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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사도권 (갈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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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는 주후 50년경에 쓰여진 데살로니가 전서 다음으로 56년경에 쓰여져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바울의 짧은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쓴 책입니다. 갈라디아서는 6장 149절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이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믿고 따라야 할 여러 가지 요구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에는 우리의 믿음의 근본이 되는 교리들이 아주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에는 그 내용에 있어서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방대한 양의 이신칭의 사상과 성도들의 복음적인 삶을 아주 함축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흔히 '작은 로마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는 성경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편지' 혹은 '나의 아내'라고 부르면서 사랑했다고 합니다. 티슨(Thiessen)은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선전포고문'이라고 했고, 스탐(Stamm)은 '기독교 신앙의 대헌장'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 형식에 있어서 대단히 논쟁적이며 공격적인데 이는 당시의 갈라디아 교회의 정황이 바울로 하여금 그렇도록 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변호하기 위하여 공격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믿었지만 지금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질시키고 '다른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장을 자신의 사도권 변호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5장을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을 바로 잡기 위하여 바른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자신의 복음에 대한 각오와 아울러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위대한 기독교의 진리를 로마서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지만 짧지만은 복음의 핵심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된지 이제 겨우 7개월이 된 교회입니다. 사실 처음 교회가 시작된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이 보낸이 편지는 바울의 목회적인 관점도 반영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 교회에는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갈라디아서의 핵심은 2:16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는 말씀과 5:1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열심히 들어주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새로운 종교를 전했을 때에 사람들은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전도자들이 왔는데 그들이 바로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이 진리를 비슷하게 가지고 와서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것은 순회하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서 돈이나 뜯어내는 냉소주의 철학자들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절대적인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속죄와 그를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서신을 통하여 교회의 극히 일부 작은 잘못으로 인하여 교회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려 들고, 그 틈을 이용하여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무리가 준동하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신앙을 다져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대에 복음의 순수성을 그대로 외치며, 그 순수성을 우리들이 어떻게 지켜 나아가느냐에 교회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봅니다. 철저하게 복음적인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윤리적인 기독교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윤리를 무시한 윤리없는 기독교를 추구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본서를 통하여 오직 십자가만을 사랑하며 그 십자가 아래서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고백한 말씀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갈6:14)고 고백g나 것처럼 우리들이 세상과 나는 간 곳이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이는 놀라운 감격을 맛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바울의 인사말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편지를 쓸 때에는 통상 먼저 인사말을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물론 바울은 본문에서 당시의 인사의 정형을 그대로 따라서 인사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편지를 쓸 때에 어떠한 인사말을 쓰고 계십니까? 우리들이 인사말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도 나름대로의 철학이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개는 먼저 안부를 묻고서 자신의 형편을 말하면서 '나도 네 덕분에 잘 있단다'로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인사말부터 달라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사말 속에는 바울의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1∼3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인사말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도권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신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주의자들은 사실상 복음을 믿지 않으면서도 유대교에게 가장 타격을 심하게 입히고 있는 바울의 약점을 캐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해 보면 바울에게서는 그 어떠한 권위의 근거도 찾을 수 없었고, 심지어 교회 내부에서도 이러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 인사말을 시작하면서 먼저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먼저 인사를 하는 것보다 인사의 주체가 누구냐를 밝히는 것도 바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거짓 교사들은 바울은 결코 사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합법적인 근거가 있는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다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점입니다.

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했습니까? 당시 바울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하나가 아니었다는 이유를 들어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예수님의 열 한 사도들처럼 예수의 지상 사역을 목격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맛디아처럼 공식적으로 선출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강력한 도전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하는 사탄의 계략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하는 일에 대하여 근거를 없애려고 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헛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이러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은 대부분은 바울 자신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부정의 일환으로 취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본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가 전한 복음의 진수를 떠나 버리려는 사람들의 불순한 의도에 대하여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변호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남북의 교류의 물꼬를 터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언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남북정상회담 사실 자체가 엄청난데도 불구하고 사소한 것을 가지고 계속 꼬집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꼼꼼히 따진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그것은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단순한 데에서 출발하여 이제 남북정상이 합의한 내용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과거의 냉전시대의 사고로 회귀하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책략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데 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의문이 생기고 사도권을 인정을 받지 못하면 바울의 전하는 복음 전체에 대하여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던 이단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교묘하게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부정되기만 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함으로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복음의 순수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렇게 자신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논조는 이와같이 처음부터 공격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이 교회에서 행하는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 자꾸만 논하는 일이 생긴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여러분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1장과 2장에서 바울이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바울이 사도권의 근거에 대하여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 자신의 사도권이 인간의 임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1).
바울이 먼저 사도권을 주장하면서 주장한 말씀은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먼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인간적인 기원이나 수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란 무엇입니까?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아포스텔로스)란 뜻입니다. 그냥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목적을 받아서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사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권이 인간의 임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임명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사도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11명의 사도와 훗날에 뽑힌 맛디아를 사도로 인정햇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21∼22에서 그 자격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도를 말할 때에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의 직접 부름을 받아 특별히 임명받은 사람이며(눅6:13), 둘째,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목격한 사람들이며(고전9:1),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마10;1).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주님의 이름을 가르치도록 위임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12명으로 한정된 유일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사도란 초대교회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명칭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기준에 의한다면 바울은 사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공식적인 임명보다는 주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점에서 사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되었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도권은 주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주님의 직접적인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담대하게 먼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세상에서 인정하는 어떤 공식적인 인증서를 항상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임명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직이나 모임에서 임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는 인간에 의해서 인정되고 인간에 의해서 교육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집사를 뽑을 때에는 투표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달랐습니다. 가룟 유다가 죽고 난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에 사도들은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의 방법인 제비를 택하여서 맛디아를 사도의 수에 가입시켰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도는 인간들의 집단에서 그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여행하던 순회전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임명을 받아서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안수하여 그들을 전도자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변 사람들의 권고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누구에게 인정을 받았거나 교회의 공식적인 임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단들이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바울에게 교회적인 어떤 임명을 받은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도권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2) 바울의 사도권은 신적인 기원에 의한 것입니다(1).
그러면 무엇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사도권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의 기원을 언급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함께 언급합니까? 그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심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에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살리신'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기준에 의하면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주님을 만나서 주님께 직접 임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1∼17과 26:14∼18에서 누가는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건은 특이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초대교회 당시 대박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한 중심에 섰던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 그 사형집행관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옷을 맡아두었다는 말은 바로 그의 이러한 직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는 이러한 대박해를 주도하던 인물이었고, 그 박해에 특별히 열심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전지역으로 흩어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잔해하기 위하여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또 그들을 완전히 땅에서 진멸하려고 상부의 명을 받고 지금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도착하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손에 죽을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러한 끔찍한 일을 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에 거의 다 갔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빛을 보고는 즉각 땅에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늘로서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은 사흘을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부르셔서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려고 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또다시 아나니아에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을 받고 사울에게 간 아나니아는 그를 안수하여 보게 했습니다. 그는 이와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주님의 직접적인 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신적인 기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에 '주여 뉘시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분은 그가 핍박하던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사울은 즉각적으로 다메섹에서부터 시작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만나고 그분에 의해서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주장할 때마다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바로 주님이 자신을 직접 만나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사도들과 논쟁을 하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의견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주님을 직접 만났다는 확신이 근거였습니다.

오늘날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도 너무나 외적인 기준에 얽매여서 그 기준에 도달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 곤란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의 소명이 있는 사람들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준에 서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권위가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 목회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로 하나님의 사역자를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성도 됨과 여러분의 직분은 누가 부여한 것입니까? 평강교회가 준 것입니까? 아니면 이 박상봉 목사가 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주어진 모든 직책과 직분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임명하고 교회가 임명하는 것 같으나 교회의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감당하고 있는 모든 직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러분이 여기고 감당할 때에 권위가 있고, 또 거기에 충성을 다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내가 하나님의 일군이 됨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 기쁨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직분을 평강교회의 이름으로 임명했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소명이 신적인 소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누구든지 어떤 권세로 이러한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거침없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일은 주님이 나에게 직접 주셨다는 체험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2∼3).
바울은 그래서 이러한 자신의 사도권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2∼3절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는 지금 자신에게 안팎으로 심각하게 도전하는 모든 도전을 직면하고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은 사도이며, 지금 자신과 함께 한 동역자들과 함께 갈라디아 교회의 이러한 문제를 사도적 심정을 가지고 격려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때에 비로소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왜 지금 이 일을 하는지 그 근거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만큼 자신 있게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에게는 사도란 명칭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이미 이 세상에 '빛으로 소금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괴롭히는 한 가지는 '네가 사도냐?'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언제 주님에게서 인정을 받고 사도가 되었고,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서 주님에게서 임명을 받은 사도도 이렇게 도전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사역 말기까지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도전은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고 도전해 옵니다. '당신이 집사냐', '당신이 장로냐', '당신이 교사냐', '당신이 성가대원이냐', '당신이 구역장이냐'고 말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했던 것과 같이 나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확고하게 주장할 근거가 있습니까? 이 근거가 확실할 때에 여러분이 하는 모든 신앙생활에 힘이 있고 감사함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신앙은 확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거리는 것은 이러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나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들이 먼저 체험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진정한 제자란 어떤 교육 과정을 거침으로서 훈련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훈련의 과정을 거치거나 어떤 프로그램을 마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는 주님의 모습을 끊임없이 닮아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주어지는 확신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확고하게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대답할 수 없다면 이 문제를 인하여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우리에게 도전하는 많은 신앙적인 도전들을 우리는 힘있게 이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정체성을 확실하게 할 때에 우리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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