하는 데 이르러서는 견디지 못하고 피신하여 베뢰아로 옮겨갑니다.
베뢰아로 가서도 그는 역시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활동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자기의 규례대로, 자기의 습관대로, 어디 가서든지 그는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라고 증거 하였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아주 대단히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11절)'-여기 '신사적'이라는 말이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헬라말로 '유게네스테로이'라고 하는 이 말은 어원적으로 재미있습니다. 유게네스라는 말은 바울과 누가만 몇 번 사용한 특별한 단어입니다. 뜻은 '태생적으로 고상한'―출생적으로 귀족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후천적인 게 아니고, 선천적으로 그렇게 고상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noble man 혹은 noble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이 누가복음 19장 12절에서는 '어떤 귀인이'라고 번역되고,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는 '문벌 좋은 자'라고 번역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고상하게 태어난 귀족적 신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고 고상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 의미를 좀 깊이 생각해보면, 먼저는 태생적으로, 천성적으로 심성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이 후천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아예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아주 못된 사람이 있는가하면 급한 사람도 있고 온유한 사람, 성품이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술이라고는 아예 못 먹는 사람이 있지요. 술 가까이에만 가도 온몸이 벌개진다 할 정도로 못 먹습니다. 체질적으로 술을 먹을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먹으려고 해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타고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술을 아무리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그것도 타고난 것입니다. 예수 믿는 데도 그렇습니다. 성품적으로 예수 믿기에 아주 체질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내적으로 아예 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고 증명하려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더 아파야 합니다. 시련을 더 많이 겪어야됩니다. 매도 많이 맞아야 변화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는 '신사적'이라는 말은 천성적으로 아주 심성이 좋고, 인간됨의 바탕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별로 열등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을, 특별히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근심이나 의심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 이것이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무슨 말도 정직하게 받지 않고, 그대로 받지 않고, 곡 비비꼬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무슨 말이든 일단 의심부터 하고 나쁘게만 보려 합니다. 불행이지요. 좀더 밝은 면으로 볼 수 있는데 어두운 면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사람 아니겠습니까? 비신사적입니다. 신사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면으로 볼 줄 알아요. 좋은 면으로 들을 줄도 알아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조금 참고들을 줄 알아요. 이게 바로 신사적인 것입니다. 무슨 말을 아예 의심하고, 모든 일을 나쁘게만 보려고 하는 심성은 본인에게도 참 불행하고, 특별히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 크게 방해되는 좋지 않은 심성입니다.
세 번째로. 편견이 없다는 것입니다. '편견은 무지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경험, 나의 지식, 그것만을 고집하고,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마음 문이 열리지 못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이 '신사적'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 옮겨왔어요. 영어성경에는 'open­mind'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열려 있는 마음, 열려 있는 심성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말은 편견이 없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강한 욕망, 혹은 육체적인 어떤 필요,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서 불순한 동기가 덜 작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너무 가난하고 어려우면 '예수 믿으면 좀 부해지려나?'라는 생각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또 병들어서 너무 고생한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하면 '예수 믿으면 병 낫습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아, 예수 믿으면 나 장가 보내주겠습니까?'라고도 합니다. 이 사람은 장가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봅니다. '교회 가니까 처녀들 많은데'하는 이런 사람은 그대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면 신분상으로 소외당한 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예수 믿으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서면서부터 교인들이 나를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나, 이것만 신경을 씁니다. 내가 남을 대접할 생각은 안하고 내가 대접받는 것부터 먼저 신경을 씁니다. 이런 사람도 한마디로 말하면 비신사적이지요. 속된 말로 '거지 근성'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안도와 주나, 나를 안 알아주나, 이것만 챙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별로 좋은 심성이 못됩니다.
그런가하면, 감정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상당한 수준의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냉정함이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체로 비신사적입니다. 감정이 앞서요.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요. 가끔 차를 타고 다니다보면, 차가 조금 부딪혔다고 서로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다고 무슨 수가 납니까? 괜히 화만 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냉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전에 저는 이런 광경을 한번 보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타이베이에 갔을 때에 택시를 탔는데 어떻게 상황이 잘못되어서 내가 타고 있는 차를 뒤에 있는 차가 들이받았어요. 더욱이 아주 복잡한 거리에서 말입니다. 차가 '덜커덩'했습니다. 그런데 이 운전사가 차에서 내리지를 않아요. 뒤를 돌아다보니 그쪽 운전사가 '괜찮아?'라고 묻는 것 같아요. 이쪽에서는 '그래, 그래'하면서 그냥 갑니다. 내리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차가 '덜커덩'하기에 제 생각에는 '이것 또 싸우겠구나, 큰일났다, 틀림없이 약속시간에 늦겠구나'하며 별생각을 다 했는데 정작 운전사는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자못 우러러 보입디다. 우리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지요. 확실히 우리는 감정 주도적인 데가 많아요. '너 살고 나 죽자'가 아닙니다. '나 살고 너 죽자'도 아닙니다.
리는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다 망해도 좌우간 화는 내고 봅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렇게 감정 주도적인 것. 그런 게 좋은 것이 아니지요. 신사적이라는 것은 그렇게 감정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잠언18장 13절에 보면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을 했으면 끝까지 잘 듣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 듣기도 전에 '가만있어봐, 내가 말할게' 하는 사람이라면 신사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다 듣고 나서 한참 생각을 하고, 그리고 나서 말을 해도 늦다는 법은 없어요. 이런 사람이 신사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비신사적인 것은 즉흥적인 것입니다. 너무 쉽게 결정을 해요. 예수 믿는 것도 그래요. 한마디 말을 듣자마자 예수 믿어야 겠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예수 믿는 것도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하는 말입니다 마는 우리가 지금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지 6개월이 지나서 본인이 신앙고백을 하면 바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우리 한국교회에는 학습교인이라는 게 있잖아요? 학습교인이라는 것은 예수 믿겠다는 사람이 들어오면 이제 그 사람을 놓고 한번 심사를 하여 학습교인으로 만들고는 6개월 동안 두고봐서 다시 세례 문답을 하고, 그 다음에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왜 그러도록 했을 것 같습니까? 그
예수 믿고 세례 받게 된다고 하니까 '그거 좋은 거야? 그럼 받지'―이렇게 '거저 먹기'로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좀더 깊이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즉흥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너무 쉽게 세례 받은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적어도 1년 동안은 두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확실할 때에 세례를 베풀려고 학습교인이라는 단계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제도는 우리 나라에만 있습니다. 참 부끄럽지 않습니까? 좀더 깊이 생각을 하고, 정말 예수님께 자기의 새 생명을 바치면서 확실하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즉흥적인 것은 비신사적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베뢰아 사람들은 그저 한 번 전도 받고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러 날 동안 성경을 상고하고, 많이 생각을 하고, 그래서 받아들이고, 그런 다음에 믿겠다, 했습니다. 신사적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신사적인 것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남들이 예수 믿으니까 나도 믿지, 아무개가 믿으면 나도 믿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사적이라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보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을 하는 것이지 누가 믿는다고 따라 믿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자적으로 결단하여 신앙할 때에 신사적 교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혹은 설교방법을 들을 때,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설교를 들으면서 한마디도 남김없이 다 흘려보내고 마는 사람입니다.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한마디도 제대로 들은 게 없어요. 이런 사람은 모래시계형입니다.
모래시계는 한번 들어가면 곧 흘러나가 없어지고 마니까요. 둘째는 말씀을 받을 듯하면서 받지 않고 원상태로 돌아가는 사람, 스펀지형입니다. 어떻게 잡힌 것 같은데 그실 잡히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좋은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꼭 나쁜 것만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체 형입니다. 여러분, 체라는 것이 있지요? 요새는 보기도 힘듭니다만, 그 구멍 뚫린 바구니 같은 것에 곡식을 넣고 흔들면 알곡은 다 내려가고 마지막엔 껍질만 남습니다. 바고 그 체와 같은 심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꼭 들어야 할 말씀은 한 말씀도 안 듣고 어쩌다가 한마디, 마음에 걸리는 가시 돋힌 것만 듣습니다. 참 불행한 사람이지요. 넷째는 좋은 말씀만 기억하는 정미기형입니다. 잘 정리해서 쭉정이는 다 내보내고 깨끗하게 알곡만 받아들이는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일곱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첫째,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침묵하고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들을만한 말이다, 해서 마음을 열고 경청합니다.
들을수록 자기에게 이로운 것이니까요. 현명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남의 이야기에 절대로 끼어 들지 않는 것입니다. 남들이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그 사이에 끼어 드는 따위의 주책없는 짓은 안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대답할 때에 덤벙대지 않고 언제나 신중히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이치에 맞는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질문하는 것을 들을 때, 저 사람이 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것인지 제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정리되지 않은 질문을 합니다.
어쨌든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할 때에는 이치에 맞도록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고, 미루어도 될 일은 맨 마지막에 하는 것입니다. 순서를 정한다, 그 말입니다.

여섯 번째가 모를 때에는 모른다고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못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똑똑하게 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일곱 번째는 진실을 인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탈무드에는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다. 이런 일에든 저런 일에든 모든 것으로부터 배운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원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배울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베뢰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신사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떠하냐, 하고 신사적인 사람의 모습이 여기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신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첫째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11절)'라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말씀을 집중적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집중적으로'―이 부분을 헬라어로 '메타 파세스 프로튀미아스'라고 하는데 좀 특별하기 때문에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full heart,full attention'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듣더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들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언젠가 교육학 책을 읽어보았더니 이런 말이 있습디다. 흔히들 어린아이와 어른은 기억력에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은 딱 한 번만 들어도 안 잊어버리는데 어른들은 들으나마나 곧 잊어버립니다. 노인네들이 잔소리가 많은 이유도 스스로 한 말을 스스로 잊어버리기 때문이랍니다. 30분이면 잊어버린답니다. 그래서 한번 말해놓고는 또 말하고…… 문제가 많지요. 그런데 교육학에서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노인과 어린아이가 과연 기억력에 이렇듯 차이가 있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기억력은 마찬가지인데 어린아이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을 듣든지 집중적으로 듣고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full heart―온 마음을 다해서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서 꼭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미 들을 때부터 반밖에 안 듣는다고 해요.
들으면서도 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가끔 가정에서도 문제가 생기지요.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어떤 사람이 나오면 저 사람 좀 보라, 하며 얘기합니다. 그러면 그 얘기하는 동안에 진행된 그 프로그램의 내용은 놓치기 일쑤이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들어야 끝까지 듣지, 저 사람 나왔다, 저 사람 누구 아니냐, 하고 딴소리나 하다보니 그러는 동안에 원래의 주제는 다 까먹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이 복잡해요. 들을 때에도 전부 듣지 않고 반만 듣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듣고, 다른 것을 상상하면서 듣고, 내 경험을 비판하면서 듣고, 그러니 기억될 것이 없지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가 별것 아닙니다. 얼마나 집중(concentration)하는 훈련이 잘되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공부'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도 집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집중해야 알아지기도 하고, 기억도 됩니다. 시험 보는 아이들도 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집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괜히 책만 앞에 놓고 있지 사실은 낙서만 하고 있다면 공부가 될 턱없습니다. 얼마나 집중하느냐-이것도 훈련이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study hour가 있고 concentration hour가 있고, 그리고 warming up hour가 있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더라도 다짜고짜 뛰어들어 운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몸풀기 내지 예비운동 곧 warming­up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부도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집중이 안됩니다. 더구나 방학 몇 달을 놀고 나서 공부하려고 들면 그것에 집중하게 되는 데에는 아마도 족히 두 주일은 필요할 것입니다. 제가 60년대 초와 70년대 초,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유학을 갔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국내에 돌아와서도 완전히 공부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속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9년만에 다시 유학을 가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좌우간 한 학기 동안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공부를 중단할까 하는 생각까지 해볼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중이 안되고 속도감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이대로 공부할 수 있겠는가 싶었습니다. 어쨌든 견뎌보자 해서 끝까지 견뎌냈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 지내고 나니 그 때부터야 제대로 돌아가요. 공부라는 게 그렇습니다. 가끔 학생들이 공부를 하다 말고 놀러간다고 하는데, 이러면 안됩니다. 며칠 놀고 오면 집중이 안됩니다. 차라리 가까이 에서 맴돌고 있어야 됩니다. 아예 며칠 놀고 와서 마음 잡아 가지고 하겠다, 안됩니다. 마음이 잡힙니까? 휴가 때에 잘 놀고 와서 본격적으로 할 랍니다―안될 말입니다. 집중이 안됩니다. 집중하는 것도 훈련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세요. 신사적이어야 집중이 되지요. 마음이 들떠 가지고 감정 주도적으로 행동한다면 어떻게 집중이 됩니까?
가만히 보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도 그래요. 늘 들어버릇한 사람들이 잘 들어요. 집중이 되거든요. 저는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늘 스스로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교회 목사님들도 우리 교회 강단에 서보고는 곽 목사님은 참 행복하다고들 말합니다. 왜요? 온 교인들이 집중적으로 듣거든요. 그런데 어떤 때에 다른 교회에 가보면 영 산만합니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아주 산만합니다. 마음을 잡기가 참 어려워요. 자, 보십시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집중적으로, full heart, full attention으로―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성경을 읽을 때도 그렇고, 무엇을 하든지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으로 말하자면 공부할 때에는 나가 놀 생각하고, 나가 놀 때에는 공부 걱정하고…… 미련한 것입니다. 공부할 때에는 공부만 하고, 놀 때에는 놀기만 하고, Work while work, play while play.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집중적으로 읽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집중적으로 들을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가정에 가보았는데 그분이 불면증으로 고생을 합니다. 도대체 잠이 안 와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에 잠이 안 오거든 낮에 주무시지 마세요'하고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 때에 같이 심방을 갔던 어느 여자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이 안 오거든 성경을 보세요.
그러면 잠이 잘 옵니다.' 그래서 제가 '원, 세상에…… 심방 다니면서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면 되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되요.
잠옷 바람으로 보지 마시고, 배 깔고 누워서 보지 마세요. 성경은 기도하여 정성껏 볼 것이요, 정좌해서 볼 것입니다. 가장 바른 자세로 읽어야 그게 성경 읽는 것 아니겠어요? 가장 귀한 시간이니까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더라'―이게 신사적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말씀입니다. 한번 듣고,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예요. 날마다, 매일같이, 반복적으로 들어요. 또 듣고, 또 듣고, 그 다음에 깨닫고, 그 다음에 결정합니다. 한번 들어 가지고 다 끝난 것처럼, 다 아는 것처럼 여기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신사적인 교인들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합니다.
세 번째가 더 중요합니다. 상고한다―원문으로 '아나크리논테스'인이 말의 의미가 깊어요. 영어로는 examining―시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시험했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성경을 의심하고, 성경을 시험하고, 성경을 비판하고 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부분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성경을 알고 성경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지금 전하고 있는 이 사건과 성경이 어떻게 관련되는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것을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비판하려고 하는 사람들, 좋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근심이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이 성경과 내가 처한 현실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이 성경에 비추어서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것이 성경을 상고하는 뜻입니다. 성경이 잘됐느냐 못됐느냐, 진리냐 아니냐, 그런 얘기하자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상고하고 성경을 비판한다는 것은 바로 성경말씀에 대하여 implication―적용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작용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을 믿고 사는 나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할 때에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신 것도 바로 이런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까요 말까요, 그런 고민이 아닙니다. 서른 세 살에 죽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성찬식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고민이 있다는 것입니까? 문제는 이 귀한 뜻과 현실과의 관계였습니다. '내일 아침 빌라도 법정에서 죽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다시 말하면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고 계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고, 성경을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오늘에 내가 처한 처지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합니까, 그런고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저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예수 사건과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느냐, 이것을 저들은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증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주 지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사적인 신앙입니다. 이렇듯 다 확증을 얻은 다음에 받아들였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정말로 신사적인 교인들입니다.
한편, 데살로니가에서 찾아온 유대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와서 핍박을 합니다. 이를 보고 바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구만.' 데살로니가에서 이곳까지는 40킬로미터입니다. 40킬로미터는 백 리입니다. 백 리 길을 쫓아와서 저렇듯 소동을 부리고 야단을 피우면서 핍박하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나한테 비한다면 당신들은 그래도 약과요!'했을 것입니다. 그 옛날 유대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을 죽였었습니다. 그랬으면 됐지 다메섹까지나 악착같이 쫓아갈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좌우간 다메섹까지도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남김없이 끌어다가 죽이려고 극성을 부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의 그 같았던 극성스러움이나 지금의 저들의 극성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핍박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 저들은 대항하지 않고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대로 아덴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왜 빌립보 감옥에서와 같은 기적을 기대하지 않고 피했습니까? 왜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다가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을 또 한번 바라지 않고 굳이 조용히 피해야 했더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들이 유대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지금 바로 깨닫지 못해서 그러는 것인 뿐이지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사람들의 눈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을 죽인다, 유대사람 저희네 끼리 싸운다―이렇게 볼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욕 돌릴 수는 없어요. 바울의 피신하는 심경을 속속들이 헤아려보기는 어려우나 거기에는 마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아무튼 그는 유대사람들의 핍박 앞에서 유대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방사람들한테 추한 꼴을 보이지 않고자 하여 엄연히 잘못하는 것인 줄 알지마는 그들을 피해서 다른 마을로 이사갑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일행의 처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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