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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적용하는 생활 (히 10: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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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기도를 많이 해 주셔서 지난주간 하와이의 호놀룰루 장로교회(조일구목사) 부흥성회에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하와이 부흥회 역사상 이렇게 뜨거운 은혜를 받아보기는 처음이라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문에 “서재서 아재아(書在書 我在我)”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글은 글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생전 예수를 믿으면서도 “믿음은 믿음대로 내 생활은 내 생활대로”따로 따로 믿음과 생활을 별개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내 생활에 순간순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보이는 대로 행치 않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 대로 사는 생활은 보이는 대로 행동하지만, 영적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은 보는 것을 의존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의존하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은 늙고 머지않아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차원에서 사는 사람이며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물고기가 낚시에 달린 미끼가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보인다고 홀딱 삼켜 버린다면 낚시에 꿰어 나와 죽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도는 것이지요. 물 컵에 젓가락을 넣고 보면 젓가락이 휜 것처럼 굴절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공기도 라디오 전파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눈에 안 보이지만, 안 계신 곳이 없으며(無所不在), 모르시는 것이 없으며(無所不知), 못하실 것이 없으신(無所不能) 분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이 못 보시는 줄 알고, 하나님이 안 계신 줄 알고, 제멋대로 죄짓고 일을 행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보이는 대로 행동하다가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쳐다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이렇게 보이는 대로 행동하여 자신과 인류에게 큰 불행과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유명한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씨가 배를 타고 항해하는 중 그만 바람이 불지 않아 조수에 밀려 식인종이 사는 섬에 가 닿게 되었습니다. 식인종들은 배가 섬 가까이 오는 것을 보자, 사람 고기 파티를 하게 되었다고 웃으면서 춤을 추고 좋아했습니다. 이 때에 선장이 테일러 선교사에게 큰일났다고 바람 좀 불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테일러씨는 먼저 운항 준비를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장은 아직 바람이 불지 않지만 불어올 것을 믿고 돛을 올리고 키를 붙잡았습니다. 테일러 선교사는 아래 밀실에 내려가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선장이 내려와 문을 두드리면서 “선교사님, 아직도 기도하십니까? 그만 하십시오. 이제는 바람이 너무 불어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지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기도 만능주의자 조지 뮐러(George Müller)씨는 평생 5만 번 이상 기적적인 기도 응답을 받은 분인데, 그 옛날 영국 돈으로 백만 파운드 이상 돈을 받아 쓴 분입니다. 한 번은 토요일 오후까지 퀘백에 도착해야 될 일이 있어서 배를 타러 갔더니 선장이 빽빽한 안개 때문에 운항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도리어 뮐러씨를 정신병자 취급을 하더랍니다. “여보시오,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안보이십니까?”라고 말할 때 뮐러씨가 “아니오. 내 눈은 짙은 안개는 보이지 않고 모든 환경을 지배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만 보입니다”하고 무릎꿇고 기도하는데 선장도 들어와 기도하려고 하더랍니다. 뮐러씨는 기도하고 일어나면서 선장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기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기도해야 소용없습니다. 나는 57년 동안 한 번도 집회를 약속하고 제 시간에 도착해 보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문이나 열어 보십시오. 안개가 걷힌 것이 보일 것입니다”해서 일어나 문을 열어보았더니 안개가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져 버렸고, 토요일 오후에 도착하여 집회를 인도했다고 합니다. 참 믿음은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세계 2차 대전 후 독일의 &53280;른에 있는 한 감옥, 감방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나는 믿는다”였습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때에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가 잠잠하실 때에도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시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며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며 불가능한 것을 받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작은 믿음은 당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지만, 큰 믿음은 천국을 당신의 영혼으로 이끌어 준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can)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꼭 하실 것(will)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눈으로 보는 대로 판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판단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음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감정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을 적용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보이는 것을 의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감정도 의존해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 느낌이란 굴곡이 심합니다. 어떤 때는 몹시 기쁘고 흥분해서 산꼭대기에 올라간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것같이 감정이 메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은 감정, 기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태양은 항상 변함없이 떠 있지만 때로는 구름이 가리우고 안개가 가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 기분이란 구름이나 안개와 같은 것이므로 그것에 의존해선 안됩니다. 고통과 환난이 밀어닥치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이 의심하기 쉽습니다.
 
가령 성령의 불을 처음 받을 때, 온 몸이 불덩이 같이 뜨거운 체험을 하게되고, 기쁨이 용솟음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꼭 뜨끈 화끈해야 응답이 오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뜨끈 화끈하지 않아도 말씀에 굳게 서서 나갈 때 주님이 함께 하시고 승리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가령 시계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몹시 기쁘지만, 몇 일 지나면 그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그 시계가 없어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시계는 그대로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 남녀의 감정은 몹시 기쁘고 잠이 안 올 정도로 감정이 흥분되어 있지만, 결혼하고 얼마 지나면 덤덤해집니다. 그렇지만, 그 때가 더 부부의 정이 두터워지고,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의 생활은 감정, 기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오직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가령 교회에 가고 싶을 때에만 교회에 오고 가고 싶은 기분이 안 날 때에는 안 나오는 신자라면 그는 언제 타락할 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에만 기도하고 기도하기 싫을 때는 기도하지 않는 신자가 있다면 그는 참 기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헌금하고 싶을 때에만, 헌금하고 십일조 드린다면 그런 사람은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교회에 가기 싫을 때 그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교회에 나가면 더 큰 은혜를 받고, 감사할 수 없을 때 억지로라도 감사하고, 십일조 할 수 없을 때 십일조 하면 그 다음에 축복이 옵니다. 기도하기 싫을 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가 막힐 때는 기도로 뚫어야 합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감정, 기분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3. 계산과 타산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계산법은 언제나 역설적일 때가 많습니다.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멘솔래덤(Mentholathum)을 만들어 미국의 큰 거부가 된 A. A. 하이드(Hyde)씨는 그 옛날 10만 불의 엄청난 빚을 진 상태에서 십일조 생활을 시작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빚이 그렇게 많은데 십일조 한다고 모두 비웃었습니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은 제 일의 채권자(First Creditor)이다”하면서 십일조를 계속했는데, 마침내 하나님이 축복의 문을 여시고 복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영의 계산법, 믿음의 계산법은 혼의 계산법과 반대될 때가 많습니다. 혼의 계산법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옥합을 몽땅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 드릴 때 계산이 빠른 가룟 유다는 “그것을 왜 허비하느뇨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면 좋을 텐데”하고 마리아를 책망했지만, 그는 결국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고 목매달아 자살하고 지옥 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고두고 칭찬 받고 축복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그것은 계산에도 맞지 않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타산에 어긋나고 불합리한 명령에 순종했을 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영육 간에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계산법, 영적인 타산법은 혼의 계산법과는 배치될 때가 많으므로 계산 타산에 의존하지 않아야 믿음으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4.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은혜를 믿는 것
많은 교회에 부흥회를 다니다 보면, 목사님들 중에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평생 목회 하는 분이 꽤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나 우리의 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제도 어느 목사님이 말하는데 바쁜 시간을 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왔더니 그 다음 날 새벽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몽땅 뒤집어엎고 싸늘하게 불을 다 꺼놓더랍니다. 중세기 암흑시대에 기독교가 타락하여 면죄부까지 팔아먹을 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일어나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그 개혁의 가장 큰 이슈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것입니다. 면죄부를 산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착한 행실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다 지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죄를 대속하여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슬로건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행위로 구원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조지아 주로 선교를 떠날 때에도 나는 선교하러 가는데, 내 영혼을 구원할 자는 누구인고 하고 탄식했던 사람인데,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 억지로 모라비안(Moravian)교도들이 모여 예배 드리는 곳에 갔다가 목사도 아닌 평신도가 마르틴 루터가 쓴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는 가운데 구원은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다는 내용의 글을 들으면서 중생 하여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히브리서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로마서는 믿음으로 얻는 생명을 강조하고, 갈라디아서는 구원받는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장 5절에“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했고, 로마서 5장 9절에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했고,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고, 신구약 성경 전체의 요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공로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김홍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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