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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하는가? (롬 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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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하는가? (롬 11:11-24)


최근에 나온 신간 서적중에 홍익희라는 분이 저술한 유대인 그들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라는 책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유대인의 영향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우리와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어찌보면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밀접하게 느끼는 경제, 세계 무역 이런 것들에 유대인들이 깊이 관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몇 명의 유대인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세계 금융산업과 경제를 움직이는 유대인중에 미국의 경제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앨런 그린스펀을 들고 있습니다. 

그는 전 FRB의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는 유대인중에 유대인입니다. 그 다음에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외 할아버지는 엄격한 정통파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또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커피 스타벅스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도 유대인 출신입니다.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 비달사순이라는 분도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유대인의 특성을 모르고서는 세계 경제 동향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그만큼 세계경제에 깊이 관여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도 유대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마지막 종말은 유대인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라는 그런 주제로 말씀을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것은 곧 유대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장자인 자기 선민인 유대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가지 예를 듭니다. 첫째는 자기 예입니다. 나도 유대인이지만 나도 버림받지 않았다. 예수님으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만 사도중에 사도로 쓰임받고 있지 않느냐. 자기 예를 첫 번째로 듭니다. 두 번째로 엘리야의 예를 듭니다. 아합과 이세벨시대에 엘리야는 고독한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나만 남았습니다. 모든 제단은 허물어지고 선지자들은 처형당하고 이제 내 목숨마저도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중에서도 구원받은 백성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읽어 보십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놀라운 유대인을 통한 구원의 섭리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메시지를 네가지정도로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의 넘어짐이 이방인에게 구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넘어짐이 이방인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그들의 넘어짐이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유대인이 넘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는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실족해서 넘어져 버렸습니다. 넘어졌다는 것은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발을 헛딪는 것입니다. 발을 헛딪어서 그들이 범죄하고 패망할 뻔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히 그들을 버리신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는데 거부함으로 튕겨나온 복음의 말씀이 이방인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축복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덥썩 받아들였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오지 않을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까지 축복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유대인 그들을 우리는 히브리인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동양인이고 아시아인이지 우리는 종교적으로 보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 속합니다.  

지금부터 120년전 한국에 언더우드, 아펜셀러가 들어오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우린 무당을 섬겼습니다. 귀신을 숭배했습니다. 유교에, 불교의 영향아래 살아갔습니다. 어찌보면 영적으로 캄캄한 암흑속에 있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2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어디있습니까? 한국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가 한국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가 어디있습니까? 한국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어디있습니까? 한국에 있습니다. 그것도 서울에 있습니다. 얼마나 축복입니까. 120년 전만 해도 저희 가문에서 목사가 나오고 장로가 나오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혹시 도승이나 승려가 나왔다고 하면 모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복음의 물줄기가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불행이 다른 민족에게 축복이 된 것입니다. 한사람의 실패가 다른사람에게 성공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유하게 된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잘 넘어진것입니까? 그들 자신으로 보면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죄값을 엄청나게 치뤘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이 허물어져버리고 2천년동안 방랑객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라잃은 설움을 가지고 고통의 삶을 살았습니다. 6백만의 유태인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복음을 거부한 죄의 값인 것입니다. 엄청나게 불행했습니다. 복음을 거부함으로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보면 이방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넘어왔으니 말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유대인을 버리셨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들어갈때까지 충만한 구원의 수가 이를때까지만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려두고 계신 겁니다. 이방인의 계획된 수가 구원을 받을때 다시 구원의 물줄기가 이방인에서 유대인에게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장에 말씀하고 있는 바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이라는 곳에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울과 바나바를돌로쳐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13장 36절말씀.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너희가 영생을 얻기로 합당치 않은자로 행사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한다 마땅히 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복음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먼저 복음을 맛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거부함으로 이 복음이 이방인을 향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베드로도 고넬료라는 백부장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우리의 원수가 아닙니다. 우리의 은인입니다. 십자군전쟁이나 이런것들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전쟁은 예루살렘을 정복한다고 해서 유럽의 수많은 군인들이 십자군을 만들어서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켜놨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낼때 명분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조상이 멋도모르고 예수를 죽여서 그 죗값을 후손들이 다 치뤘습니다. 죗값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꼭 치러야 합니다. 미워하지 마시고 가능하면 사랑하고 용서하십시오. 내가 미워한 죄값을 내가 안치루면 내 후손들이 치룹니다. 누군가가 치러줘야합니다. 유대인은 우리의 원수가 아닙니다. 우리의 은인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불행해졌지만 그로인해서 우리가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된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방인사회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생기고 얼마나 많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33절에 보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이 복음의 물줄기가 이방인에게 와서 이방인이 엄청난 숫자가 구원받는 이 놀라운 광경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세계에 있는 유대인은 다해야 천만명정도 된다고 합니다. 지금 예루살렘 본토에는 5백만명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중에 예수믿는 사람 메시아닉주라고 하는 예수를 주로 영접한 사람은 한 만오천명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외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이방인중에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20억이 훨씬 넘습니다. 지금 이방인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유대인의 넘어짐이 이방인의 축복이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주는 메시지입니다. 한사람의 실패가 다른사람에게는 영광과 행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계획은 유대인의 시기를 통해서 그들이 회복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는데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13절 14절입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왜? 내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면 증거할수록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축복을 누릴수록 유대인들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시기하는 마음이 듭니다. 자꾸 시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가 둘 있으면 한 아이에게 자꾸 잘해주고 먹을거 주고 돈주고 그러면 한 아이는 시기심이 납니다. 질투가 생깁니다. 좋은의미에서 영적인 의미입니다. 시기심을 합리화하라는 말은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만히 보니까 우리는 매일 고난받는데 저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한 이방인을 봐 유럽을 봐 영국 미국을 봐 저렇게 많이 복을 받지않는가. 우리는 나라도 없는데. 그들의 마음이 시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도 예수를 영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기를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자꾸 복음이 널리 전해져야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시기심이 발동하게 될 것이다. 또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부의 축복 ,행복의 축복이 임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치고 가난한 나라는 별로 없습니다. 다 그 나라가 다른 종교적인 것에 비해서 잘살고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때 보면 동네아주머니들이 애가 젖을 잘 안먹습니다. 애들이 젖먹으라면 입맛이 없는지 자꾸 딴짓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애기 엄마가 그럽니다. 옆집애가 놀고 있으면 얘야 이리와라하면서 이웃집애한테 젖을 물립니다. 그러면 그 애가 젖을 먹습니다. 그러면 이 집애가 그걸보고 질투가 나가지고 쫓아와서 그 애를 쫓아버리가 자기가 엄마젖을 뭅니다. 그리고 꿀꺽꿀꺽 삼키는 겁니다. 제가 어릴때도 밥을 안먹으면 옆집애한테 밥을 줍니다. 니가먹어라 그러면 질투가 나서 뿌리치고 자기 입을 딱 벌리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방법이 이와같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나게 한다. 이 본문을 가만히 묵상해보니 그런생각이 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역사가 50년 70년 100년 되려면 교회안에 기존신자들, 묵은교인이라고도 하고 정통교인, 기존교인들이 있는데 새신자가 들어오면 어느교회나 갈등이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새신자들이 들어오면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새신자들이 열심히 하면 눈총을 받을까요? 눈총을 받습니다.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문화는 다 똑같습니다. 눈총을 받습니다. 들어온지 얼마되지도 안됐는데 너무 열심히 하는거 아냐. 안수집사 될려고 그러나, 장로 되려고 그러나 뭔가 흑심이 있나봐. 이런 일종의 시기심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보고 어떻게 합니까? 새신자들이 열심히 하니까 우리 기존신자들이 이러면 뒤처지겠어 하면서 같이 열심히 하면 누구에게 영광이 돌려집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잘못되면 새신자들을 적대시하게되면 새신자가 올 수가 없습니다. 새신자만 오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쫓아 내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교회는 교인이 몇 명안됩니다. 교인이 딱 4명입니다. 새신자가 가끔들어오는데 어떻게 하든 그 새신자를 쫓아 보냅니다. 말에 상처를 주든 어떻게 하든 쫓아보냅니다. 그래서 이상해서 사회학자가 그걸보고 연구를 했습니다. 저교회는 새신자가 오는데 정착하지 못하고 왜 다 쫓겨나갈까 이유가 뭘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가 오래된 교회인데 교회 뒷마당에 가니까 돌아가신 분 묘지를 쫙 써놨는데 이제 묘지자리가 남은게 딱 4개밖에 안남았습니다. 묘지 빼앗길까봐, 새신자가 들어와서 먼저 돌아가시면 묘지가 없으니까 새신자가 들어와서 먼저 죽기전에 내보낸다는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일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교회를 세운 기존신자들의 노력과 헌신이 대단한 것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새신자가 와서 열심히 하는 것도 용납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같이 열심히 할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건전한 시기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회복이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남이 보기에 시기할정도로 해야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들은 복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들가운데 예수를 잘믿는 형제도 있고 잘 안믿는 형제도 있고 무신론자인 형제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형제들이 좀 잘되야 합니다. 또 자식들이 잘돼야 합니다. 그러면 그럽니다. 동생은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자식들은 잘되고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살고 이상하다 왜 저러지? 시기가 생기는 겁니다. 아 예수를 믿어서 그렇구나 나도 예수믿어야 저렇게 복을 받겠구나. 시기심을 줄 정도가 되어야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시기심을 통해서 다시 그들이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방은들은 그렇기 때문에 자랑해서는 안된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할게 없습니다. 옛날성경에 보니까 자랑하지말라, 다른 성경에 보니까 유대인들을 업신여기지말라라고 공동번역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 18절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꺽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감람나무 비유를 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참 감람나무,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돌감람나무, 돌자가 붙으면 좋은게 아닙니다. 이것은 오리지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인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함으로 가지가 찢겼습니다. 짤려나갔습니다. 짤려나간데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임한겁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의 진액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빨아 들임으로서 우리도 유대인과 동일한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만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이제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영적후손이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우리들도 하나님의 선민이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의 족장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의 약속들이 이제 우리에게도 그대로 임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창세기 12장을 보면 항상 축복입니다. 네가 복의 근원이 될지라. 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브라함에게 한것이고 유대인에게 한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야 유대인도 아닌데 우리랑 무슨상관인가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함으로써 이제 원뿌리의 진액을 받아들임으로서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임한 축복과 약속을 그대로 우리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말씀은 구약일지라도 이제 우리가 유대인처럼 구약성경을 읽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니까. 우리도 참감람나무인 이 뿌리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왜 유대인을 멸시할 수 없을까. 우리의 믿음의 뿌리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려졌던 그 약속이 이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졌기 때문입니다. 19절부터 21절입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꺽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유대인들의 가지가 깍여나가는 것은 바로 이방인들을 접붙임해주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예학적으로보면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나무가 안좋은데다가 좋은 나무를 붙여놓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 원예학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였더니 거기에 참감람나무같은 열매를 돌감람나무가 맺게 되었다. 유대인이 누리는 모든 축복과 약속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뭡니까? 믿음입니다. 유대인이 왜 가지가 짤렸습니까. 간단합니다. 20절에 보니까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꺽이고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섰다는 것입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말고 두려워하라. 자신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이 증거되었고 우리 믿음의 뿌리는 유대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믿음을 거부할 때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우리는 거울삼아야 합니다. 혹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끝날까 조심해야 합니다. 축복으로 시작했다가 멸망으로 끝날까 조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준 중보기도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설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성경을 가져다준 믿음의 선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방인들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것은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지만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속한 민족에게는 누가 복음을 전했습니까? 바로 바울과 바나바가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시말하면 유대인이 복음을 증거함으로 이방인이 복을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원조인 유대인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또한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찢김받았다. 꺽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서야한다고 사도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은 유대인들은 반드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유대민족과 한국민족은 참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유대민족은 지금도 교육열이 뜨겁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이 토라를 외우게 만들고 열심히 공부를 시킵니다. 또 두뇌가 우수한 민족을 꼽으라면 유대인과 한국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제일 아이큐가 높은 두 민족인 것입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침략을 당한 민족이 유대민족과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면서도 영적자부심이 강한민족이 유대민족과 대한민국민족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한반도 단일한 국가임에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말할것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강원도만한 땅덩어리에 5백만의 인구가 살아가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2천년동안 나라잃은 설움을 가지고 살았지만 1948년 독립운동을 일으켜서 1948년 시온니즘운동으로 본토를 회복하고 예루살렘국가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노벨상 수상자들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이방인의 구원의 숫자가 충만히 채워질때 유대인을 향해서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펼칠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 26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하나님은 지금 유대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의 수가 충만한 구원의 수가 이르면 그러면 이 복음의 물줄기가 유대인에게로 향해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어느정도 구원을 받으면 다시 유대인에게 복음의 물줄기가 들어갈 때 전세계가 같이 구원받는다는 이 아름다운 비밀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저희의 넘어짐이 풍성함이 되고 저희의 실패가 세상의 부유함이 되었다면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라요. 이 충만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다 구원을 받을때 온 세계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 충만은 전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넘어져도 실족해도 이방인들은 구원받았는데 그들의 충만한 숫자가 다 구원받는데 얼마나 큰 축복이 이방인과 온 세계에 임하겠는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의 넘어짐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유대인의 구원은 이방인으로부터 시작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놀라운 신비를 깨달았는데 우리는 유대민족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이 사명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받아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온 세계에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온 유대인이 구원받는 날 온 세계에 엄청난 축복과 영광이 임할게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할까요. 그들은 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을 때 온세계가 구원받기 때문에 이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마음에 담으시고 유대민족을 축복하는 여러분들 가까이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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