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주를 바라보라 (히 12:1-13)

첨부 1


기독교는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히 11: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하)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믿음으로만 할 수 있으며,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가증한 행위로서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 어떤 시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독자 이삭을 바쳤으며, 다니엘은 믿음으로 사자 굴에 들어갔고, 시몬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 위를 걸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므로 믿음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누구나 똑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도 단계가 있고 차원이 있습니다. 큰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작은 믿음이 있으며, 강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큰 믿음, 강한 믿음,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믿음으로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시험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믿음의 주를 바라보라”는 제목으로 설교함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일컬어 “믿음의 주”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선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욥, 모세, 사무엘, 다윗, 엘리야, 다니엘, 그 외에 구약의 선지자들과 믿음의 왕들이 있으며, 신약시대에도 사도들을 비롯한 귀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귀한 믿음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믿음의 본을 보여준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는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기에 죽기까지 순종하실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고난은 예수님에게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목숨을 희생하는 차원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악을 다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디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죄를 지어본 적도 없으십니다. 아니 죄 된 생각을 해 보신 적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죄와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같은 분이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다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한없이 쏟아 부어지는 것이니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수처럼 여김을 받고 공의의 심판을 당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되는 절망을 맛 보셔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시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대속의 고난을 기피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다 받으셨습니다. 얼마나 철저한 순종입니까?

마음속에 있는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믿기는 하지만 순종하지는 않는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처럼 보일 뿐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인도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에 들어선 성도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 전체가 믿음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고 그 뒤를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실인즉,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완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이 보낸 무리에게 붙잡히셨을 적에 제자들은 하나같이 주님을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조차도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주님을 끝까지 따르고 싶었지만 육신이 약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며 모두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셨을 때, 시몬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죽는 데도 함께 가고 주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 충만 받은 이후로 베드로는 완전히 믿음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젊은 사자처럼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한번은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쳐준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걸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말하며 그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두 사도는 체포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던 때와 같이 공회를 소집하고, 두 사도를 그 앞에 세우고 묻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하기를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종 앞에서도 벌벌 떨면서 “내가 나사렛 예수를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했던 그가 서슬이 시퍼런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이처럼 담대히 말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또한 그들이 두 사도를 불러서 위협하며 “이제후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자, 두 사도는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사도가 이처럼 능력 있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된 것은 믿음의 주님께서 그들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끝까지 주님의 뒤를 따라 갈 수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로마의 네로 황제의 핍박을 받아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고,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 때에 밧모섬에 유배되었으나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느 단계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할 때 연약했던 시몬 베드로를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로 만들어주셨던 주님께서 성도님들의 믿음을 온전케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믿음의 경주에 나선 선수에 비유하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육상 경기에 나선 선수는 가급적이면 간편한 유니폼을 입고 가벼운 신발을 신습니다. 이디오피아의 아베베 선수는 신발도 거추장스럽다고 벗어던지고 맨발로 마라톤 전 구간을 달렸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에 나선 성도들은 무슨 방법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어야 할까요? 이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재리에 대한 욕망, 염려와 근심은 우리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 믿음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보면,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마 13:7)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설명하시기를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라고 하셨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러 교회에 와 앉아 있어도 생각은 엉뚱한 곳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돈에 대한 욕심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거운 짐을 가득 지고 경주하는 선수와 같아서 절대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육상 선수가 힘차게 달리는데 그만 길가에 버려진 무슨 끈이나 그물조각이 선수의 발을 얽어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얽어맨 것을 제거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 우승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얽어매는 것은 죄를 의미합니다. 죄를 지으면 그것이 우리 양심을 부자유스럽게 얽어맵니다. 죄는 한번 짓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연쇄적으로 죄를 짓게 만듭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은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가 간음죄를 범했더니 그 죄를 감추려고 살인죄를 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토록 무서운 죄를 계속해서 짓고 나니 그 심령이 지옥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기도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죄는 이처럼 무섭게 우리를 얽어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에 나선 성도들은 먼저 회개를 통해서 죄를 청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로 9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8)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 양심이 얽어매는 죄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누리게 되고, 하나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청결한 상태가 되어 활기차게 믿음의 경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수는 달리는 방향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수는 푯대를 바라보고 달립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푯대 삼아서 믿음의 경주를 달려 나가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롯의 처를 보십시오. 소돔 성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황불에 불타 멸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두 천사를 보내셔서 롯과 그의 처와 두 딸을 구출하셨습니다. 천사들이 말하기를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 19:26).

사도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데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때 그는 사도 바울을 도와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서신에 그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 매우 유익했던 일꾼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데마는 주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이켜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그만 사명을 잃어버리고 사도 바울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름 받아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돈궤를 맡아 보던 중에 돈을 탐하게 되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그가 돈을 바라보다가 그만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아먹게 된 것입니다.

한번은 밤에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던 중에 바다 한복판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무진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이 광경을 보시고 제자들을 도우시려고 물을 밟고 오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외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주님께서 “오라”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적에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자 그만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우리에게 주님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이나 돈이나 사람이나 환경을 바라보지 마시고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곧 믿음의 경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악과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아니하고 적당히 타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래서는 시험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타협은 곧 패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충성하되 적당히 하면 안 되고 죽도록 충성해야 주님의 인정을 받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또 주님께서는 말세에 관해 말씀하시던 중에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시길 원하십니까? 모든 무거운 것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여러분의 눈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삶을 살지 아니할 때는 징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믿음생활을 등한히 하고 세상과 짝하여 살면 하나님의 매를 맞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가오기도 하고, 몸이 병들기도 하고,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기도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의 일로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쳐서 죽게 하셨습니다. 또 압살롬의 반란을 통해서 다윗을 징벌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성찬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모든 시련이 다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욥과 같이 믿음을 연단하기 위한 시련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어려움을 만나면 일단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보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칠 것은 고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옳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고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징계의 올바른 목적을 알고 바르게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징계를 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2장 5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우리는 남의 집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붙잡아다가 매를 때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가 못된 짓을 하면 가차 없이 데려다가 매를 때리고 벌을 세웁니다. 왜 부모가 자기 자식을 징계합니까?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잘못되지 않고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하려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를 받는 자식의 입장에서는 결코 즐겁지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철이 들고 나서 과거를 회상해 보면 “아, 그 때 내가 잘못했을 때 매를 때려 고쳐주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구나” 라고 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낙심하지 마시고, 그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징계의 유익을 말해 줍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징계를 통해서 우리는 잘못을 깨우쳐 고치게 되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롭게 되며, 미숙한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변화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징계의 목적을 올바로 알 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징계를 잘 받아 유익되게 하려면 믿음의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의 인내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감당할 때 모든 찌끼가 제거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앞서간 선진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응원하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개 성도, 푯대를 바라보고 달리세요!” “김 집사님! 조금 더 힘을 내요!” 우리는 마음의 귀로 저들의 격려를 들어야 합니다. 그 관중 속에 우리 주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적에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이 보였습니다. 그 때 스데반 집사는 너무나 감격해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오직 면류관을 얻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선수라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주님께서 보이신 믿음의 본을 받아 따르는 성도들이라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신 성도님들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