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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과 택하심 (벧후 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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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읽으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논리적인지 베드로 같은 사람을 통해서 성경을 쓰신 것이 하나님의 영감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본래 직업이 어부였고, 바울처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격이 매우 충동적이고 성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에는 탁월한 사상으로 가득한 편지를 썼을 뿐 아니라 진리를 펴나가는 데 대단히 논리적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생각한 네 구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보배로운 믿음의 영광스러운 특성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고, 그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영광스러운 결말에 이르게 해주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은 “이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은 앞에서 이미 말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나열된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먼저 반복해서 강조한 후에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어떤 일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기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은 먼저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분명하게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데는 근거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원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더러운 옷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도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선고받은 죄인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기 전에 먼저 무엇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보배로운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러므로(바로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너희가(너희 편에서)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님 편에서 무엇인가를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편에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공급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덕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의 덕을 말할 때 그것은 그의 성격 중에서 어떤 탁월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의미로 우리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다음에 계속되는 다른 모든 것들도 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덕은 도덕적 능력을 의미하는데, 도덕적 힘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활동과 힘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했듯이 우리의 믿음을 살아 있는 믿음, 능동적인 믿음, 힘이 넘치는 믿음, 담대한 믿음, 활기찬 믿음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권고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활기찬 믿음을 가지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덕에 지식을 공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통찰력과 이해력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지켜온 놀라운 순서를 보게 됩니다. 그는 이 사람들에게 힘이 넘치고 빈틈없는 생활을 하도록 강권합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 사도는 “영적 무기력과 권태 속에 빠지지 말라.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말라. 일어나 행하라. 강건하라. 그리고 기회를 붙잡아 덕을 실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베드로는 매우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4복음서를 읽어보면 그가 조절되지 아니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통제되지 않았고, 이성적이지 못했고, 교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질러 놓고는 나중에 후회해야 할 일들을 여러 번 되풀이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행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과거의 자기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고서 그들의 힘에 이성적인 이해력을 공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절제와 인내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비록 우리가 거듭나고 또한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는 또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충동과 욕망, 정욕과 정열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또한 항상 우리를 죄악으로 이끌어가려는 영혼의 적대자와 원수들이 있습니다.
성공의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와 아양을 부리고 아첨하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우쭐하게 되고, 마음속에 있는 정욕과 정열에 빠져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했고 우리는 그가 골로새서 3장 5절에 기록한 그 목록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절제입니다.

그 다음이 인내입니다. 물론 그 의미는 “잘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투쟁 속에 있는 문제는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고 견디는 일이 필요합니다. 아마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이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 고백을 하고 굳은 약속을 했을지라도 실행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래 참고 견딤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세상에서 욕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같이 참는 일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잠시 고통 받은 후에 얻게 되는 영원한 기업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이 경건, 형제 우애, 그리고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정당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통제하면서, 그리고 계속해서 오래 참으면서 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너무 귀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경건하게 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아무 소용이 없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서는 경건이 첫째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와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항상 우리 인생의 주된 동기와 포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인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우리는 “형제 우애”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베드로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그리고 서로 위해 참아야 할 것을 강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 우애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교회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서로 위해 “모든 것을 바라는” 우애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형제 우애에 덧붙여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를 위해 우리들의 마음속에 큰사랑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나쁜 일하는 사람을 볼 때 그 속에 있는 영혼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큰 사랑을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일곱 가지 덕목이 각각 다른 특성을 공급하고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의 덕목이 그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고 각각 다른 것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그것들의 완전한 조화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그것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매우 이성적이고 교양이 있지만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도덕적으로는 흠이 없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지만 무엇인가 결여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완전한 조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보이기 위해서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 보면 “더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합창이 완성되려면 소프라노와 알토, 테너와 베이스의 화음이 있어야 합니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는 합창을 위해 필요하며, 어느 하나를 늘이거나 다른 하나를 줄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화음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지개의 색깔은 일곱 가지입니다. 이 중에 한 가지 색깔이 빠지면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여럿 있습니다. 그 하나가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화를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대한 합창이나 오라토리오를 완전히 하기 위해서는 소리의 크기와 세기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우리의 몫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시작하고 항상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얻게 되면 그것을 행하며 반드시 사랑으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으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증거하는 일 속에서 완전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힘을 주시고 격려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형제들과 더욱 힘써 저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부르심과 택하심”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미 생각한 1절 말씀에서도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얻은 것”이고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다시 새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활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자신을 택하여 스스로 부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부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택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생활과 경험을 뒤돌아보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험악한 세상에 살면서 이만큼이라도 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또다른 대답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셨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권고는 무엇입니까? 물론 부르심과 택하심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를 부르셨고 나를 택하신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확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와 같은 사람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편지하면서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은 확신이 있다고 말하면 주제넘는 말이라고 반박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 아닐 뿐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 어떤 이는 우리가 완전해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가 여전히 죄를 범하면서, 그리고 내가 여전히 내 안에 부패함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요,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없이 완전한 사람만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장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죄없이 완전한 사람만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장해야 하고, 어떤 여건 속에서도 그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완전해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성품이 있어서 옛것과 새것, 육과 영이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이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것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생각해낼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모든 서신 어디에서나 깨달을 수 있는 교리입니다. 신약 성경의 모든 서신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이 확신을 주려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또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다른 이유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맹인이 나오는데 주님께서 그를 치료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는 먼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시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가 모든 것을 분명히 볼 때까지 계속해서 그를 고치셨습니다. 만일에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의 확신이 부족하면 그는 보기는 보지만 불완전하게 보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할 또다른 이유는 확신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훌륭한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내게 확신이 없이 어떻게 증거할 수 있습니까?
역사를 통해서 크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매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왜요? 그들은 살아가는 데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래서 이 험한 세상에서 평화롭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어떻게 저처럼 살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라고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도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더 확신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게 되며 그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자기를 성찰하는 위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위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자기 성찰을 해서 병적으로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면서 인생을 낭비해 버립니다. 그들은 자신을 살펴보는 데 관심을 지나치게 가져서 다른 일은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위험한 일은 자기 체험이나 환상 같은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확신을 얻는 방법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체험이나 환상이 소용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체험이나 환상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본 환상을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체험이나 환상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객관적인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는 죄와 어두움 외에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바라봅시다. 객관적으로 생각합시다. 절망이나 죄에서 벗어나 주님을 향해 눈을 돌립시다. 주님은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와 함께 출발하며 객관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믿음을 충만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소망을 완전히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한 후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여러 가지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약 성경의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일에만 머물지 말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욱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후에 많은 일을 하면 할수록 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확신하는 방법입니다.

믿음을 더하고, 생활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리고 더 많이 드러내면 낼수록 우리는 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나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나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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