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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은 점점 더 강하여 가고 (삼하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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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점점 더 강하여 가고 (삼하 3:1-11)
  

들어가는 말

한평생 돌을 다듬어 조각을 하고, 집을 짓고, 문화재를 보수하는 석공 명장의 얘깁니다.
돌에도 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돌에도 결이 있다는 얘기 처음 들어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결을 따라 다듬거나 자르면 돌을 쉽게 다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에 어긋나서 다듬으려고 하거나 쪼개려고 하면 힘이 들고 돌 자체가 부서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돌에 결이 있는 것처럼 인생에도 결이 있습니다.
그 결대로 살면 인생이 풍요로워지지만 결대로 살지 않으면 인생이 부서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내 인생의 결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결을 아십니다.
욥23: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내가 가는 길을 그가(하나님) 아시나니’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최선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이것만은 안 돼요.” “이것만은 놓칠 수 없어요.”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까지도 부정해야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결대로 살아 그 삶이 점점 더 강해지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사무엘 하 2장에서 사울 왕이 죽자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왕으로 등극하고, 사울왕의 군장(군 참모총장)이었던 아브넬이 마하나임에서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북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과정을 보았습니다. 
다윗 왕가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오직 유다지파만을 중심으로 세워졌고, 이스보셋은 나머지 지파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수로 말하면 다윗에 비하여 이스보셋이 훨씬 더 많고, 강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삼하3:1절은 “......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강하여져 가는 다윗의 집

본문 2-5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맏아들은 암논으로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입니다.
둘째는 길르압으로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입니다.
셋째는 압살롬으로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소생입니다.
넷째는 아도니야로 학깃의 소생입니다.
다섯째는 스바댜로 아비달의 소생입니다.
여섯째는 이드르암으로 에글라의 소생입니다.

왜 본문은 이렇게 다윗의 아들들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단순히 어떤 아들들이, 몇 명 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집이 번성하고 있다는 실례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다산은 번영의 척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사사 기드온은 자식이 칠십 명이었습니다
삿8:30절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성경은 다윗의 왕조가 이렇게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얻으며 든든하게 세워져가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2. 약해져가는 사울의 집

반면, 사울의 집은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실력자인 아브넬과 왕인 이스보셋이 분렬하게 됩니다. 
군장 아브넬이 사울왕의 첩이었던 리스바와 동침합니다.
선왕의 후궁이나 첩을 아내로 삼을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왕위 계승자에게만 있습니다.
아브넬이 사울왕의 첩과 동침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왕위 계승자임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보셋 왕은 군장 아브넬을 책망합니다.

그랬더니 아브넬이 격분합니다.
삼하3: 8절에 보면, “........내가 유다의 개머리냐......”라고 격분합니다.
‘개’라는 동물은 성경에서 성적으로 난잡한 동물로 여겨집니다.
‘개머리’라는 말은 그런 개중에서 가장 추잡한 개라는 표현입니다.
결국 군장 아브넬과 이스보셋 왕은 결별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분열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명분의 분열도 공동체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쇠퇴시키는 악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에 있는 교우들에게 권면했습니다.
갈5: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분열하면 피차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누구는 잘 되고, 누구는 잘 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잘 못된다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왜 이렇게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갑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9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대로’
18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삼하5:10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더 강성하여가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하나님 때문에 다윗은 점점 더 강하여 집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때문에 점점 더 강해지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다윗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오늘 우리가 바라보고,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이 있었고, 예언자들의 예언이 있어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줬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그 분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 분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 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 분의 역사에 대한 계획이 어떠한지 통 몰랐습니다. 

이렇게 추상적이고 막연하고 잡힐 것 같지 않던 하나님을 예수님을 통해서 확실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알려줬느냐 하면 ‘아버지’로 알려줬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을 죄 된 인간과 비교한 것 자체가 불경스럽고, 하나님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무서운 존재로 생각했는데, 그 하나님이 친근한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알려줬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신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용서란, 무조건 없었던 일로 해주는 것인가?,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인가?, 아니면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우리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시는 것인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를 지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꼭 받습니다. 
뿌렸는데 어떻게 안 거둘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죄를 지어도 사람들만 속이고 법망에만 걸리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는 줄 아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신선을 피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하나님의 낯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사실이 그런데, 당연히 받아야할 벌을 하나님이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거저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란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고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값싼 은혜가 아니고, 값비싼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말로만 쉽게 된 것이 아니고, 생명을 바침으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떻게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를 하나 들지요. 
자식이 병들어 신음합니다. 
간호하는 부모는 어린 자식이 숨을 할딱거리며 고통 받는 것이 애처로워 차라리 대신 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합니다. 
자식의 병이 위중하여 수술을 해야 한다면, 부모는 파랗게 질려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자식을 차마 볼 수 없어 차라리 대신 수술대에 눕고 싶습니다. 

부모님들은 그런 마음으로 자식을 키웠습니다. 
자식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어야 할 나대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윌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에 ‘죽으심’이란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랑하면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깊이는 희생의 분량과 정비례합니다. 
사랑이 클수록 희생의 깊이는 더 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벌은 자신이 감당하시고 우리를 거저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2)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이 마 7:9-11절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이 묻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는 사람이 있느냐?” 
예수님의 무릎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대답합니다. 

“아니지요.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어서 예수님은 부정의문문으로 질문하십니다.
그것은 그 내용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악한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전에는 나쁜 것이 없으니까 나쁜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늘 좋은 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늘 좋은 것을 기대하십시오. 
늘 좋은 것을 기다리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해도 하나님의 아들과 딸 된 여러분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믿으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교통신호등과 비슷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자기 앞에 늘 파란불이 켜져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빨리 도착할 테니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고…’ 
그러나 신호등에는 파란 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빨간 불이 켜집니다. 
가던 차가 멈춰야 합니다. 
꼼짝달싹 할 수 없습니다.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나쁘다’고 얘기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십시오. 
또 어떤 때로는 노란불이 켜집니다. 

돌아가야 되지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망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망한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전에는 나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긍정의 삶을 사십시오!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려있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있다. 이 가정에 아이들 넷이 있었는데 하나는 며칠 전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세 아이들도 결핵으로 누워 살아날 것 같지 않아. 이 부인은 현재 임신 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한 학생이 ‘낙태수술을 해야 합니다!’라고 대뜸 소리쳤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교수는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불행한 환경에서, 누가 보더라도 ‘나쁘다’고 판단하는 그 상황에서, 다섯 번째로 태어난 아기가 바로 베토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가정에 베토벤을 태어나게 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절대긍정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나쁜 것이 없습니다.

3)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은 저 구름 위에 구만리 창천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가까지 계시는 아버지이심을 알려줬습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러분 임마누엘이란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가 추워할 때 같이 추워하시고, 우리가 더워할 때 같이 더워하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시고, 우리가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시고, 우리가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하시고, 우리가 신날 때 같이 신나하시고, 우리가 외로워할 때 같이 외로워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임마누엘의 뜻입니다.

대만의 한 청년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2년 동안 700통의 연애편지를 썼습니다. 
매일 편지를 쓴 것이지요. 
이것은 러브레터 사상 세계 기록일 것입니다. 
그런데 연애편지를 700통이나 받은 처녀는 그 편지를 쓴 사람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 편지를 배달해 준 배달부와 결혼했습니다. 
글로 통하는 것보다는 날마다 접촉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지요. 

같이 있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같이 있으면서 처녀의 얼굴이 어두우면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처녀의 얼굴이 밝으면 같이 덩달아 좋아하고, 처녀의 얼굴이 창백하면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던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셔서 만나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입가에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눈가에 번진 눈물자국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 때문에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우리도 용서하시는, 좋은 것을 주시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점점 더 강해질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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