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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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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5) 

1. 거북이와 경주하여 진 토끼가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다가 피나는 노력과 연습을 한 후 거북이에게 재도전을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경기 결과는 또 다시 거북이의 승리했습니다. 낙심한 토끼가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길을 걷고 있는 데 달팽이가 나타나 말을 걸었습니다. “토끼야, 너 또 졌다며~” 

이에 열 받은 토끼가 홧김에 뒷발로 달팽이를 찼고 그 힘에 의하여 달팽이는 건너편, 산기슭까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1년 지난 어느 날, 토끼가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토끼가 문을 열어보니 1년 전, 자신이 발로 찬 달팽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달팽이 왈.....“네가 지금 나 쳤냐?”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마음에 숨은 사람’은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귀하고 값진 마음과 인격은 ‘온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단장하기 보다는 그 마음과 인격을 온유함으로 가꾸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온유’함으로 옷 입어 하나님의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온유함으로 옷을 입는다.’는 말은, 입은 옷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듯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온유함을 나타내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온유한 자’는 본능과 충동, 격동 등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온유하다’는 말은 우유부단이나 아첨, 비열, 무력하고 굴종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유명한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분노할만한 때에 노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정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하며, 자기의 무지와 연약함을 아는 겸손을 가진 자는 복되도다. 이 사람은 사람들 중 왕이로다.” 


2. 온유한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동방의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7남 3녀의 자녀들이 있었고 당대에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 하루는, 스바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가축들을 빼앗아 가고, 종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재난에 큰 충격이었는데 마음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갑자기 광야에서 강풍이 불어 집이 무너져 자녀들 모두 깔려죽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엄청난 재난과 환난을 당해 그야말로 황당한 상황이었는데 욥이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욥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리고 욥은 그러한 환난과 재난을 당하면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욥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자신에게 불어닥친 모든 불행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욥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환난과 재난을 두고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그 사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원망 불평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신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 피조물인 것을 겸허히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난과 재난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온유한 것입니다. 

사실 욥은 자신의 범죄나 자녀들의 죄악으로 인해 그같은 환난과 재난을 하나님의 형벌로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 받은 환난과 재난이었는데 그러한 사실조차도 욥은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진정한 온유함을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욥은 이러한 온유함으로 마침내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42:12-17)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범사에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가 되어 욥과 같이 갑절의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인생인지라 때로 실수하고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의 채찍을 주실지라도 달게, 순히, 온유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룩한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 징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히12:5-11)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온유함으로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 그 언약에 약속된 모든 축복을 이루어주십니다. 레위기26:40-43을 보겠습니다.

(레26:40-43)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징계와 채찍을 통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교만한 마음을, 할례받지 아니한 마음으로 표현하며, 이러한 사람들은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할례를 받아 겸손히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는 온유함을 보인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 복을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추이면서 “(행26:1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는 주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울이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26:16-18)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내가 네 백성과 이방인들에게서 너를 구출하여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이제 너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나를 믿어 죄에서 용서받고 성도들이 받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받게 하리라.

예수께서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사울 네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장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시 돋친 채찍에 발길질하면 너만 다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벗어나려하지 말고 순히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온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채찍이나 징계가 어떠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그 뜻에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습니다.

(약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사무엘로부터 하나님께서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삼상 15:23)는 말씀을 들었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결국 악신이 들려 고생 끝에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충신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하고 그 아내를 취한 범죄에 대해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들었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고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고 회개했습니다(삼하 12:13). 이같이 하나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 회개했을 때 그 즉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하나님의 칼(검)에는 독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픈 상처를 깨끗이 도려내 새롭게 축복하십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온유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때 십자가를 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6:38)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리고 예수께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마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 죽음의 쓴 잔을 두고 거듭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한 것입니다. 


3. 다음으로, 진정한 온유함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딛 3: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온유한 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자제할 줄 압니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진정으로 온유한 마음은 유순하고 너그러우며 온갖 자극적 상황에서도 함부로 성을 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온유하다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도 끄떡없이 자신을 제어하고 평온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악으로 나올지라도 선으로 대응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우리는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해를 당하면 당할수록, 악의와 조롱에 싸이면 싸일수록 더욱 끈기있고 끈질기게 선으로 대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 받으셨을 때를 생각하며 자기 마음을 다스려 온유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5:1-2)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온갖 멸시와 고통을 참으시며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하나님을 본받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며 결코 자만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합니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온유한 사람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돌보아줍니다.

(빌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자기를 위하여 남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존경을 받지 못해 분노를 터뜨리며 쓰라린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푸념을 터뜨리고 아우성을 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의 권리나 이권, 지위를 위해 불평하고 다투며 싸웁니다. 남이 떠받들어 주기를 기대하지 마시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구하면 할수록 얻는 것은 더욱 적을 것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멀리할수록 당신이 원하는 것을 받을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날이 갈수록 부유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에 내려왔을 때, 그의 조카 롯도 함께 했었습니다. 그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지내는 가운데 그도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에게 가축이 너무 많아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그 땅의 목초지가 부족했습니다. 좁은 땅에 가축들을 키우다 보니 자연히 그 종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합니다. 

(창13:8-9)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형제, 친족간에 화평을 위해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롯은 소돔으로 떠났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3:14-17)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아브라함은 롯과 화목을 위해 조카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될 모든 것을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손해를 입을지라도 온유함을 나타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큰 복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종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섬기신 것처럼 행하는 것이 바로 참된 온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유함으로 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벧전2:20-23)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온유는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 인내하고 오래 참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사 우리를 위해 본이 되셨습니다. 죄를 범하여 매를 맞으며 참으면 그것은 아무런 영예가 되지 못하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면 이는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온유는 용서하며 결코 앙갚음을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 것은 사랑의 행위로 그의 원수를 정복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온유에 대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때가 분노할 때이고 어느 때가 분노해서 안 될 때인가? 분노에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욕된 것이나 피해가 온다면 화를 내어서는 안 될 때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웃이 불편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이기적인 분노여야만 합니다. 이기적인 분노는 항상 죄가 되지만 비이기적인 분노는 도덕과 정의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주지 아니하면 분노하십니다. 

(출22:21-23)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하나님은 사회의 부정 부패와 불의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암5:7-12)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사10:1-20)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예수님께서도 마음 중심은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 형식만을 지키려는 사람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종교 모리배들에 대해 분개하시며 질책하셨습니다. 

(막11:15-17)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과 사회의 죄악을 없이 하고 혼돈과 어둠에 질서와 광명을 주는 생명력이 있는 창조적 분노,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을 증오하며 심판을 목적으로 하는 분노가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하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분노입니다. 그러나 분노해야 할 때에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분노할 까닭이 없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파괴적인 분노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년 365일 매일 매일 반복되는 부정부패, 살인 강도, 답답하고 지루한 내용들을 되풀이는 하는 매스컴들, 나날이 증가하는 실업률, 사이비 종교인들의 온갖 추태, 정권만 바뀌면 잡아들였다 놓아주는 작태들,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은 끝간데 없습니다. 분노하다 지쳐 슬프기까지 합니다. 분노의 소용돌이가 지난 뒤에 허전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비애와 슬픔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분노, 타락과 퇴폐로 얼룩진 사회를 일신하는 거룩한 분노, 증오로 가득 찬 상한 마음에 아름다운 향기로 채우는 사랑의 분노일 것입니다. 매를 맞고 또는 꾸중을 듣고 아니면 욕을 먹고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감싸주는 온정 속에서 나오는 사랑의 분노로 우리를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천하보다 귀하고 소중히 여기며 돌보는 거룩한 분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참으로 온유한 자들입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분노는 이처럼 청사에 빛이 나는 법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있는데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요 “온유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자는 “분노할만한 때에 노하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노하지 않으며 자기의 본능과 충동과 정욕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하는 자”입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생활감정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가 하나님의 다스림에 따라 억제되지 아니하면 파괴적인 분노가 될 뿐이며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22:24-25)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잠30:33)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자신을 계속 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분노를 해소하지 않고 억누르기만 하고 계속 가슴에 품고 있게 되면 인격을 부정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파괴적인 분노로 분출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분노를 피하고 절제하라고 충고는 하면서도 분노의 감정을 무시하라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온유가 성령의 열매이듯이 의분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들에게 건전한 열기의 의분을 심어 주셨습니다. 분노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가 온유한 자이며 복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성령에 의한 의분이야말로 창조적인 분노, 거룩한 분노, 사랑의 분노인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분노를 완전하게 자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의분강개(義憤慷慨)의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허만 멜빌의 <백경>에 말향고래 중 하나인 흰 고래 모비딕이 있습니다. 일본 근해에서 이 모비딕에게 한 쪽 다리를 잃은 주인공 에이헤브는 그 고래와 똑같은 종류의 고래를 잡아 그 턱뼈를 갈아 흰 의족(義足)을 만들어 달고 다닙니다. 그는 의족을 배에 걸친 채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그 거대한 흰고래를 추적합니다. 결국 에이헤브는 흰고래를 발견했고 분노를 다해 추격합니다. 마치 희고 견고하고 거대한 성벽같은, 인간의 완력으로는 대적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흰고래와 마주 섰을 때, 에이헤브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험난한 파도여, 끝없는 저편에서 몰려와 내 숭고한 죽음의 정수리를 더욱 치켜올려다오. 모비딕! 난 네 놈과 싸워 널 지옥의 한가운데서 찔러 죽인 후, 내 가슴에 쌓여 있던 증오의 마지막 숨을 내뱉을 것이다.” 

결국 분노라는 증오의 독약이 묻어있는 에이헤브의 작살은 던져지고 고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마지막 질주를 시작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이 철저한 복수의 순간, 에이헤브는 작살에 연결된 밧줄 고리에 목이 감겨 보트로부터 바다에 굴러떨어집니다.  

그렇게 밧줄에 목이 감긴 채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결국 에이헤브는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분노의 작살이 고래의 목숨을 관통하는 그 순간이 자신에게도 똑같은 파멸의 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이헤브의 분노의 작살은 흰고래 뿐만 아니라 그의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선원 중 오직 한 사람의 생존자만 남긴 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데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에이헤브는 그의 분노 때문에 그 분노와 아무 상관도 없는 선량한 선원들을 간접 학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포경선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증언자인 이스마엘은 에이헤브의 분노의 작살이 흰고래에게 던져지기 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늙은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분노의 존재를 창조해서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분노의 독수리는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낸 분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통제, 성령의 통제를 받지 않은 분노는 파괴적인 분노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적 분노, 거룩한 분노, 사랑의 분노로 인간의 죄악과 사회의 무질서와 혼돈, 어둠을 광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여 결실하는 옥토와 같습니다. 옥토는 말씀의 씨가 떨어질 때 잘 자라서 100백,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가르침 받기를 잘 하는 마음이야말로 진리를 속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여는 자가 참으로 온유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가장 교만한 자를 가장 겸손하게 만들 수 있고, 가장 완악한 자를 가장 온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웠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도 복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마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라면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장 큰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분노를 성공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분노를 이겨내는 최선의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사로잡아 돌처럼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겔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성령은 여러분의 마음을 온유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죄가 하나 없으신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가시면류관 쓰시고,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다 받으시고, 십자가를 걸머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그리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도 그 인간 군상들을 향해 한 마디 분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을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분노이며, 인간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분노의 표현입니다. 예수 믿고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온유한 자가 되시므로 자신과 더불어 이웃을 행복하게 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고전 13:4) 남편과 아내, 자녀, 가족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온유한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온유한 사람은 세상을 소유한거나 다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갈5:23)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유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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