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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과 아내들 - 육신의 정욕 (창 29 - 창 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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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9장 - 30장 24절


야곱은 벧엘에서 기도를 마친 후 밧단 아람으로 향하여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러 들에 있는 우물가에 양떼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다가갑니다.

여러분! 고대 근동지역에서 우물은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물이 귀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물을 공동으로 관리하기 위해 큰 돌로 그 입구를 막아놓았습니다.
그 돌은 한사람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 돌이기 때문에 양을 치는 목자들이 모두 모였을 때 합심하여 그 돌을 들어내고 양들에게 물을 먹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약 100년 전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 또한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었습니다.
그때 엘리에셀도 우물가를 찾았습니다. 그 말씀이 창세기 24장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자부를 순적이 만나기 위해 하나님께 먼저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리브라를 순적이 만났습니다.

야곱도 아내를 얻으려고 이곳에 왔지요.
그러나 야곱이 기도를 했다는 내용을 우리는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 우물가에 도착한 야곱은 우물가에 모여 있는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홀의 손자이면서 자신의 외삼촌인 라반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이렇게 야곱이 우물가를 찾아간 상황을 유대 랍비가 주석한 미드라쉬는 ‘야곱이 고향을 떠날 때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에게 ‘ 야곱아 네가 밧단아람에 도착하거든 우물가를 찾아 가거라

왜냐하면 거기서 외삼촌 라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우물가에서 엘리에셀을 만나 너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여하튼 우물가에서 야곱은 외삼촌의 딸인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라헬을 만난 야곱이 자신을 소개하자 라헬은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 라반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우리가 창세기 24장에서 이미 살펴 본대로 라반에 물욕이 강한 사람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라반의 성정에 비추어 빈손의 야곱을 환대하는 본문 13절로 14절의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정말 상황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상황에 대하여 라반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은 부자다, 그의 손자라면 그때 아브라함의 종보다 더 많은 은 금 보화들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야곱을 환대 했는데 야곱은 달랑 괴나리 봇짐하나를 둘러매고 라반 앞에 나타났고 그래서 혹시 자신을 시험하려 종자들을 숨겨 놓고 혼자 온 것이 아닌가 하여 라반은 한 달을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한 달 동안 손님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야곱은 라헬을 따라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라반은 야곱에게 조카지만 삯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보수를 구하라고 요구합니다.

야곱은 기다렸다는 듯이 칠년을 봉사하겠으니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제안을 합니다.
이 말에 라반은 즉시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라고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이 라헬을 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본문은 16절로 18절입니다.
여기서 17절의 말씀 가운데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라고 합니다.
안력이 부족하다 시력이 약하다. 비슷하지요.
그래서 야곱이 택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으며,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가 예뻤다.”라고 바꾸어서 생각을 하여 보면 눈매가 부드러운 여인은 영적으로 차분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몸매가 아름답다, 용모가 예쁘다,는 ‘육감적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으로 다가오지요. 그러므로 야곱은 영적이 여인보다 육적인 여인을 선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에 대하여 깨어짐이라는 책을 쓴 ‘스카라 포뭄’은 야곱이 아직 완전히 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야곱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 적 외모의 아름다움 으로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많은 청춘 남녀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배우자를 고르고 있지요.
여기에 더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어깨를 으쓱거릴 수 있는 재력이나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배우자로 택할 때 그 사람의 깊은 인격적 성숙도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영적인 아름다움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영적으로 좀 더 깊은 경지에 있었더라면 그는 배우지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저에게 땅의 티끌같이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맺어주시는 배우자를 만나기 소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의 눈에는 라헬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만약 레아와 라헬 중에 어느 한쪽을 저의 아내가 되도록 허락하셨다면 하나님의 그 뜻을 알 수 있는 분별력을 제게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아는 대로 야곱은 기도하지 않았고 마치 태초의 조상 하와처럼 보기에 좋은 대로 선뜻 라헬을 택한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육적인 자아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지금의 우리도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다스려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기위해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서 20절은 야곱이 라헬을 택한 것에 대하여 야곱이 라헬을 연애했기 때문에 선뜻 그녀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 했나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눈이 멀어도 잘 멀어야 합니다.
만약 눈이 잘못 멀어버리면 야곱처럼 여인들 때문에 그리고 거기서 태어난 자식들 때문에 평생 속을 썩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아드리기 위한 대가로 라반에게 7년을 봉사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시 고대근동의 문서를 살펴보면 아내를 얻기 위해 지참금조로 여인의 집에서 1년 내지 2년 을 봉사한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거기에 비추어 야곱이 제안한 7년은 파격적인 것이지요.
야곱이 라헬을 그만큼 사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것이 올무가 되어 14년 그리고 재산을 위해 6년 도합 20년의 세월을 라반에게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약속대로 7년을 라반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 7년이란 긴 세월이 야곱에게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7년을 단 며칠처럼 지나갔다고 본문 20절이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온전한 자연인으로 서의 불타는 열정이요 흠모하는 정열이었지요.
우리가 아는 대로 인간의 본성적 애정은 사람을 물불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매우 열정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콩깍지가 씌우면 그 사람밖에는 세상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지요.
그래서 가야할 곳과 서야할 곳을 구분하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직 바로 서지 못한 사람들 또한 이러한 자기의 인간적 정열에 따라 살지요.
그래서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신앙에 덜 성숙한 사람은 인간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신앙에 성숙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고 안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부부가 이러한 사랑으로 맺어진다면 평생을 싸울 일이 없겠지요.
내 주장이 없으니 싸울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 원합니다.

정열을 불태운 7년의 마지막 그 날에 야곱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자축하듯 술을 취하도록 마셨습니다. 그리고 신방에 들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들이 도출됩니다.
그중에 두 가지만 살펴보면 그 하나는 야곱이 아무리 술이 취했더라도 7년을 사랑했던 여인을 몰라보았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날은 자신이 야곱과 결혼하는 날임을 알고 있었을 라헬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이 아버지의 계획에 동의 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드라쉬를 또 찾아보았습니다.
미드라쉬는 야곱과 라헬이 7년의 연애를 하면서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암호를 사용했다고 전제합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 라헬은 아버지의 계획을 알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입을 다물기로 했고 더 나아가서 언니 레아에게 그 암호까지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정이긴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본문의 문제점이 매끄럽게 해결이 되지요.
우리는 이 해석이 유대 랍비의 해석이기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하튼 신혼의 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어서야 야곱은 옆에 누워있는 신부가 라헬이 아니라 레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지요. 따라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야곱의 항의에 이제 장인이 된 라반은 야곱에게 지방의 풍속을 들어 자신을 변호한 후 신혼의 일주일을 보내고 난 후 다시 라헬과 결혼하되 또 다시 7년간 더 봉사하라고 요구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삼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의 제의에 동의하고 7일 후에 라헬과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라헬을 얻기 위해 라반과 새로 약속한 7년을 무보수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야곱은 14년이나 소비하는 큰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끈기와 인내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의 명분을 사기위해 끈기 있게 기회를 살폈지요.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을 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소유를 확보하기 위해 라반에게 끝까지 인내하면서 20년을 종살이 했습니다.

그리고 얍복 강에서 끝까지 인내하며 천사와 씨름한 것 등에서 우리는 야곱의 끈기와 인내가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 믿음의 삶에서 야곱과 같은 인내와 끈기를 소유한다면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고향을 떠나 온지 7년 78세정도 되었을 야곱에게서 자녀들이 태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함으로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습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13년 동안 11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이 태어납니다.
이제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어떠한 여인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라헬은 오랫동안 무자하여 남편에게 근심을 주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기 까지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서 살펴보면 라헬은 수군거림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라헬은 남편 야곱에게 대단히 무례한 여인이었습니다.

30장 1절로 2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물론 라헬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내와 끈기의 사람 야곱이 노를 발할 정도였다면 라헬의 극성은 도를 넘어서는 것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세 번째 그녀는 남편 야곱을 유인해서 자식을 억지로 얻기 위해 자기 시녀 빌하와 동침하게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태어난 단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냥 간과 할일이 니지요.


넷째 그녀는 시기 질투심이 대단히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창세기 30장 1절을 살펴보면 그 형 즉 언니 레아를 투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해석대로 라헬이 신앙에 바른 여인이었다면 형을 투기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했지요. 여기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시기 질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것입니다.


다섯째 라헬은 불필요한 경쟁심으로 가득 찬 여인이었습니다.

30장 8절을 찾아볼까요.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라헬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 아픔까지도 하나님께만 아뢰는 믿음의 오래 참음 즉 성령의 다스리심 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라헬의 모습과 후에 사무엘의 모친인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믿음의 여인은 어찌해야 하는지 답을 얻게 됩니다.


여섯째 그녀는 레아가 자기의 시녀를 야곱에게 주어 첩으로 삼게 하는 일에 동조자이자 원인 제공자였습니다.
30장 9절로 12절을 찾아보면 야곱은 라헬과 레아의 형평성을 고려했기 때문인지 레아의 시녀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이는 라헬이 먼저 남편에게 자기 시녀를 첩으로 주는 나쁜 전례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라고 수 있습니다.


일곱째 그녀는 도적이었습니다. 또한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그녀는 친정아버지 라반의 애지중지하던 우상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쓸 만한 물건을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훔친 것도 죄가 되는데 하물며 믿음의 사람으로서 버려야할 우상을 도적질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남편과 자녀들을 생각하는 애정과 모정이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의 것을 도적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덟째 그녀는 간사하고 잘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 라반이 자기의 잃어버린 우상을 찾아 헤맬 때 그녀는 태연히 그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월경기간을 핑계 삼아 교묘히 그것을 감추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월경중의 여인은 부정하다 하여 우상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설마 라헬이 월경 중에 우상을 가까이 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장막에서 드라빔을 찾기 위해 수색하던 것을 쉽게 포기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애석하게도 야곱보다 30년이나 일찍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많은 잘못과 죄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레아를 야곱의 본부인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둘째 부인이 되는 것을 불사하고 끝까지 그와 결혼했기 때문일까요?
여하튼 야곱은 네 명의 부인으로부터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정리하면 형에게 쫓기듯 반담아람으로 갔던 야곱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고 그녀를 연애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얻기 위해 14년을 소비하고 재산을 모으기 위해 그곳에서 6년을 더 삽니다.
그 13년의 어간에 11명의 사내아이와 1명의 딸을 얻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재산 또한 남부럽지 않게 풍족해 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떠나려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은 야곱의 아들들에 대하여 정리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요셉은 라헬의 아들로서 애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당당하게 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굶주림과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지요. 하나님은 야곱의 심정을 읽은 것입니다.
불륜이지만 다윗이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 밧세바의 소생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듯 하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사용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 레아의 아들들에게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권한은 레위가 받았지요.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유다를 통해 예수님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만약 야곱이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레아와 결혼한 것으로 마감했더라면 그는 그의 평생을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 라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론 라헬과의 사랑을 잊어야하는 한 번의 아픔은 있었겠지요.

아내들의 다툼이 시달리는 괴로움, 큰 아들이 패륜아가 되는 우환, 라헬을 먼저 잃는 아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아픔은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셨던 제사장 권과 왕권은 모두 첫째 부인 레아의 후손을 통해서 취되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을 주어 열 두 지파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통해 또는 선한 방법으로 이루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영으로 느끼고 지성으로 받아들여 마음에 담고 그 뜻을 우리 삶에 우선순위로 실천하는 그분의 자녀 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문제들 우리가 풀어야할 그 문제들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풀어갈 수 있는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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