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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이신 성령님을 존중하기 (요 1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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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이신 성령님을 존중하기 (요 14:26-27)

[요한복음 14장 26-27절]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어떤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사 부부로 시작해서 둘 다 교장 선생님이 된 아주 모범적인 부부죠.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남편이 지켜야 할 것 세 가지를 정했답니다.
1. 아내가 만들어주는 대로 음식 먹기.
2. 월급은 바로 아내에게 가져다주기.
3. 모든 중요한 결정은 아내가 내린다.

먼저 남편은 이 세 가지 원칙을 잘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문제가 없는데 세 번째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아내는 이 세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 굉장히 힘들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남편이 한 번도 밥과 음식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아 그것이 만족스러운 건지 불만족스러운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도 식탁에 신경을 쓰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규모 있는 생활을 위해 월급을 관리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다 보니 너무나 인생이 억울한 생각이 들더랍니다. 일이 생기면 늘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자신이니 말입니다.

어느 시점이 되자 아내는 남편에게 중요한 결정을 위임하게 되었고, 이제는 가정이 참 평안하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언가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에게 맡기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기로 한 순간부터는 더욱 그렇습니다. 생각은 맡겼는데, 사는 것은 내 맘대로 산다면 그 차이 때문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성령님은 누구신가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먼저 주목해 보겠습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한 것 같은데, 요한복음은 성령님에 대하여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고, 사도행전은 그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최고이신 성령님을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보혜사’라고 나오는데, 사실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여러 단어로 나와 있습니다.
“Counselor, Helper, Comforter, Advocator”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생각과 우리 삶의 공식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들을 맞이할 때,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지요? 문제는 구별이 쉽지 않고, 자꾸 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변호하시고, 필요한 상담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이 뭔가요?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제 묻고 싶습니다.
성령님을 존중해야 할까요? 아니면 무시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인가요? 성령님을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도록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고, 성자 예수님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분을 늘 의식하고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자신의 약함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약함을 드러내면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나만 약한 것이 아니구나! 저런 사람도 저런 유혹에 시달릴 때가 있구나!”
가만히 보면 은혜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성령님의 내주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다른 것이 있다면, 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죠. 그 약함 가운데서 견디고 승리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겠죠?

어떤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사가 되었을 때, 고모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네가 목사가 된다고 약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 여전히 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이겠지, 그러나 목사가 된 이 순간부터 나는 평신도로서 네가 넘어지지 않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확 쏟아졌다고 합니다.

성령님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큰 특권이 무엇인가요?
넘어지기 쉬운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동물과 같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죠.

지난해 아프리카에 젊은이들을 위한 집회에 갔을 때입니다.
몇 해 전 한 목사님이 “정직”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설교를 마치고 휴식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목사님은 무슨 ‘정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십니까? 그게 설교의 주제가 됩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정직하게 사는 거지, 그걸로 설교를 해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성령님을 존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확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성령이 하나님이시고 또한, 자기 죄를 직시하고 회개한 사람들 속에 내주하신다면,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관해 믿는 바는 그것이 우리의 경험 가운데서 입증될 때 더 가치가 있습니다.

찰스 프라이스가 쓴 [진정한 그리스도인]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가 방문하고자 하는 도시로 가는 버스의 출발 시간을 기록한 시간표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 시간표는 진실이며 정확하긴 하지만, 그것이 나를 그 도시로 데려다 주지는 않습니다. 시간표가 진실이며 내가 거기서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직 내가 그 시간표에서 알아낸 시간에 버스를 타서 그 도시로 감으로써 시간표에 나오는 정보가 나의 경험이 될 때라야 그 시간표가 진정으로 가치가 있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경험하는 것보다는 진리를 믿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성경에서 보여주는 진리에 견고한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며 진리의 말씀을 삶에서 경험함으로써 성경의 진리가 삶에서 역사하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에 대한 첫 번째 증거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새로운 열망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지 않거나 소멸하고 있거나 근심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존중한다는 것은 더욱더 그분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 열망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관계의 친밀함입니다. 이 친밀함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프리카에 갔을 때, 저와 늘 함께하면서 도와줬던 전도사님이 있습니다. 얼마나 친절하게 저를 잘 보살펴주었는지 모릅니다. 떠나기 전에 저에게 묻더군요.
“목사님 제가 열흘 동안 목사님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 한마디가 저의 인생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도사님 덕분에 아주 잘 지냈어요. 최선을 다해 주었고, 참 편하게 해 주었죠. 그런데 더 좋은 인도자가 되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나를 아주 존중하고 잘해주었지만,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나요? 혹시 나를 만나기 전에 우리 부속실에 물어본 것이 있나요?”

자,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성령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참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성령님을 알고 있나요? 성령님이 우리에게 존중받고 싶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성령님의 역사는 “존중”에서 시작되죠.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글을 소개하죠.
우리는 보통 누군가에게 재능이 많아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초점은 우리의 재능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이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무엇을 넣으셨는가?’ 입니다.
곧 우리의 자연적 성품의 능력 및 지식, 경험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께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정말 쓰임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강권하심에 사로잡혀서 주님의 동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료는 오직 자신의 가난함을 깨닫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
기독교의 중심은 우리가 하는 ‘일’아 아니라 우리가 유지해야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존중한다!”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피터 언더우드의 [First Mover]라는 책에 나오는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힘”을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하는데, 한 번 보시고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미국의 힘일까요?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을 때 미국 워싱턴발로 전 세계에 전송된 사신입니다. 자리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합동특수작전사령부의 마셜 B. 준장입니다. 그 자리에 대통령도, 조 바이든 부통령도 힐러리 클린턴도 있지 않습니다. 지금 그 자리를 통제해야 하는 사람에게 내어놓은 것이죠.

만일 여러분이 성령님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지 못한다면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전문성’을 가지고 살아가려 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지위’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재능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잘못된 방향은 우리로 하여금 헛수고를 하게 합니다. 잘못된 방향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거하게 합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은 오늘 본문 26절의 보혜사 성령님을 존중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목적이 바로 2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령님을 존중할 때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세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피터 언더우드가 그의 책에서 우리나라 교육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우리 교육의 최대 약점이 여기에 있다. 세상은 이렇게 복잡해지는 데 교육 현장에서는 “정답은 하나다!”라는 가르침을 고수하는 중이다. 수학뿐 아니라 사회, 역사, 문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런 교육을 강요하는 것이 현실이다.

김소월님의 시 진달래꽃에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대목이 반어법이냐 역설법이냐를 묻는 코미디 같은 문제가 시험에 나온다. 시 한 줄 한 줄마다 밑줄을 그어놓고 그 해석을 일률적으로 달아 달달 암기하는 교육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님을 존중하고, 성령님을 안다는 것이 꼭 어떤 공식에 대입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친밀함”은 말의 뉘앙스에서 작은 행동 하나에서도 다른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잘 쓰는 예화이지만, 부모가 자식을 향해 “집 나가!”라고 말했을 때, 친밀함이 없다면, 어떻게 이해할까요? 제가 아프리카에서 설교할 때입니다. 통역을 하면서 설교를 하는데 제가 아주 영어를 모르면 모르는데, 가끔 제가 하는 말을 통역하는 목사님이 안 하는 겁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유가 있더군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자존감이 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마음의 상처가 돼도 오해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것이죠.
제가 흔히 하는 말이었죠.
“이런 말을 듣고도 감동을 안 하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말을 농담으로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제가 말하는 의미를 이해할 만큼의 친밀감이 없죠.
“제가 이야기하는 학교를 모르면 무식한 겁니다.”
그 말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무시를 당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진짜 그들이 정보에 대하여 무식하기 때문이죠.

말씀을 묵상하며 더욱 다가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존중”한다고 하면서 친밀함이 없다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섭섭함” “두려움” 같은 감정일 것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이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신앙은 “정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집중하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성령님을 존중한다는 것은 “책망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것입니다.
책망받는데 평안합니다. 왜냐하면, 그 책망 속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책망받을 때, 오히려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존중”하지 않는다면 책망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친밀”하지 않다면 책망에 상처를 받게 되거나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존중한다는 것은 책망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혹시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책망받는 것이 정말 인생에서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가끔 저에게 메일을 보내는 젊은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혹시 제가 하려는 일에 문제가 있다면 지적해 주세요.”
저와 같은 사람에게도 지적을 받았으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적 때문에 자신의 약점이 보완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책망하신다!’라는 말은 감히 거역하거나 대항하지 못하도록 위엄 있게 꾸짖는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한 사람들은 끝까지 인도하심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면, 평안함이 없습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거역하는 게, 마음이 평안하시던가요? 책망을 듣지 않았을 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책망을 받았으면 존중해야 평안이 찾아옵니다.
제가 학창시절 책망받았던 일, 탁구에 미쳐서, 무협지에 미쳐서, 장기와 바둑에 미쳐서, 당구에 미쳐서, 고스톱과 포커에 미쳐서. 그런데 말씀에 존중하지 않고 숨어서 하는 것은 늘 불안합니다. 평안함이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또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의란 무엇입니까? 옳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임에도,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당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 특히 악하고 못된 짓만 일삼는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은 의롭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죠.
성령님은 무섭게 의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그 기준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시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잘 묵상해 보십시오.
“평안”은 이 무서운 책망을 받고, 존중하기 시작할 때 찾아옵니다. 잘못된 삶에 대한 통제 없이 평안함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는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는 평안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평안함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죠. 돈이 없을 때는 돈이 생겨야 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돈이 우리에게 평안함을 가져다줄까요? 사랑이 결핍된 사람이 자라면서 사랑을 찾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는 듯하면 그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집착”이라는 말이죠. 진정한 사랑이 아니면 꼭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정확하게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운다고 평안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평안함은 “진리” 가운데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존중하며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렇다면 왜 구합니까? 기도의 개념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응답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응답을 원하여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허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응답은 언제나 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허탈감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살아 있는 증거품으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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