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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와 아들(Ⅱ)"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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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Ⅱ)" (눅 15:25-32)
  

성경의 위대성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말하고 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창조주요, 인생은 그분에게 지음받은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자기를 떠난 탕자와 같은 죄인인데, 그분이 죄인을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죄인을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를 사람으로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들 예수가 사람이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이 당할 죄의 값인 사망문제를 십자가의 대속으로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생관계를 말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요, 우리는 그의 아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그의 신부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우리는 그의 종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요, 우리는 그의 양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성경은 실로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데 그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인생은 '그의 둘째 아들'(눅 15:12)이 되고 또 그의 '맏아들'(눅 15:25)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부자관계(父子關係)라고 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죄인들이 자기에게 영접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 저 유명한 세 가지 비유를 공개하였습니다. 세 비유 모두가 '죄인 회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기뻐하고 잔치를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주장이었습니다(눅 15:7, 10, 24).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중 두 번째는 '맏아들'에 관한 것입니다(눅 15:25).
여기 '맏아들'은 당시 종교적 특권을 가진 바리새인들을 지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른바 이방인에 비하여 선민이라 자칭하는 유대인들을 지칭했는지도 모릅니다. 둘째(아들)와는 형제관계였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지음받은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하는 형제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생각할 것은 지난주일의 '그 둘째'(아들)에 비하여(눅 15:12), '맏아들'(눅 15:25)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Ⅰ. 맏아들! 그는 동생에 대한 자기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와 축복의 행위에 대하여 노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습니다(눅 15:25). 
그래서 그는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그 종이 대답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눅 15:27)라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그 맏아들은,

1) 노했다고 하였습니다(눅 15:28). 
이 말은 '벌컥 화를 내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격정이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가 폭발되는 노여움을 가리킵니다. 지금 자기 집안에 있는 아버지의 감정과 그 동생인 둘째의 감정, 그리고 모든 종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감정과는 정반대였습니다.

2)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눅 15:28). 
이 말은 아예 버티면서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반항의 자세를 취했다는 의미입니다. 돌아온 동생의 환영잔치에 들어가기를 싫어하였습니다.

3) 그리고 아버지의 설득을 거절하였습니다(눅 15:28-29). 
맏아들이 노해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그 맏아들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권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권하다'(παρεκ?λει)라는 말은 '간곡한 설득'을 의미합니다. '맏아들'은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계속적인 권면을 거절하였습니다. 
  
맏아들! 그는 이렇게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앞에 노하고 잔칫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하고, 아버지의 설득을 거절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예수님의 사랑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렇게 불평하고 반항하는 맏아들의 모습을 보였습니다(눅 15:1-2).

Ⅱ. 맏아들! 그는 자기의 의(義)를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한 자신의 의(義)는 이렇습니다.

1) 그는 밭에 있었다고 하는 이것입니다(눅 15:25).
그는 거기에서 오랫동안 일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와 의무에 충실하였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 말은 비유적 표현입니다. 
여기 '밭'은 '일하는 곳'인데, 이는 당시 유대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의식적이고 외식적이고 또 선민우월의식에 사로잡혀 행하는 이른바 저들의 종교생활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장남으로서 하나님(아버지)이 명한 율법준수에 충실하였다는 뜻입니다.

2) 그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다고 주장하였습니다(눅 15:29). 
이 말은 집을 떠났던 동생에 비해서 
① 자기만 아버지를 떠나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② 그리고 자신만 아버지를 섬겼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 '섬겼다'라는 말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처럼 모셨다는 의미입니다. 
  
③ 여러 해 동안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떠나 있던 동생에 비해서 자신은 그 오랜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다는 권태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④ 명(命)을 어김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의로움을 과대평가하는 자기주장입니다. 
⑤ 아버지가 자기에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자신과 벗으로 하여금 즐기게 한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맏아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표현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종교적 특권을 누리던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의식주의, 외식주의를 지적한 것입니다. 이러한 맏아들의 노여움은 이방인(둘째 아들)의 구원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감정과 우월적 감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Ⅲ. 맏아들! 그는 동생의 죄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용서하지 않았습니다(눅 15:30).

그는 동생인 둘째 아들을,

1)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눅 15:30) 자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동생에게 분깃으로 주었던 아버지의 처신에 대해 불만할 뿐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다'고 함으로 그 동생의 죄를 오래오래 새기고, 기억하고,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의 재산을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했던 자기 동생의 죄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2) 「이 아들이」(눅 15:30)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내 동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을 가리켜 「이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아들'(? υ??? ο?το?)이라고 한 말입니다. 이는 그가 '그 둘째'를 '자기 동생'으로 여기지 않고, 업신여기며 무정하게 생각하는 언사입니다. 그에게는 형제의식이 망각되었습니다. 

3) 또한 그는 동생의 돌아옴을 인정하거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30절에 「이 아들이 돌아오매」라고 함은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이 자기 고향, 아니 자기(동생) 집, 아니 자기 아버지 집, 아니 자기(형) 집으로 돌아왔음을 반가운 광복(光復)의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안 돌아와야 될 사람이 돌아왔다는 마음입니다. 그는 집 없는 사람이고, 아버지도 형도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심사입니다. 이것은 죄인 하나가 회개함이 하나님 나라의 경사임을 모르는 당시 바리새인들을 찔러주는 말입니다. '그 둘째'에 대한 '맏아들'의 노골적인 경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4) 그리고 그는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환영을 반대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30절에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동생에 대한 부친의 살가운 영접과 기쁨이 아주 못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죄인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특대를 시기하는 유대주의자 바리새인들의 악성이 그러함을 나타낸 말입니다.

Ⅳ. 맏아들! 그러나 그는 그 둘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불변적 사랑의 주장을 꺾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가지 내용의 자기주장을 선언하십니다.

1) 맏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도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31절에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선민 유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불변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4-5절에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라고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장남에게 약속된 기업의 2/3는 여전하다고 한 것입니다. 

2) 그 둘째(아들)와 아버지의 관계도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에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맏아들이 「이 아들」, 곧 '당신의 아들'(눅 15:30)이라고 했던 말에 대하여 '내 아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네 동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형인 맏아들과는 달리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동생'이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은(찾은) 네 동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불변적인 사랑을 여지없이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맏아들의 아버지도 되시고, 그 둘째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주장입니다. 곧 하나님은 유대인의 아버지도 되시고, 이방인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아버지도 되시고, 세리와 죄인들(눅 15:1)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주장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인가?
과연기독교가 복음의 종교인가?
과연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인가?
기독교가 과연 영생의 종교인가?
  
그렇습니다. 과연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요, 복음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생이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마 18:22). 
●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받는 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 많은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 즉각적으로 용서를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 오래도록 우리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 완전한 용서, 영원한 용서, 끝없는 용서를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무한대의 용서입니다
● 그리고 영원토록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시고, 발에 신을 신기시고,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잔치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복음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이 영원하실 동안 그의 아들인 그의 백성도 영원할 것입니다.
  - 아 멘 -  (석원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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