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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출 1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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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출 14:10-14)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 신령한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 믿음의 바람을 일으키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늘의 바람을 일으키시기를 축복합니다.  소망의 바람을 일으키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명의 바람을 일으키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호와의 힘을 붙들고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기적의 기반을 설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믿는 확실한 것은 오늘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삶의 기반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적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귀한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남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는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지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어떤 고난이나 환난도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은 이해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 여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가려면 우리는 한 고개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더 그렇습니다.  간혹 보면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도마처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장 지적인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장 바르게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때문에 믿음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무지 지식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붙잡고 믿는 사람들을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알아서 믿습니까?  또 알아가기 위해서 믿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만약에 예수님께서 지식과 이성을 중요시하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무식한 자가 되지 말고 유식한 자가 되라."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도마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동일하게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네 경험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았음을 기억하십시오.  네 이성과 지식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믿음의 자리에 지식을 놓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여러분의 경험과 판단을 놓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식을 앞세우고 경험과 판단을 중요시하게 되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교회도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식과 경험을 강조함으로서 신앙을 경홀히 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식과 이성을 강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 무식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도 힘든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가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강조하는 르네상스 시대라고 말하는 중세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역사적으로 가장 어두운 암흑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영적 힘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것에 욕심을 부리면서 정욕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종종 드리는 말씀이지만 예수를 지식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경험과 이성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두어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이성과 판단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이성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의 짧은 이성으로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못 하실 일이 무엇이며, 못 이루실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기왕에 믿을 바에는 깨끗하게 믿으십시오.  깨끗하게 믿으라는 말은 내 이성과 경험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순수하게 믿으십시오.  좀 단순하고 무식하게 믿으십시오.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들 주위에서 예수 믿어서 은혜 받고, 복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단순하고 무식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지식과 경험을 강조하게 되면 기독교의 신앙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생명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온갖 부귀와 축복을 받으면서 영적인 잠을 자는 불쌍한 성도가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애굽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의 연약함이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나태함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는 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무서운 것입니다.  미국은 1960년까지 교회도 부흥하고 나라도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모든 학교에 성경공부를 못하게 했습니다.  모든 학교에서 기도를 못하게 했습니다.  지식과 자유를 강조하면서 모든 학교에 보편화되어 있던 신앙생활을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에는 케네디 본인도 불행하게 되었지만 전 미국의 도덕은 무너졌고, 정신도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할 말은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믿음은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고 듣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그 믿음이 증거합니다.  여러분의 바른 믿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믿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증거할 수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증거하는 믿음은 이성과 지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밤 베드로가 만선의 꿈을 안고 날이 밝도록 수고를 했으나 허탕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에 갈릴리 바닷가에는 허탈한 심정으로 빈 배에서 내려오는 많은 어부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를 훤히 알고 있듯이 우리도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는데 결국 꿈은 사라지고 좌절과 허탈감에 빠져서 지나간 세월들을 못내 아쉬움과 착잡한 심정으로 인생의 바다를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허탈해 하는 베드로의 배에 주님께서 올라오셨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는 깊은 바다로 배를 저어서 나아갑니다.  사실, 지난 밤에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었던 베드로였습니다.  어쩌면 지금 베드로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바다로 배를 저어갈 때 주변에 있던 많은 어부들이 손가락질을 했을 것입니다.  조롱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에 주님이 함께 하셨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여서 그들을 조롱하는 사람들까지 불러서 그들의 배에도 만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이 순종했더니 모든 사람이 만선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 길에 부푼 꿈과 기대를 가지고 나의 경륜과 재능과 지식과 모든 힘을 동원해서 노력해 보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이런 것들이 통하지 않는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내 경험과 지식만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인생의 배에 주님께서 오르시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개인에게, 가정에, 기업에, 국가에 주님이 함께 하시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여러분이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우리들에게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아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무려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430년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들이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저 노예로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출애굽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저들에게는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 근성이 있습니다.  그대로 노예로 살다가 죽어 없어질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그저 조상적부터 옛날 이야기처럼 전해지는 전설을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우리는 애굽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선민이다, 그렇게 연연히 교육을 했겠지만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자유할 수 있다, 이들에게 해방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들이 그런 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그렇게 부르짖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으로 보면 그들은 전적으로 무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세를 보내시고 그와 함께 하셔서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기적입니다.  앞 뒤 어디를 보아도 어느 내용을 보아도, 어느 역사를 보아도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적극적인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또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과 순종입니다.  "오직 믿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철저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이 믿음과 순종이 문제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우리들에게도 믿음과 순종만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다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열 가지 재앙도 그렇고, 홍해를 갈라서 들어가게 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하나에서 열 가지가 다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문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기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을 보면서 그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언제나 자기 지식으로 먼저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이성으로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사랑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옛날 이야기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성경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자신의 이성과 지식 속에 가두어놓고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생활을 하는 종교꾼을 통해서는 어떤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이성과 지식을 앞세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강퍅함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기에 철저하게 완악한 사람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여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든 하나님의 능력을 거절하고 완악하고 강퍅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3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문을 닫지 마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내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내 마음이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거절하고 마음의 문이 닫혀져서 강퍅해지고 강퍅해지면 그대로 저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나왔기에 마음대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앞에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따라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낙심되었습니다.  이제는 다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죽는 것이지 안 떠나면 절대 죽지 않습니다.  성도를 무너뜨릴 만한 것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은 대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적이 있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대적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이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분명히 위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름 기둥의 인도를 따라서 왔는데 앞에는 홍해 바다입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바로의 병거와 마병들이 추격해 옵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 종류의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위기 앞에서 초연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에게 달려가서 항변합니다.  애굽에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환경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서 기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눈 앞에 처한 상황이 두려워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자신들의 환경을 보고 두려워 벌벌 떨면서 하나님께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범죄한 인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던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을 따먹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그들에게 일어난 첫 번째 변화가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사라지고 불안과 공포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그늘 밑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두려움이라는 것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질 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불신앙입니다.

두 번째는 모세의 반응입니다.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가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보십시오.  지금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모세도 함께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에야말로 우리는 우리의 바른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만사가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경륜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도 믿었습니다.  모세에게 이 믿음이 있는 한 그에게 있어서 환경은 문제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출애굽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출애굽을 완성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놀라운 능력을 통해서 430년 동안이나 노예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지금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길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빠른 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죽임을 당하게 하시려면 무엇하려고 출애굽을 이루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에 빠져 죽게 하시려고 여기까지 인도하셨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위기에서도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당연히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망하고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은 이 믿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더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더한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십시오.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 바라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절망하고 원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전쟁에서는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아니면 살기 위해서 도망을 쳐야 합니다.  죽든지 살든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허무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웃기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웃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서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 사라의 나이가 89세 때에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내년 이맘때쯤 되면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그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웃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을 때에 사라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웃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웃기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과 이성에 앞서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느냐,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환경만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군대라고 한다면, 그래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면 대책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 때에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립니다.  유대인들의 속담에 "앞 뒤 옆에 다 막혀버릴 때에는 위를 바라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본문의 모세가 그랬습니다.  사방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방이 꽉 막혔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위를 바라보아야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 모세는 손에 든 지팡이로 홍해를 쳤습니다.  그러나 이 지팡이는 보잘 것 없는 마른 막대기입니다.  불에 넣으면 재가 되는 부지깽이입니다.  도끼로 쪼개면 산산조각나는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팡이를 모세가 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팡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홍해를 가르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모세의 지팡이 외에도 수많은 지팡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홍해를 갈랐던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모세의 지팡이였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홍해를 가르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절망으로 출렁거리는 인생의 바다에 소망의 길을 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홍해는 믿음이 있어야 건너갈 수 있습니다.  건너가다가 물이 합쳐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염려하면서 의심하는 사람은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홍해를 가로질러 만들어진 이 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못 믿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높이 들라고 하십니다.  바다를 향해 내려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지팡이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홍해를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 구원함을 받았지만 애굽의 바로와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다 건넌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면 세상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이 시대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저는 미국의 유명한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신앙간증을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 교회에 스텐리라는 장로님이 있는데 그는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아 오다가 혼수 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때 한 외과 의사는 그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으며, 또 살아난다 해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 때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스텐리 장로님이 입원한 직후에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신경 외과 의사인 스마일러 브랜튼 박사의 이야기를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두개골 부분에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뇌에는 정상적인 부분도 아주 많습니다."  슐러 목사님은 그의 이야기를 믿으며 우리 교회의 장로가 들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다고 합니다.  "스탠리 장로님, 슐러 목사입니다.  당신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첫 번째 표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으면서도 스탠리 장로님은 자신은 회복된다는 꿈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에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교회에 온 스탠리 장로님은 목발도 없이 교회에 걸어들어 왔습니다.  슐러 목사님은 뛰어나가 이 장로님을 맞이하였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이때 슐러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스탠리 장로님, 위대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 중에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꿈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의 날개를 퍼덕거리는 한 하나님은 우리의 꿈이 깨어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에는 깊은 곳으로 가는 길목이 있습니다.  이 깊은 길목에서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얕은 곳에서만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얕은 곳에는 희생이나 헌신이 없어서 아무런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 여정에는 이성이나 상식이나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홍해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 홍해는 무익입니다.  역경입니다.  환난입니다.  실패입니다.  홍해는 고통과 질병과 근심과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홍해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저마다 홍해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홍해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깊은 골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나의 홍해를 신작로처럼 열 수가 있습니까?  믿음의 지팡이를 높이 드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의 지팡이로 여러분 앞에 있는 홍해를 내리치십시오.  어떤 고난과 좌절 속에서도 하나님만 붙들고 나가면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는다면 반드시 그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홍해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산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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