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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은 바른 교훈을 굳세게 말하게 한다 (딛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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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바른 교훈을 굳세게 말하게 한다 (딛 2:1-15)
 

성령강림주일 이후로 계속해서 ‘성령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신약성경 각 권을 따라 강론해왔습니다. 오늘은 이제까지 해왔던 순서를 따른다면 디모데전서를 통해 증거해야 하는데, 디모데전서는 그동안 여러 번 자세히 강론을 했기 때문에 디도서를 하기로 제가 정했습니다. 성령세례에 대하여 4복음서를 시작하여 각 권을 차례대로 강론을 해왔으니 여러분이 이것들을 모아두면 나중에 각 권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디도서는 ‘바른 교훈’이란 말이 중심어가 됩니다. 2:1절을 보십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사실 이 말은 ‘말하라!’는 명령문입니다. 1:9절과 2:8절에서도 ‘바른 교훈’과 ‘바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디도서의 전체적인 주제는 3:8절에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오늘 설교 제목처럼 저는 디도서의 주제는 ‘바른 교훈을 굳세게 말하라!’라는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바른 교훈을 굳세게 말하라!’고 했는데 그러려면 디도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2:15절입니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여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디도가 권위가 있어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왜 바른 교훈을 굳세게 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건 그레데에 있는 교회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디도를 그레데에 보낸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려 함이니” 바울 일행과 같이 동행하다가 디도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두었습니다.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라고 남겨 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자들을 장로로 세워야 할런지를 1:6-9절에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들을 세우는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1:9절입니다.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그레데에 바른 교훈을 거슬러 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변론과 다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이단까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3: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거슬러 말하는 자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1:10절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는데 할례파가 있었고 이들 때문에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1:11). 이들의 허탄한 이야기를 추종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1:14).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도서 끝에 보면 아데마와 두기고를 보내려고 했으며 이들보다 먼저 급히 율법교사 세나와 아볼로를 보내었습니다. 거슬러 말하는 자들의 세력에 대항하여 율법교사와 유대인과 성경으로 논쟁하여 이겼던 아볼로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회의 부족함을 바로잡는 일에 바른 가르침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해야 할 일은 교회를 바로잡을 직분자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그걸 바르게 시행하는 정치질서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교회의 성도들이라면 교회의 직분자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들을 존경하고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오래 전에 조장로님이 제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조장로님은 광주교회에서 장립을 받으셨고 그 후에 서울교회로 올라오셨습니다. 장로님은 광주교회와 서울교회가 장로를 대접하는 것이 너무 달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과 장로는 동급이다 생각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어린 청년들이 장로님과 대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언행은 성도로써 기본적인 자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조장로님을 뵐 때마다 죄송스럽게 여깁니다. 잘못 가르친 책임이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면 그레데 교회의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10-14절입니다.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그레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 나오는데 이는 우리 나라로 보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의 특성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레데인들은 오래 전부터 거짓말쟁이와 게으름뱅이로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기 어떤 선지자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그레데 시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시인이 그레데 사람을 평가를 했는데 그 말을 사도 바울이 인용하면서 정말 그렇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레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가증한 자라고 말하며 선한 일에 복종하지도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자기들만의 문제라면 누가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그냥 잘 깨달아서 고쳐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1:10절 이하에 있는 말씀처럼 가정들을 무너뜨리고 허탄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무리가 생겼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로 인하여 무너지는 가정들이 생겼고, 이들을 따르는 무리가 생겨 세력화가 되었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른 교훈이 교회에 자리잡지를 못하고 다른 교훈이 힘을 형성해서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결국 각 가정을 무너뜨려 자기 세력 안으로 이끌어갑니다. 이럴 경우에는 특히 직분자들은 바른 교훈을 굳세게 말하여야 합니다. 그저 개인이 혼자 어리석어서 잘못 알고 있다고 하면 그건 기다리면 됩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 때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라의 법도 개인의 가정사에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때는 국가법이 나서서 관리하고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교회에는 바른 지도자가 세워져서 이런 문제를 잘 다스려야만 합니다. 누구나 똑같이 다 교회 일에 간섭하고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법적인 문제가 생길 때는 교인들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장로들이 이런 문제를 잘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2:1절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그럼 이 바른 교훈을 누구에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을 향해서 말하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말해야 할 것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것으로 나누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2장은 믿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을 권면하고 있고, 3장1절부터8절까지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할 말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슬러 말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면 누구보다 먼저 어르신들이 잘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전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만한 냉정한 판단력을 가져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사람이 더 온전해져야 합니다. 고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디도서에는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에 대한 권면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2:2-5절입니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에서 성도들 각계 각층에 대하여 권면하는데 유독 ‘신중’이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남자들에게 이 ‘신중’이라는 말로만 권면합니다. 2:6절입니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젊은 남자들은 혈기가 강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하여 감정에 치우치거나 단순하게 판단할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교회 안에 이런 저런 말로 다툼이 일어나고 논쟁이 생기면 젊은 청년들은 정확한 판단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거슬러 말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면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젊은 여자들입니다. 해야 될 말인지, 하지 않아야 할 말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말을 마구 퍼뜨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마구 수다를 늘어놓고 확실치 않은 이야기들조차 가공해서 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잘 가르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가르쳐야 할 내용은 한 마디로 하면 집안 일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밖으로 다니면서 많이 말하지 말고 집안 일을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의 각 계층에게 권면을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종들과 상전들도 예전에는 가족 개념으로 한 울타리 안에 살았기 때문에 서로 같이 권면하는 것이라 보아도 괜찮습니다. 이런 가족공동체, 곧 교회에 권면하는 목적이 2:5절 끝에, 그리고 2:10절 끝에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두 구절의 말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실제 자세히 보면 그 의미는 같습니다. 바울이 디도로 하여금 교회에게 바른 교훈을 말하라고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교훈이 비방을 받지 않고 빛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라고 하면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정책을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제사장적인 직무를 다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의 말씀을 빛나게 하려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 목표에 대하여 2:11-14절에 말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복스러운 소망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완성하는 목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례가 되었습니다. 2:14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언약을 지키며 생명과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만,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치 못할 것입니다. 바른 교훈으로 행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함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목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재림의 날에 그 영광에 참여함이 목표입니다.

이렇게 교회에게 하는 바른 교훈의 권면을 디도가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15절에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디도에게 권면을 합니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그런 후에 3장1절부터 바울은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살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3:1-2절입니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혹 우리 가운데 그런 분들이 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기 자식들에게는 굉장히 관용을 베푸는데 남의 자식들에게는 냉정한 분들이 계십니다. 자기 자녀들에게는 모든 요구하는 것들을 다 들어줄 만큼 온유하게 대합니다. 반면에 남의 자녀들에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관심이 전혀 없게 대합니다.
 
사실은 이게 바뀌어야 합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자식 매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성도들을 대하는 것과 교회 밖에 있는 분들을 대하는 것이 서로 바뀌어 있는 경우가 있어요. 심지어 혈연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가정이라 해서 마치 마귀 자식처럼 상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 하여서 가증스럽게 여기거나 혐오감을 품고 대합니다.

그런데 디도서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것은 이와 다릅니다. 교회에게는 엄히 대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관용함과 온유함을 가지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엄히 책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바른 교훈을 따라 살지 않으면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목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런 관용과 온유함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과거에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에 그런 자들이었지 않느냐? 그러니 긍휼함을 갖고 대하라고 말합니다. 3:3절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이런 자들이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까?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새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도 지금 믿지 않고 있는 이방인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오직 주의 긍휼하심을 입어 구원함을 입었으니 이방인들을 대할 때 관용함과 온유함을 갖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과 순종치 않음과 악독과 투기에 대하여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가 하늘 기업을 잇는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셔서 이 일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이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하는 자로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방인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뒤에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3:8절에 권면합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바울의 권면이 신뢰할 만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도에게 요구합니다.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왜 굳세게 말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고 그 목적을 말해줍니다. ‘조심하라.’는 말의 의미를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거짓을 말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를 말하는 자들에게 넘어가지 말고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어느 것이 선한 일인지 잘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이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싫은 말 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급적이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좋다, 좋다 하면서 받아주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상대방이 남이라면 그렇게 하셔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가족입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어떤 부모이든지 자기 자녀가 바른 길을 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녀에게 따끔하게 교훈하거나 틀린 부분에 대하여 지적을 할 것입니다. 그건 자녀가 듣기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가리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아름답고 유익하다고 인정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성도들을 대할 때는 가족으로 대하지 않고 남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기관이 바르지 않는 길을 택하여 갈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설교 시간에 옆에 앉아 있는 교우가 졸고 있는 데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자기만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과연 이것이 아름다움이고 유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도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저 수만 많이 모이고 누가 어떻게 살든지 관심이 없이 자기 구원에만 힘쓴다고 하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더구나 목사가 잘못을 해도 마냥 덮어두기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범죄한 일인데도 그런 처신을 합니다. 정말 조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에게 책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성도들과 논쟁하거나 다투려고 하지 않아요. 더구나 어린 사람들이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로써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겸손함입니다. 우리 주님이 겸손함으로 죽으셨거든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장로의 의견이나 자기 의견이나 동급으로 생각합니다. 그저 민주적인 사고방식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자기가 옳다고 주장을 하지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서로 다 옳으니까 어느 방향으로 결정하지도 못하고 각 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교회에 혼란만 가져오게 됩니다. 질서가 잡히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으로 교제하는 시간에 보면 그 고백이 놀라울 정도에요. 그런데 그 드러나는 삶을 보면 엉망이어요. 깨끗한 사람은 모든 일에 깨끗합니다. 언행이 일치합니다. 그러나 드러나는 삶이 이방인보다 더 못하게 나타난다고 하면 그건 분명합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자기 배만 위하여 사는 사람이어요.

여러 번 경험을 하는데 자기 결정을 가지고 와서 통보를 하는 식으로 장로님이나 저에게 말하는 점입니다. 그 앞에 장로님이나 저나 전화를 해서 약속을 하였더라도 그건 완전 무시가 되고, 어느 순간에 자기 결정이니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곤 자기 결정이 무시되면 목사님이 강압적으로 자기 의견을 무시하거나 억눌렀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건 아니어요. 그러면 안됩니다. 누가 이런 것을 가르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차 충고를 했습니다. 저에게 와서 말하기가 껄끄러우면 장로님에게라도 찾아가 말씀을 드리라고요. 

교인이라면 자기 결정과 맞지 않더라도 장로들의 의견을 겸허히 듣고 순종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부모가 자기보다는 더 멀리 보고, 더 넓게 봅니다. 그것처럼 장로들은 자기 자신의 인기와 명예를 위하여 결정을 하지 않고 더 넓게 보고 조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성도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후회막급한 일이 있습니다. 부산영락교회 전도사로 시무할 때 처음 시무를 하는 햇병아리 전도사인 제가 단칼에 담임목사님을 평가해 버렸습니다. 더구나 이 담임목사의 목회의 결말이 언제 끝나게 될 것인가를 예언하는 것처럼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과감할 정도의 발언을 하는 근거는 나 자신은 복음에 대하여 잘 알고 확실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교만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입니다. 정말 많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중요한 일은 이처럼 바른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를 강론할 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군대에서 지휘관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바른 교훈으로 교회를 엄하게 책망하여 교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장로를 세우는 일이 너무 중요합니다.

안수집사를 안수하여 세우는 일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안수집사직은 다스리는 직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제와 긍휼로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결정이나 판단을 할 만한 직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안수집사의 자격도 그리 까다롭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최근에 보신 바와 같이 장관 청문회와 국무총리 청문회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만큼 더 중요한 직무에로 취임하기 때문에 아주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다 짚어 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를 잘못 선출하면 그 판단과 결정으로 인하여 교회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특히 목사를 잘못 받으면 그건 정말 교회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직무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사 자신도 이런 점을 유념하여 신실하게 교회를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듣고 알며 깨닫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레데 교인들처럼 거짓말쟁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말로는 시인하면서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한 번 영접했다고 이제 우리 구원은 안전하다고 하는 가르침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기관을 맡은 장이라고 하면 이 디도서의 가르침을 유념해야 합니다. 무엇이 아름다우며 유익한지 알아야 합니다. 기관의 회원이 여전히 잘못을 범하는데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거나 그대로 버려둔다면 그 기관을 맡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해야 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분명한 경계를 긋지 못하는 자는, 또한 잘못을 범한 자를 바로잡지 못하는 자는 장의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부모도 자녀로써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정하지 못하거나 가르치지 못한다면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저도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한참 모자릅니다. 강단에서는 크게 소리치는데 개인으로 만나서는 확실하게 말을 잘 못해요. 그래서 적절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말 자격이 부족한 자입니다. 아무리 멀리 하고 떠난다 하더라도 해야 할 말을 굳세게 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하여는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게 아름다움이고 유익한 것입니다.

아무리 거슬러 말하는 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바른 교훈을 굳세게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바른 교훈을 말하게 합니다. 대적하는 자가 있더라도 담대히 증거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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