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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기도하자 (막 1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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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기도하자 (막 11:20-25)
  

전쟁하는 군인에게 있어서 무전기는 총 이상으로 중요한 장비입니다.
군대에 갔다 온 남자들은 잘 압니다.
무전기를 통해 내 상황을 실시간으로 사령부에 보고할 뿐만 아니라 사령부로부터 실시간으로 작전명령을 받습니다.
전투현장에서는 지금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령부에서는 후퇴하라고 명령합니다.
반대로 전투현장에서는 지금 공격하면 불리할 것 같은데 사령부에서는 공격명령을 합니다.

사령부의 명령대로 전투를 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령부는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무전기를 통하여 주고받습니다.
실탄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상황은 무전이 끊겨 고립되는 것입니다.
무전이 끊겨 고립되면 순간 적에게 포위되어 몰살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고받는 무전 교신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조금만 방심하고 기도의 끈을 놓으면 금방 악한 영이 우리를 포위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고 헐떡거리게 됩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우울하고, 기쁨이 사라지고, 사는 재미가 없어집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계속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 그대로 되리라

오늘 우리가 읽은 짧은 본문에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23절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절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런데 본문에 나온 내용은 황당한 데가 있습니다.
멀쩡하게 살아있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 한 마디로 뿌리째 말랐습니다.
그런 일은 혹시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동안 벌레가 뿌리를 갉아 먹었는데 그 현상이 하루 사이에 나타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다음 얘기는 너무 황당합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아무도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말씀이 곧이들렸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런 극단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기도를 가르쳤을까요?
도대체 기도가 뭐 길래?
왜 예수님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기도를 가르쳐야만 했을까요?
무화과나무가 마른 기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삶의 마지막 주간 화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이제 사흘이 지나면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고아처럼 이 세상에 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엇으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손에 뭔가 쥐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생살이에서 최고의 무기인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이 어떠한지 실제를 보여주며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은 기도의 능력을 보여준 실제입니다. 

그리고 기도란 ‘산들을 명하여 바다에 던져져라.’ 할지라도 그대로 되게 하는 능력이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이런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2. 이런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입니다.

1) ‘산들이 바다에 던져지는’ 역사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다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6: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렇다면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 한마디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연인 사이에는 별 것 아닌 내용의 얘기로도 밤을 새웁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해야 사랑이 깊어집니다.

대화를 하지 않고 사랑이 깊어지길 바란다면 그것은 어리석습니다.
통화료가 많이 들어가 전화를 못하겠다거나 교통비가 많이 들어가 만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사랑이 날마다 새로워지길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고 할지라도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 일어나 함께 가자’는 주님의 데이트 요청에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기도요청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때, 그냥 어려울 정도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대한 장애물에 가로막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서, 주위의 아무런 도움도 없는 상황, 그 절대 고독과 절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초청장입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많이 힘드시죠?”라고 했더니, “요즘 좀 게을렀어요.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시는군요.”
당장은 힘들어도 믿음으로 눈을 질끈 감고 기도하십시오.
파워기도는 눈물로 만들어 집니다.
지금 고난에 직면했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정말 하늘의 능력을 다운로드 하는 순간을 맞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조차도 근심은 있고, 걱정은 있지만 기도는 없습니다.
특별한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과 대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의외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금식을 하든지 철야를 하든지 결사각오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41:17절입니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갈증으로 혀가 마를 때’
주님을 향한 영적인 목마름으로 혀가 타들어갈 때 주님은 반드시 응답하시고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2) ‘산들이 바다에 던져지는’ 역사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 차 한 대가 길 옆 도랑에 빠져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소방트럭이 있어 체인을 걸어 끌어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체인이 뚝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체인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훨씬 더 강한 체인을 가지고 와 빠진 차량에 걸었습니다.
차를 끌어올렸습니다.
결국 문제는 소방트럭의 힘이 아니라 약한 체인이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또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도 무한대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작동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체인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믿음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①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2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주님께서 책임지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에게 의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을까?”
“의사가 안 된다고 했는데........”
‘될까? 안 될까?’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약1: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의심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영감과 축복을 우리 스스로가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믿어 주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을 모른척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우리가 응답받기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길 원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1-13절 )

② 믿음은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주님께서 책임지시리라 믿습니다.
이미 받았다고 믿고 사는 삶과 아직 받지 않았다고 믿는 삶이 어떻게 다를까요?
이미 응답 받았다고 확신하는 삶과 아직 응답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받은 줄로 믿으면 행동이 나갑니다.

막 5장에서 우리는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군중 속을 헤집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접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이 죽자 살자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자기 병이 낫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긴가 민가인데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12년이나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일주간만 누워있으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런데 12년이나 앓았다면 지쳐서 스스로 설 수 없을 정도로 병약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운집한 군중 속을 헤집고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까?
몇 미터나 전진할 수 있던가요?
장정도 헤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운집한 군중들을 헤집고 들어가는 그녀의 행동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뿐만 아니라 혈루증은 문자 그대로 피가 계속 흘러내리는 끔직한 병으로, 율법적으로 불결하다고 하여 그녀는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당한 처지였습니다.
그런 여인이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뚫고 갈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녀에게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확신 없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확신은 행동을 낳습니다.
한걸음 한 걸음 숨이 차고 쓰러질 듯 힘들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믿음의 터치는 예수님의 능력을 이끌어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만 다 같은 은혜를, 다 같은 축복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사람은 영혼이 회복되고, 심령이 회복되고, 육신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나 어떤 사람은 그저 냉랭합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 영광에 압도되나, 어떤 사람은 야구장에 온 것만큼의 열기도 체험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냅니까?
주님의 옷자락에 믿음의 터치를 하느냐에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전혀 소망이 없는데도 축복된 미래를 전제하고 선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기적적으로 떡을 나눠주신 다음 감사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떡을 나눠 주기 전에 먼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꼭 그렇게 하실 줄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
믿는 자에게 미래는 이미 과거완료형인 것입니다.

이뤄진 것을 보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과학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먹을 줄 알고 김칫국물부터 마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사람은 그 얼굴, 목소리,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뭔가 큰 빽이 생긴 것 같고, 왠지 모르지만 돌파구가 생길 것 같은 확신 속에서 평안을 얻습니다.
누군가 ‘주책’은 ‘주가 책임지신다.’는 말의 준말이라고 농담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주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사람은 수많은 문제와 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고 평안합니다.
우리도 그런 ‘주책’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근래에 기독교 서가의 베스트 셀러는 이어령 씨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분입니다.
그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비판적인 글을 썼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무릎을 꿇은 것은 그의 딸 민아씨 때문이었습니다.
민아씨는 암에 걸리고 눈병에 걸려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무서운 삶의 현실 앞에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했습니다.
지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딸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것은 지상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은 칠흑 같은 절망의 어둠 속에 비치는 한줄기 희망의 별빛이었습니다. 
민아씨는 회복되었습니다.
이 신유사건은 이어령씨의 지성의 탑을 여지없이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0월 10일부터 가을철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손곱아 기다립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우리 손에 들려주고 싶어 했던 기도의 무기를 들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삶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뭘 그런 것 가지고 걱정해. 기도하면 되지!”라고 선포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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