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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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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넘어서는 사랑 (눅 13:10-17)


그렇게 대단했던 무더위가 이젠, 기가 꺾였습니다. 7, 8월 한 더위 속에서도 굵은 땀방울 흘리며,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교회학교 11개부서 여름성경학교․수련회, 여섯 팀 국내외 단기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후원, 기도). 늘 그렇지만, 귀한사역에 동참하시는 분들 보면, 남보다 형편이 좋아서 섬긴 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에 헌신하시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편 126편 노래처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들입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기쁨으로 거두고,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는 복” 주실 줄 믿습니다(시 126, 5-6).

여름 사역 마친 즈음, 아주 소중한 메일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生面不知의 어느 집사님 편지입니다. 그 편지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연천에 있는 열린교회(우리교단교회도 아닙니다)를 섬기고 있는 한 집사이자 7살 연우, 4살 연희의 엄마입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농촌선교 여름성경학교를 마치고 감사한 마음에,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 워낙 작은 교회들이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성경학교를 하기란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교회에서 오셔서, 우리 아이들 위해 헌신해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아~~하나님은 이렇게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분들을 통해서도 도우시는구나. 저희 주일학교 아이들, 많은 은혜 받고 너무 행복해했습니다. 주방에서, 강당에서, 밖에서, 헌신하시는 집사님들, 권사님들 보고 많이 감동하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야지~~.

여기 먼 곳까지 시간으로, 일손으로, 헌신하신 모든 분들께 주님의 축복과 은혜가 항상 넘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럼, 내년을 기약하며. 목사님도 승리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이 편지 속에 기쁨과 행복이 나타나지요? 그 기쁨, 행복 누구의 기쁨, 행복인 것 같습니까? 그들의 기쁨, 행복이 곧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행복 아닙니까?

언제,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언제, 우리 하나님이 행복해하실까요? 언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실까요?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 중심적인 삶과 신앙의 경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구할 때입니다. 

우리는 다, 우리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울타리 속에 갇혀 삽니다. 그 울타리 좀처럼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울타리, 가만 보십시오. 밤과 낮 24시간, 일 년, 십년, 이십년, 삼십년, 평생, 어디 그뿐입니까?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삶의 방식, 아주 견고한 울타리입니다. 그 울타리 속에 갇혀 삽니다. 

그 삶의 울타리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믿는다 예수님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쎄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 17)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신앙, 대단해보이기도 하지만, 자부심 가질만하기도 하지만, 그 신앙의 내면 가만 들여다보면, 우리가 시대의 문화의 울타리에 갇혀 있기 십상(十常)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배운 것, 내가 익히 아는 신앙수준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때로, 그 울타리 경계를 넘어서지 못해서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믿음’의 수준까지 이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天國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 20).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옛 사람에게 말한 바를 너희가 들었으니(지금까지, 너희가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에 대하여 듣고 나름대로 배웠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너희가 배운 것이 그런 뜻 아니다, 너희가 지금까지 잘못 배웠다, 잘못 믿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참뜻은 바로 이런 뜻이야)”며, 다시 가르치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 율법의 문자만이 아니라 문자를 넘어서는 정신까지,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변화되는 복음적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 所望,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같이 내 의, 내 경륜, 연륜 자랑할 것 없습니다. “오직,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신앙, ‘그대로’ 행할 것이라 / 빌 3,13-16; 겸손이고, 또 겸손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3, 10-17말씀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유대종교라는 울타리에 갇힌 자들입니니다. 본문을 보면, 한 女人을 두고 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한 주인공은, 會堂長이라는 인물입니다. 또 한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그 두 주인공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여인이 어떤 여인입니까? 18년 동안(긴 세월, 예속과 억압의 세월) 사탄에게 매인 바 되어,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이 女人 형편, 좀 보시겠습니까? 육체만 병들었겠습니까? 마음도 병든 사람입니다(사탄에게 매여 살았으니,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지요. S. Kierkegaard, 죽음에 이르는 病: 絶望病 앓던 사람).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습니다. 현대의학 용어로는, 척추교착염이라고 한답니다(신체는 자라는데, 척추가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등이 굽습니다). 이 여인의 얼굴은, 언제나 땅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했겠습니까?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귀신 들린 여인이었으니,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이 회당에까지 나와 먼발치에 앉은 것 보면, 인생의 갈증이 깊었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인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시던 그 회당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인을 사이에 두고, 순식간에 아주 민감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유대종교의 至嚴한 ‘율법전통의 울타리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버리시는 예수님의 치유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보셨습니다(ivdw.n). 사탄에게 18년 동안이나 매임 바 된 그 고통, 그 絶望, 눈물, 보신 겁니다. 그 여인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女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십니다(눅 13, 12). 그러고는,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按手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눅 13, 13). 놀라운 치유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여인이 고침 받은 것을 보고 憤을 내면서 무리들에게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소동벌인 者가 있지요. 누굽니까? 그 회당의 총책임자,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이 분을 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유대종교의 율법전통, 곧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죄라는 이유입니다(출 20, 9-10; 신 5, 13-14; 사실 이 전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요, 유대종교가 만들어 놓은 규례; 1521가지). 

회당장의 신앙의 기준, 울타리가 누구의 신앙과 행동과 부딪친 겁니까?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는(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예수님과 부딪힌 겁니다. 이는, 회당장의 신앙(유대종교의 신앙, 율법전통,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장로들이 추구하던 신앙)이 예수님이 공생애를 통해서 말씀하시던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신앙이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유대종교에서 會堂長이 차지하는 자리, 위상, 어느 정도인지 아셔야 합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성전에서는 제사장이 중심적인 인물이라면, 회당에서는 회당장이 제반 업무, 전권, 책임을 가진 자입니다. 유대종교를 대표하는 인물부류 중, 회당장을 빼놓을 수 없다는 얘기지요. 

유대사회에서 회당장이 차지하는 존중도가 어느 정도인지, 탈무드에서 말하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랍비들의 가르침이 이렇습니다. “남자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학자의 딸과 결혼하게 하라. 학자의 딸을 찾지 못한다면 당대의 위인 중 한 사람의 딸과 결혼하라. 위인의 딸을 찾지 못한다면, 회당장 중 한 사람의 딸과 결혼하게 하라. 회당장의 딸을 찾지 못하면, 구제를 담당하는 재무관의 딸과 결혼하게 하라. 재무관의 딸을 찾지 못하면, 초급학교 교사의 딸과 결혼하라”(b. Pesah 49b). 유대종교사회에서의 회당장의 자리는, 당시 남자가 결혼 상대여인을 구할 때, 신부감 서열 3위에 해당될 만큼 대단한 신분이요. 회당장은, 유대사회종교를 지탱하는 핵심인물입니다. 

문제는 그런 회당장이 가지고 있던 신앙과 신앙울타리가, 예수님이 가르치시던 하나님 나라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는 겁니다(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던 이스라엘의 國師, 니고데모).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 받는 신앙의 표본이었다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까지 나아가야 합니까? 우리의 신앙 울타리가 되고 있는 기준, 무엇입니까?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임 바 되어, 절망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그 女人조차도 불쌍히 여기지 못하고, 안식일에 그의 병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도리어 분을 내는 그런 신앙을 혹,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를 보십시오. 유대종교의 미쉬나(우리성경에는 “장로들의 유전”, “장로들의 전통”)에 보면, 짐만 싣지 않는다면, 안식일에도 짐승들(소, 나귀)을 우리 밖으로 끌어내어 물도 먹일 수 있습니다. 혹, 구덩이에라도 빠지면 건져내줄 수도 있습니다. 안식일 범하는 죄가 안 됩니다. 짐승은 그렇게 해도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종교가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유전 때문에(1,521가지 법조문 때문에),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임 바 되어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온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그 매임에서 푸는 것이, 어찌 합당한 일이 되지 못합니까? …. ‘이것이, 어떻게 너희 말대로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되느냐? 그렇지 않다. 너희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지 못한 것이다’ 그 말씀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義(신앙기준)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義보다(장로들의 유전이 가르치는 율법의 가르침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하신 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2018년부터, 우리나라 인구가 감소한다고 합니다(동시에 급속한 고령화사회로 진행. 부산이 심각한 도시; 2019년 고령사회, 2026년 초고령사회; 제가 60대가 될 때, 우리 사회는 초고령사회가 된다는 말, 심각한 현상). 그러다보니, 요즘 “아이 더 낳자”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대 1960년대는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하더니, 한 40년 쯤 지나자 손바닥을 확 뒤집어버렸습니다. 산아제한정책을 실행하던 정부기관이 출산장려기관으로 180도 업무전환을 했습니다. 출산장려정책 중요합니다. 다급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당연한 줄 알면서도, 마음이 참 불편합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출산율 급락=인구감소=경제력 위축’이라는 등식을 들먹이면서, 덮어 놓고 이제는 ‘더 낳아라’, ‘더 낳자’ 외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아이 더 낳자’ 외치기도 하지만, 정작 우리는 아이들을 위탁시설에 숨깁니다. 해외입양보내기 바쁩니다. 우리의 출산장려운동에는 ‘내 핏줄 더 낳자는 무서운 혈연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物神(물질이 神)을 숭배하는 지독한 경제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아이 적게 낳자 운동한 이유도, 경제논리요, 아이 더 낳자는 이유도 경제논리입니다. 그런 경제논리 생각하기 전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創造命令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경제를 따지면서 돈이 있어야 아이도 낳고, 키우는 것 아니냐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기보다, 내가 배웠고, 내가 알고, 내가 행해오던 신앙기준을 가지고,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장로들의 유전 때문에 안식일에도, 짐승은 우리에서 끌어내어 물도 먹이고, 풀도 뜯게 하고,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장로들의 유전 때문에,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허리 한 번 펴보지도 못하고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온 ‘아브라함의 딸’(하나님의 자녀를)을 그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을, 안식일을 범한다고 분내는 신앙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두 랍비 ‘샴마이’와 랍비 ‘힐렐’이 있습니다. 한 번은 뻔뻔스러운 異邦人이, 랍비 샴마이에게 찾아가서, 자기가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 토라(율법) 전체(핵심)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 합니다. 그러자, 샴마이는 들고 있던 측량자막대기로 그 이방인을 후려치면서, 내가 평생 연구해도 다 알지 못하는 토라를, 그 짧은 시간에 가르쳐 달란다며 내쫓아버렸습니다. 그가 또 랍비 힐렐을 찾아갑니다. 랍비 힐렐은, “네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모든 율법의 가르침(=토라)이다. 다른 것들은 이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가서 이것을 배우라”했습니다. 

한 이방인이 랍비 샴마이와 힐렐에게 물었던 똑같은 질문을, 유대종교의 율법전문가(서기관, 신학자)인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이었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主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토라)과 선지자(선지서)의 강령이니라”(마 22, 34-40). 그렇습니다. 내 신앙이 아무리 중요해도, 귀해도, 소중해도, 그것이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이웃사랑 하지 않고, 나아가 원수사랑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 8).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랑은 온 율법서와 선지서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 우리 삶과 신앙의 새로운 지표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가진 신앙의 기준 때문에 外飾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으로, 내가 작게 여기는 그 소자를 섬기는 온전한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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