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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 (마 12: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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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 (마 12:46-50)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가면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1978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물에 잠길 위험이 있자, 지금은 동서리의 대흥 동헌 앞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인근 마을 어떤 사람이 기다란 돌을 주어, 마루 댓돌로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로 공부를 떠났던 자녀가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댓돌에 한문이 쓰인 것을 보고서 읽어보니, 구전으로 전해왔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실화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의좋은 형제’는 1956-2000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내용으로 형제의 우애를 보여주는 가슴 찡한 실화인데, 이 이이야기’는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한창이던 가을, 형제는 땀으로 익힌 곡식을 거두어 똑같이 나눴습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형제는 서로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새살림을 차린 동생은 씀씀이도 많을 텐데….” 형은 지게를 지고 낟가리가 있는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볏단을 동생의 낟가리에 옮겨 쌓았습니다. 동생은 곡식을 똑같이 나눈 것이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형님은 부모님도 모시고 제사도 받들어야 하는데….” 동생도 지게를 지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이튿날 형은 깜짝 놀랐습니다. 낟가리가 조금도 줄지 않은 것입니다. 동생도 놀랐습니다. 그날 밤 형제는 각기 지게를 다시 지고 논으로 갔습니다. “너였구나! 볏단을 갖다 놓은 사람이….” “아니 바로 형님이셨군요.” 형제는 어둠속에서 두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가슴 찡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여의도와 마포 사이 양천 앞 한강을 ‘투금탄’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전통적 금전관을 엿보게 하는 고사가 깃들어있는 강입니다. 고려말기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었습니다. 형제는 똑같이 나눠가지고 나루를 건너려고 나룻배를 탔습니다. 배가 여울을 건너던 중 동생이 갑자기 나눠가진 금덩이를 강에 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그 귀한 금덩이를 왜 버리느냐”고 아쉬워하자 동생이 말했습니다. 

“평소에 형님을 존경하여 따르는 마음이 지극했는데, 금덩이를 갖고 보니 자꾸만 형이 가진 금덩이가 큰 것 같은 사특한 마음이 들고, 형제의 우애를 깰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동생의 말을 들은 형도 가졌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형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 강을 금덩어리를 던져버린 강이라고 해서 ‘투금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형제가 재산 문제로 다투면 나룻배를 태워 이 투금탄 이야기를 들려주어 화해하도록 하는 형제 우애를 위한 교훈의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삭막한 세상에 가족적이란 말처럼 정다운 것은 다시없다. 타인들끼리지만 형이요, 아우요, 어머니요, 아들이라면, 그 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잘못이 있어도, 서운한 일이 있어도, 한 울타리 안에서 한 핏줄을 나눈 가족끼리는, 모든 것이 애정의 이름으로 용서된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같이 즐기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같이 슬픔을 나누는 것이 가족의 모럴이다.” 이것은 한국의 대표적 지성 이어령 교수의 저서 ‘차 한 잔의 사상’중에 있는 글입니다. 

이어령 교수에 의하면,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동질의 핏줄로 상호관계가 맺어진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 어머니, 형, 형수, 제수, 오빠, 누이, 며느리, 사위, 사돈 등의 이름을 갖게 되며, 한 가족의 성원이 되고, 그 가족은 애정 또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모든 가능성을 발휘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가정의 모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가정들은 어떠합니까? 다음은 삼성 재벌 고 이병철 씨의 손자 이재찬 씨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언론의 보도 내용입니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손자 이재찬 씨의 마지막 길은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다. 생활고와 외로움에 시달려오다 18일 오전 갑작스런 죽음을 택한 고인의 장례식장은 적막 그 자체였다. 이씨의 발인이 치러지는 20일 서울 일원동 삼성 의료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국내 최대 재벌가 3세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에 유족들의 반대로 빈소조차 마련되지 않아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은 더욱 깊었다.” 우리는 왜 이씨가 월세 방에서 살아야 했고, 왜 부인과 5년 동안 별거를 했는지, 그리고 왜 46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가정이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최악의 상황은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한편 국내 20대 그룹 중 절반이 총수 일가 간에 경영권이나 재산 다툼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금호, 한진, 두산, 현대, 현대차, 한화, 롯데, 대림, 삼성, 대한전선 등 10곳은 총수 일가 내의 다툼을 겪은 그룹으로 나타났고, 그 중 금호, 한진, 두산, 현대, 현대차, 한화, 롯데 등 7곳은 소위 ‘형제의 난’을 겪었다고 합니다. 

한국 재벌 그룹에서 총수 일가의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로 ‘총수가 그룹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구조’를 꼽았습니다. 때문에 총수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기거나 총수 일가 내의 이견이 발생하면, 그 영향력이 그룹 전체로 확산돼 가족의 문제가 그룹의 문제로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한 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금전 때문에 수 없이 일어나는 가족과 형제간의 갈등을 보면서 ‘행복은 재산 순이 아니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가족관을 보여주는 의미 깊은 말씀입니다. 46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라고 했습니다. 막 3:21절에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친족들이 급히 와서 예수님을 만나기 원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미쳐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섬기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붙들어 두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형제들이라도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족일지라도 예수님의 생존 시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로부터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출생비밀도 들었을 것이며, ‘가나 혼인 잔치’의 이적 등 수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며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친족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마치 귀신들려 미친 것으로 여겨 주님을 데리고 가고자 온 것입니다. 이렇듯 때로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 신앙의 방해꾼 역할을 하는 예가 많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올바로 이해하고 또 위로해 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가족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기준을 가지고 대할 때는, 가족이 오히려 원수일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족들이 신앙의 훼방꾼 역할을 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가깝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간섭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이 다르거나 혹은 불신 가정에서 신앙을 가지게 될 때,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날에도 신앙으로 인해 아비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형제와 형제가 갈등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은 신앙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도 겪으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과 같이 신앙으로 인내하며 슬기롭게 갈등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잠언 16:7절에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오직 자기 사명에만 충실한 결과, 후에는 온 가족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들로 부르며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은 괴롭지만 장차 가족을 주님께 인도하는 날이 올 것이라 인내하고, 한편으로는 불신 가족들이 알고 있는 자신의 옛 사람을 죽이고 주 안에서 변화된 새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저는 처음에 주님을 영접한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가족의 심한 핍박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주님의 뜻대로 나중에 신학교를 가게 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어머니께서 오랜만에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그 때 저의 어머니의 마음은 대단히 괴로운 중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큰아들과, 예수를 믿는 막내아들 사이에서 겪는 영적인 갈등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저와 조용히 단 둘이 있는 시간에 이런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형님이 동생 된 나를 향한 고통스런 이야기였습니다. 술에 취하여 집에 오신 형님께서는 어머니와 단 둘이 앉은 자리에서 “어머님 예수라고 하는 그 놈이 참으로 있습니까? 그놈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을 예수 그 놈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예수 그 놈이 내 동생을 위해서 해 준 일이 무엇입니까? 공부를 시켜 주었습니까? 아니면 밥을 먹여 주었습니까? 그런데도, 내 동생을 예수 그 놈에게 나는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라고 원통해 하는 형님의 말씀을 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렀습니다. 

그리고 내 어머님께,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해주신 일이 밥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주고, 공부를 시켜준 정도가 아닌, 십자가 대속의 사랑, 곧 희생의 죽음이라고 알려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어머니께 소개해 드린 말씀은 베드로전서 1:18-19절이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 그토록 핍박하시던 저의 형님도, 어머니도, 그 가족도 결국 예수를 믿고, 모두가 신앙가족이 되었습니다.> 가족의 인정에 끌려 신앙을 포기하는 자는 나중에 신앙도 가족도 모두 사단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고 알려드렸습니다. 예수님께는 혈통적인 가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은 마리아였습니다. 그의 동생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와 그리고 누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로마 천주교에서 말하는 소위 성모 마리아의 무태설(無胎說)이 얼마나 거짓말인가를 알게 됩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해산한 후, 정혼한 요셉과 결혼하고, 이렇게 자녀를 낳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코 마리아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은 동정녀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종신토록 처녀로 지냈다고 주장하고, 마리아는 원죄가 없다고도 하며, 또한 승천하였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 모든 교리들은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숭상하기 위하여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는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이 혈통 가족 관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어려서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눅 2: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 참여하시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 고통스러운 최후 순간에도 사랑하는 모친을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불신앙의 혈통적 가족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임을 알려주시고, 실로 육은 하나님의 나라에 무익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의 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본문 49-5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찾아온 가족을 만나주시지 않고, 자신의 참된 가족들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까? 

1. 누구든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도 하지만, 또한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는 말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조건은 50절에 ‘누구든지’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 관계없습니다. 남녀노소에 관계가 없습니다. 빈부귀천에 관계가 없습니다. 시대 곧 시간에 관계가 없습니다. 공간 곧 지역에 관계가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지식의 유무에 관계가 없습니다. 인종과 피부 색깔에 관계가 없습니다. ‘누구든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50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든지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요 6: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요1: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말합니다. 그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모친이고 동생들이라고 하였습니다.

3. 예수를 좇는 제자들입니다.

49절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좇는 자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집과 고향과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와 재산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저들은 혈육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선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되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되 벳새다 들녘에서 오병이어를 베푸신 풍성한 물질의 자리, 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의 환호를 받는 영광의 자리만 따르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골고다 언덕 십자가 장소까지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이 조건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가족은 동고동락을 같이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에만 함께 하고, 불리하고 손해를 볼 때에는 도피하는 자는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 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영광뿐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도 적극 동참한다는 의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손해 볼 각오가 되어있는 진정한 주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보다 금생과 내생에서 영광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로얄 패밀리 곧 만왕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엡 2: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속이란 하나님의 가족이란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가족답게 주님을 사랑하고,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성도를 뜨겁게 사랑하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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