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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씨 뿌리는 비유(4) (눅 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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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비유(4) (눅 8:11-15)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민족의 대 명절인 추석이 3일 후로 다가왔습니다. 풍성한 가을의 오곡백과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오늘도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상고해 보는 중에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이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며, 그리고 네 종류의 땅은 각기 복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 때에,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한 심령이니, 곧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곧 싹이 나오긴 했으나, 해가 돋은 후에 뿌리가 깊지 못하므로 타져서 말라 죽어버렸다고 했는데, 이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했습니다. 셋째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씨앗은 옥토에 뿌려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앞의 여러 가지 예를 드신 것입니다. 이제 옥토는 어떤 땅이며, 옥토에 뿌려진 씨앗은 어떤 결실을 맺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옥토란 곧 좋은 땅을 의미합니다. 주석가 ‘바클레이’는 말하기를 ‘좋은 땅’이란 선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곧 선한 청취자로서 세 가지 좋은 태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첫째,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해서 듣는 자들이며, 둘째, 들은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참뜻을 발견할 때까지 숙고하는 자들이며, 셋째, 그것에 근본을 두고 행하는 자들로서, 자기가 들은 것을 행동이라는 언어로 번역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옥토에 떨어진 씨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옥토와 같은 마음은 어떤 것인가?

1)중생한 마음

옥토는 이른 봄 농부가 씨앗을 뿌리기 위해 쟁기로 일궈 놓은 땅을 말합니다. 아무리 기름진 땅이라 하더라도, 일궈놓지 않으면 그것을 옥토라 부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씨앗을 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내 묵은 땅을 일궈 놓음으로써, 땅은 신선한 산소를 공급받고, 땅 속에 자양분이 골고루 섞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도 일궈져야만 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이 일궈져야 한다는 것은, 곧 중생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장하고 결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보배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귀중하게 간직합니다.

2)착한 마음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마음이 좋은 밭의 한 요소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착한 마음이란 원래 진리 앞에 겸손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편견과 오만 무례로 다져지고 굳어진 길바닥 같은 마음은, 주님을 영접하여 영생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한 마음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전도를 받은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심령의 소유자들만이, 좋은 밭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며, 주님께로부터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3)좋은 마음

또한 주님께서는 ‘좋은 마음’이 좋은 밭의 한 요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마음이란 높은 이상과 목표를 얻기 위해서, 하찮고 방해되는 것들을 포기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속 깊이 완고함의 바윗덩이나 탐심과 허영의 뿌리를 그대로 지닌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신앙을 가진 후에도 가룟 유다나 데마처럼 은혜의 복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많으며, 디오드레베처럼 교회 공동체에서 가시와 같은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나비가 고치에서 나와 날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번데기 때의 오물들을 모두 배설해버려야 하는 것처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불경건한 요소들을, 회개함으로 뽑아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4)온유한 마음

옥토는 부드러운 땅입니다. 옥토는 뿌려진 씨앗이 쉽게 속으로 침투할 수 있고, 발아 될 수 있도록 충분히 부드럽고 포근한 땅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도 포근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에게 쉽게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은 우리 속에서 싹이 틀 수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온유를 배우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 하였고, 사도 바울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항상 온유한 자에게 쉽게 침투하며 좋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5)자양분이 많은 마음

옥토는 자양분이 많은 땅입니다. 곧 기름진 땅을 말합니다. 환경은 좋은데 영양분이 없는 땅도 많습니다. 그런 땅을 농부들은 죽은 땅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인공적으로 객토를 하기도 하고 퇴비와 비료를 뿌리는 것입니다. 거름을 뿌려 영양이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농부가 이른 봄 아무리 땅을 부드럽게 일궈 놓아도, 땅 속에 자양분이 없으면 그 땅에는 씨앗을 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소, 인산, 가리 등의 자양분이 땅 속에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자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와 전도와 봉사와 같은 것들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자양분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랄 수 있어야 합니다.

2. 씨앗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해, 씨앗이 없는 옥토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씨앗이 없는 옥토란 기름이 없는 등잔이요, 물고기가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이러한 밭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황무지로 변화해 갈 것입니다. 온갖 잡초와 엉겅퀴만이 무성할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양이 있고, 인격이 있고, 지식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씨앗이 옥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해 주듯,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의 존재 의의를 입증해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3. 열매를 맺기 위한 조건들

1)때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

파종기를 놓치면 씨앗도 옥토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생에서 복음을 영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생은 심판의 추수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복음의 농사는 일생일대에 단 한 번뿐인 일모작임을 반드시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복음은 어릴 때 영접할수록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은 순수한 수용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일생동안 많은 복음의 열매를 산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서,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늘 내일로 미루거나 방탕함으로 나태해진다면, 주님과 이웃들 보기에 부끄러운 삶의 열매만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2)자신을 지켜야 한다.

성도들은 내게 주신 복음이 세속주의, 허무주의, 향락주의, 또는 신학적인 자유주의와 신비주의 등의 물결에 흘려 떠내려갈까 염려하여 자신을 지킬뿐더러, 오늘날 복음의 탈을 쓰고 가시떨기처럼 다양한 형태로 침투하는 온갖 이단 사상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3)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팔레스틴의 식물들은 그 뿌리가 유난히 길다고 합니다. 어떤 뿌리는 식물 크기의 8배나 되는 것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지하수의 물을 얻으려는 까닭입니다. 그 뿌리가 바로 성도의 신앙 인내심입니다. 인내는 믿음의 다른 얼굴입니다. 인내는 믿음의 기반입니다. 인내심이 무너지면 신앙심도 무너집니다. 형통한 때에나, 환난의 때에나 항상 인내하고 주님을 사모해야 열매 맺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영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얻으려면, 인내로 결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내로 결실해야 함은 인내에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성도의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적절하게 연단의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때로는 오해의 호미질, 외로움과 갈등의 가뭄, 박해와 고난의 장마를 겪게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극복할 때마다, 내 안에 성령의 열매들이 알알이 익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인내해야 합니까? 농부 되신 주님께서 결코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로 인해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는 은혜로우신 분이 내 삶의 농부가 되시기에, 우리는 소망 중에 끝까지 인내하며 열매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열매를 맺기 위해서 인내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기는 잘합니다. 또 그 말씀대로 살려고도 노력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면 그 말씀을 저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닥치게 마련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때로는 가뭄이 닥치기도 하고, 때로는 홍수가 닥치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때에라도 농부가 결실의 때를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듯이, 우리도 신앙생활 중에 어려움이 닥칠 때, 신앙의 결실을 바라보며 끝까지 말씀을 지키며 믿음으로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면 모든 일에 있어 조급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천년을 하루같이 앞당겨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광고를 보면, 속성이니 단기 코스니 하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는 단기 코스가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꾸준히 말씀을 지키며, 끝까지 인내로 연단 받는 사람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내의 중요성은 사울과 다윗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불레셋과의 전투에 앞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무엘이 정한 시간에 오지 않고 지체하자, 다급한 마음에 인내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이에 반해 다윗은 실로 인내의 왕이라 할 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이후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자 사무엘을 통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날 당장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인내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되었으며, 사울의 보좌가 이내 무너진 것과 달리, 그의 보좌는 수백 년을 거쳐 이어졌고 그 보좌가 일시적으로 단절되기도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영원히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윗은 인내로 풍성한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당장 열매를 거두려는 조급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성도들 가운데는 단지 며칠 기도하거나 말씀대로 살아 놓고는, 이내 열매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태도는 영적 무지나 도박은 될지언정, 올바른 신앙의 정도는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잠시 믿다가 식어버리는 일과성 믿음이 아니라, 평생 지속되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다윗과 같이 또는 사도 바울과 같이, 마지막까지 인내로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만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믿음의 풍성한 열매와 함께, 오직 인내로 승리한 자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또한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해서 마가복음에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뿐 아니라, 이해하는 것과 복종하는 행위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이해하고 거기에 복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에 그곳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자 했는데, 이 사람들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그리하였으므로, 복음을 듣고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별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를 비우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경청하는 이들이 주님의 뜻을 알게 되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듣는 것과 함께 받는 것이 따라야 합니다. ‘받는다’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외에도 ‘환영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환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와 같이 반응하는 사람이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이든지 마치 보고 싶은 사람, 내 인생에 행복과 유익을 가져다 줄 사람이 찾아오는 것처럼, 반기고 환영해야 열매있는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신이 성도임을 증거 하는 확실한 증거는, 신앙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입니다. 나무의 좋고 나쁨이 열매로 가려지듯,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나는 열매 여하에 따라, 성도인지 아닌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믿었고 또 중요한 직분을 받았다 해도,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참 성도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고 거름을 주고 돌보는 것은 열매를 얻고자 함인데, 추수 때가 되어도 열매가 없다면 그 농부의 마음이 얼마나 실망되고 허전한 마음일지 상상해 보십시오. 열매 없는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종류의 밭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눈을 돌려서 우리 자신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네 가지 종류의 마음밭 중의 하나에 속하는데, 나는 과연 어떤 마음 밭인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말씀의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소원한다면, 먼저 여러분의 마음 밭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 밭이 길바닥이나 돌짝밭과 같이 굳어 있다면, 먼저 애통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충만하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굳어진 마음 밭을 회개와 성령의 쟁기로 기경하여 부드럽게 일구도록 하십시오. 또 만일 여러분의 마음 밭에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 향락의 잡초가 무성하거든, 아낌없이 모두 뽑아 성령의 불에 태워버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질 때마다, 기도의 거름을 주고, 해충이나 새와 같은 사단의 방해물이 틈타지 못하도록 늘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옥토와 같은 중생한 마음, 착한 마음, 좋은 마음, 온유한 마음들이 되어서, 그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반드시 삼십 배, 혹 육십 배, 혹 백배의 결실을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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